# 78
24. 의외의 조력자(1)
짝! 짝! 짝!
“대단해!”
시페이가 정말로 밝은 표정으로 세은을 맞이했다.
그의 얼굴은 가식이 전혀 섞이지 않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자국의 인재들이 해결하지 못한 일을 용병이 단숨에 해결해 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할 만도 했다.
그러나 세은에 대한 여러 정보를 제약 없이 접할 수 있는 위치의 시페이는, 그런 감정이 불필요하단 사실을 느꼈다.
당장 일본의 사례가 아주 훌륭한 반면교사가 되어주고 있었다.
“정말로 대단하군! 이렇게 빨리 해결할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했네.”
반짝이는 두 눈을 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에 우리의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했을 때는 걱정이 되기도 했지. 하지만 괜한 기우였던 것 같군. 한때나마 걱정했던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진다네.”
시페이는 과장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세은에게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현재 국제 정세는 매우 혼란스럽다.
하지만 오히려 혼란은 중국이 진정한 대국으로 치고 나가는 데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당장 한미일의 공조에 균열을 내고, 중국이 한국을 한편으로 포섭한다면 최전방에서 미일을 견제할 수 있는 좋은 방어막이 생기는 셈이었다.
세은의 전략적 가치는 북한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했다.
세은이 원한다면 북한을 압박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언제나 국익이 우선이었다.
다만 현재 세은의 심중이 어디에 있는지가 가장 중요했다.
그동안의 행적을 봐서는 일본을 좋아하지 않는다.
미국은 조금 애매했는데, 도움을 주고받기는 하지만 전폭적으로 도움을 준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모두 정당한 거래에 의한 움직임이었다.
이럴 때 중국이 무조건적이고 조건 없는 호의를 보여주어, 세은의 호감을 산다면 아주 커다란 성과였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인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 그나저나 우리가 주기로 한 의뢰 대금 말일세.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적은 것 같더군. 더 쳐주겠네.”
“필요 없어.”
세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시페이는 단호하게 계속 말을 이었다.
“아닐세. 우리는 당연히 우리 측 지원군에 피해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게? 우리는 피해를 입은 것도 없고 단 하루 만에 모든 상황이 종결되었어. 이런 상황에 단순히 약속된 보수만을 지급한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중화민국을 속이 좁다 비웃을 게 분명해.”
세은은 가만히 시페이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아마도 채연이나 재호가 있었다면 주겠다는 것을 왜 사양하냐고 했겠지만, 굳이 필요 없는 것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시페이는 집요했다.
“물론! 우리가 이것을 빌미로 자네에게 다른 요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정말로 고마워서 그러는 것이니까 말이야.”
시페이가 열성적으로 세은을 계속 설득했다.
결국 세은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이상하거나 어이가 없는 요구도 아니고, 더 보상을 쳐준다는 말을 가지고 판을 엎을 순 없는 일이니까.
“좋아. 까짓것 받지.”
“허허. 잘 생각했네!”
시페이는 혹시나 세은의 마음이 변할까 비서에게 바로 보수를 입금하도록 지시했다.
비서가 바로 부하에게 연락해서 입금을 지시하자, 시페이는 그제야 다른 본론을 꺼냈다.
“그나저나 말일세. 한국에 있을 때도 러시아의 방문을 받았다고 들었네.”
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러시아의 상황도 잘 알고 있겠군. 안 그래도 러시아에서 세은 자네가 우리에게 먼저 온다는 말을 듣고, 꼭 일이 끝나면 자신들과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을 해왔네.”
“상관없어.”
“괜찮겠나? 원한다면 우리 중국에 있는 동안엔 러시아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게 해줄 수도 있네.”
“어차피 만나볼 생각이었으니까 괜찮아.”
“오! 그런가? 그럼 다행이군. 사실 우리의 우방인 러시아의 부탁을 거절하는 상황을 원치 않았거든. 물론 자네가 싫어하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일세.”
끝까지 세은의 기분을 생각하며 말을 하던 시페이가 은근하게 물었다.
“그럼 말일세…… 혹시 지금 당장도 괜찮겠나? 우리의 러시아 친구들이 몸이 달았는지 자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주석궁으로 바로 달려왔다네.”
아무래도 시페이가 만약을 대비해서 불러놓은 게 확실했다.
아무리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라도 중국 내에서 세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동선을 정확하게 꿰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눈에 뻔히 보이는 수사였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넘어갈 수 있을 일이었다.
나중에 다시 시간을 내서 만나느니 차라리 지금 만나는 것이 훨씬 편하기도 했다.
“상관없어. 들어오라 해.”
“하하하! 역시 화통하군! 자네를 알면 알수록 좋아진단 말이야.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어쩐지 자네와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네.”
세은은 가볍게 어깨만 으쓱거리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페이는 그걸로 충분했는지 비서를 시켜 러시아 외교관을 들어오게 했다.
똑똑.
“주석님, 러시아 공사인 이고르 파블류첸코가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시페이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중년의 남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시페이에게 먼저 인사했다.
“먼저 이런 자리를 흔쾌히 주선해 주신 주석께 감사드립니다.”
“하하. 어떻게 우리의 가장 가까운 우방인 러시아를 잊을 수가 있겠나? 당연한 일이지.”
“아닙니다. 우리 러시아는 주석님의 도움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거참. 당연한 일을 가지고 사람 얼굴에 금칠을 하는군. 일단 자리에 앉지.”
“알겠습니다.”
이고르는 자리에 앉기 전에 무심하게 차를 들고 있던 세은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안뇽하아십니꽈?”
어색했지만 분명한 한국어로, 이고르가 세은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고르의 인사를 들은 세은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인사를 받았다.
“하이."
이고르는 일단 세은이 자신의 인사를 받아준 것에 만족했다.
첩보에 의하면 아예 상대하기 싫은 사람의 인사를 받아줄 리 없는 성격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세은의 행동엔 처음과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 사실까지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왕들이 무작위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각 국가를 최대한 도와서 자주적인 방어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국에 파견했던 요원에게 많은 설명 들었습니다. 자국에 일어난 일에 대한 원인을 아신다고 하더군요.”
이고르의 말에 세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마계의 침공을 막기 위해 에일린에게 불려서 이계로 넘어갔던 세은은, 마왕들의 권능과 특징을 술술 꿰고 있었다.
기본적인 권능을 알아야 상대할 때 가장 효과적인 전략과,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
세은은 에일린에 의해 길러진 대 마왕 스폐셜리스트나 다름없었다.
“이번 중국의 일도 단 하루 만에 처리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로 놀랐습니다.”
이고르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한국에 있을 때 저희 요원에게 먼저 중국의 일을 처리한 뒤,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렇지.”
“그럼 이제 자국의 의뢰를 받아주십사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탁.
어느새 자신의 앞에 찻잔이 놓였지만, 이고르는 차는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말했다.
“저희는 한국에 많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현재 북한에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남한에 유리하게 움직일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꿀꺽.
남은 말을 이어서 하기 전 이고르는 시페이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부터 세은에게 전할 조건은, 러시아와 중국이 대략적으로 조율한 조건이었다.
다만 그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공개해도 되는지에 대해 시페이에게 눈빛을 보낸 것이다.
이고르의 눈빛을 받은 시페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페이의 동의를 구한 이고르는 아직 생각만으로 그친 조건을 세은에게 건넸다.
“혹시나 남한이 원한다면, 우리는 남한 주도의 통일을 돕겠습니다.”
“호오?”
이번 이고르의 제안에 세은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통일을 돕겠다는 제안은 세은도 생각해 보지 못한 제안이었다.
거기에 시페이가 있는 곳에서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어느 정도 사전 교감이 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세은은 냉정하게 이고르에게 되물었다.
“지금 당장 통일을 해서 우리에게 뭐가 득이 되지?”
“예?”
이번엔 예상치 못한 세은의 반문에 이고르가 되물었다.
그동안 세은의 행적을 봐서는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 평가에 정점을 찍은 것은 얼마 전에 일본에서 있었던 일과, 일본에게 요구했던 내역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통일을 원하고 있을 것이라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세은은 그런 그들이 판단과는 달리 냉정하게 반문했다.
“통일? 좋지. 그런데 게이트 때문에 난리도 아는 상황에서 통일을 한다고 될까? 북한도 난리가 아닐 텐데 말이야. 막말로 지금 당장 통일하면 내부 단속하느라 외부 신경 쓸 틈도 없을 거고 말이야.”
“세은 씨가 있는데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은근히 세은의 자존심을 추켜세우며 이고르가 말했지만, 세은은 완고했다.
“뭐, 언젠가 되면 좋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전혀 이득이 될 수가 없을 것 같군. 게이트가 언제 생길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말이야.”
탁!
찻잔을 내려놓으며 세은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런 얘기는 나한테 하지 말고 청와대에 직접 해. 정부 일에 간섭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거야 미국 애들이 정부에 미리 말을 해놔서 나한테 결정권이 넘어 왔으니 그런 거고. 이건 우리 정부랑 얘기가 안 되어 있잖아. 귀찮게 하지 마."
냉정하게 딱 끊는 세은의 말에 이고르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하지만 노련한 외교관답게 이고르는 재빨리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알겠습니다! 뜻이 정 그러시다면야 한국 정부와 먼저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자국을 도와주시는 문제는…….”
이고르가 살짝 말끝을 흐렸다.
이 또한 정보로 들어온 세은의 성격을 감안하고 미리 연출까지 계산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세은은 어차피 이미 러시아에 가기로 마음을 먹은 상황이었다.
“뭐, 가도록 하지. 조건은 중국과 동일하게.”
이미 지금까지 번 돈으로도 생활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자원봉사로 일을 해줄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리고 무료로 움직여 주다가 사정상 못 가는 나라가 생기면 왜 다른 곳은 가고 우리는 오지 않느냐는 뻔한 말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엔 적당한 보수를 받고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당연합니다! 섭섭하지 않게 준비하겠습니다.”
세은이 러시아의 의뢰를 수락한다는 의사를 표현하자, 얼굴이 환해진 이고르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이걸로 한 건의 거대한 실적을 올렸다.
국가에도 충성하고, 자신의 커리어에도 아주 튼튼한 사다리를 놓은 셈이었다.
세은이 이고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하면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오랫동안 집을 비우기 좀 그래서 말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바로 본국에 연락을 하겠습니다.”
“허허. 이것 참. 얼마간 더 머무르지 그러나? 자네를 위해 연회도 준비했는데 말이야.”
둘의 협상을 가만히 보고 있던 시페이가 한마디를 더했다.
시페이로서는 세은과 친분을 더 다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때문에 집을 상당히 오래 비운 세은으로선, 부모님과 에린 때문에 한국에서 오래 벗어나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이번에는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세은이 좌우로 고개를 젓자 굉장히 서운하고도 아쉬운 표정을 짓던 시페이가 갑자기 손바닥을 부딪치며 말했다!
“아! 나도 러시아로 따라가면 되겠군. 안 그래도 러시아에 한 번 순방을 했어야 하는데 말이야.”
마치 동네 아저씨가 해외 여행 가는 것처럼 가볍게 말을 꺼낸 시페이가 이고르에게 말했다.
“러시아에 내가 방문할 테니 일정을 조율하자고 전해주게.”
“제, 제가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제안에 이고르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러나 시페이는 이미 마음을 정했는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네 지금 핫라인으로 연락할 것 아닌가? 비밀리에 이틀 정도만 갈 테니 위에 말을 잘 해주게. 물론 우리 쪽에서도 따로 연락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내가 자리를 비운 걸 모르게 할 생각이니까.”
“아, 알겠습니다.”
“허허. 여행 가는 것 같아서 설레는군.”
갑작스런 시페이의 돌발 행동에도 세은은 별다른 반응 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