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교황이다-77화 (77/225)

# 77

23. 마왕 샥스(2)

도착했다는 세은의 말과는 달리, 주변에 별다른 게 보이지 않았다.

일행이 여태까지 하염없이 지나왔던 풍경과 전혀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의문을 가진 채연이 세은에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보다 세은의 걸음이 더 빨랐다.

터벅, 터벅.

속도를 줄이고 앞으로 걸음을 옮긴 세은이 가볍게 손을 들어 앞으로 쭉 뻗었다.

지잉―

세은의 팔이 특정 지점을 지난 순간, 허공에 파동이 생기며 세은의 손이 사라졌다.

“엑?”

그 모습에 소진이 놀라 침음을 흘렸다.

그러나 이내 세은이 손을 다시 빼내자 멀쩡한 팔이 보였다.

마치 영화에서 보이지 않는 장막으로 가려진 필드가 현실에 구현된 것 같았다.

“이거, 다 같이 들어가려면 이걸 부셔야겠는데?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샥스가 권능으로 만들어 낸 벽이었다.

이 정도로 주변의 감각을 속이는 만들 정도면 힘을 거의 회복한 것 같았다.

“괜히 놈이 이상한 짓 하기 전에 얼른 가서 처리하고 올 테니까.”

방금 벽을 침입했던 일 때문에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았을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기다리라고?”

너무 허무한 세은의 지시에 울컥한 영한이 반발했다.

“그냥 기다리라고 할 거면 그냥 처음부터 기다리라고 했어야지. 장난 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하자는 거야?”

영한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반론이었다.

어차피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하고 기다리게 할 거라면 굳이 여기까지 데려올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데 자신들이 필요해서 데려온 건 아니니까 말이다.

“아까부터 자꾸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독단적으로 내리는데, 이런 식이라면 나는 바로 귀국하겠어.”

“흐음…….”

세은은 고민을 시작했다.

세은이 생각을 하고 있자 채연과 소진도 세은이 뭐라고 할지 주의를 기울였다.

둘 역시 여기까지 와서 마냥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다만 둘은 안드라스를 겪은 적이 있기 때문에 내적으로 갈등하는 중이기는 했다.

‘한국에서는 제일 핵심 전력이긴 한데…….’

한국의 전력을 정비할 때 김영한을 빼놓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귀찮다고 그냥 막나가게 둘 수는 없는 상황.

잠시 고민하던 세은은 약간의 귀찮음을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영한도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한데다, 온전하지 않은 샥스를 상대로 세 명 정도 지키는 건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들어가지. 대신 들어가서는 지시를 잘 들어야 하는 걸 명심해.”

“훗.”

영한은 자신의 제안이 통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럼 그렇지. 한국에서 나를 빼놓고 누구를 얘기해?’

세은을 만나고 상당히 떨어졌던 나름의 자존심까지 챙긴 영한이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들어가자.”

우웅―

세은이 신성력을 움직여 아예 샥스의 장막을 걷어버렸다.

장막이 걷어지자 안의 풍경이 적나라하게 일행의 시야에 들어왔다.

여태까지 지나쳐 왔던 초원과 달리 안에는 상당히 커다란 나무들이 우뚝 서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왜 여기만 이렇게?”

채연의 혼잣말에 세은이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샥스는 새처럼 생겼거든, 새들은 나무를 좋아하지.”

간단한 대답을 마치고 세은이 먼저 이동을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변한 환경에 넋을 놓고 있던 일행들도 황급히 세은을 따라 이동했다.

타다닥―

나무로 인해 숲은 매우 울창했지만, 아직도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도 몬스터가 없네? 단순히 그냥 숲만 생긴 거야?”

바뀐 환경에 긴장하고 이동하던 소진이 물었다.

세은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소진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처음에 말한 가정 중에 두 번째 가정이 맞는 거 같은데.”

“두 번째면…….”

“잡아먹었다는 얘기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영한이 끼어들었다.

일행들이 알아서 대화를 하게 둔 채 세은은 마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계속 달렸다.

현재 조심스럽게 기척을 지우고 달리던 중이었다.

일행들은 기척을 지워도 소용없을 테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상태.

자신의 장막을 순식간에 없애기에는 실력이 약한 일행들의 기척을 느끼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샥스가 눈앞에 훤하게 보였다.

워낙 조심성이 많은 놈이라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을 파악하느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터였다.

상황을 파악하느라 조심하고 있는 사이에 찾아가서 단칼에 끝내 버릴 생각이었다.

가장 깔끔한 방법.

반대로 상황을 모르는 일행들은 몬스터가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해지자 다시 긴장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어차피 목적지에 도착하면 세은이 다시 알려줄 거라는 생각이 저편에 깔려 있었다.

“꺅? 컥! 커억! 뭐예요!”

갑자기 세은이 잘 달리고 있던 채연의 뒷목을 잡아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핏!

동시에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채연의 뺨에 한 줄기 선혈이 빨갛게 그어졌다.

예상치 못한 세은의 행동에 당황했던 일행들은, 채연의 뺨에 난 상처를 보자 바로 전투 태세로 들어갔다.

“어, 어디야?”

채연의 뺨에 난 상처를 확인한 영한이 주위를 급하게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위에는 오직 나무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설프게 움직이지 마.”

세은이 경고했다.

샥스의 권능 중 숨긴 것을 찾아내는 능력도 있다.

그리고 그 능력을 반대로 응용하면 물건을 숨기는 것도 가능했다.

샥스는 그 능력을 자기 자신에게 사용해서 공간을 왜곡시키고 있는 상태였다.

‘3초면 찾을 수 있겠지만 말이야.’

문제는 그 3초 동안 일행에게 공격이 무수히 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내 세은의 머릿속에 아주 좋은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세은은 갑자기 영한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그의 뒷목을 한 손으로 강하게 부여잡았다.

“뭐, 뭐하는 짓이야?”

돌발행동에 당황한 영한의 물음에 세은이 대답했다.

“직접 겪으려고 들어왔으니 제대로 겪게 해줄게. 기감을 잘 끌어올려 봐.”

“뭐?”

그러나 영한이 미처 세은의 말에 반응하기도 전에 세은이 영한을 그대로 집어 던졌다.

“으악?”

핏―!

동시에 샥스의 공격이 영한을 노리고 쏘아졌다.

세은이 얼른 빠르게 앞으로 날아가고 있던 영한을 따라잡아 붙잡았다.

팍!

날아가는 속도를 계산하고 날아왔던 공격이 바로 앞의 땅에 깊숙이 박혀들었다.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확인한 세은이 다시 영한을 집어 던졌다.

“크헉!”

영한은 또다시 세은의 힘에 의해 무기력하게 허공을 날았다.

팟―!

조금 더 강해진 파공성과 함께 다시 공격이 들어왔다.

선명하게 자신의 귀를 파고 들어오는 소리에 영한은 미칠 지경이었다.

분명히 소리는 들린다.

그리고 공격이 날아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공격이 거의 닿기 전까지 와서야 느낄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각성자가 된 이후로 영한의 기감이 이렇게까지 힘을 발휘하지 못한 적은 처음이었다.

세은의 경우, 아예 힘으로 눌렀지, 이렇게 은밀하게 공격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은은 집어 던지면서 다른 일행을 지켰다.

방향을 파악하는 미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피할 수가 없는 수준의 공격이었다.

영한이 처음으로 전투에서 죽음의 공포를 마주하고 있을 때.

세은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뒷목을 붙잡아 던지고 받는 걸로 확실하게 방향을 파악하긴 어려웠다.

샥스도 제자리에서 공격을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탁!

세은은 슬쩍 발로 영한의 등을 밀어내었다.

“그냥 가는 건 싫다며? 한 번 실전이라고 생각하고 막아봐.”

세은은 반쯤 농담이 섞인 말을 하며 영한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크윽!”

영한은 자신의 뒷목을 잡고 집어 던지던 세은과 거리가 떨어지자,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팍―!

일행과 홀로 떨어진 영한에게 샥스의 공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영한은 애검을 꺼내어 공격을 막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텅!

“흐합!”

세은의 손에 이끌려 공격의 타이밍을 익힌 덕분에 첫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훨씬 강하게 느껴지던 반탄력에 자세가 무너졌다.

캉!

그런 영한을 향해 샥스의 공격이 다시 박혀들기 직전, 세은이 영한에게로 날아든 공격을 대신 막아내었다.

그러고는 확실히 포착한 샥스의 위치를 향해 바로 몸을 날렸다.

쾅!

분명히 허공을 향해 빛의 검을 휘둘렀는데, 강렬한 폭발음이 숲을 가득 채웠다.

쾅― 쾅― 콰앙―!

이어서 연속으로 세 번의 폭발음이 울렸다.

그러나 계속된 폭발음에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일행의 눈에 의구심이 깃들 때였다.

“젠장!”

마치 가래라도 낀 듯이 쉰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들려왔다.

연속된 세은의 공격 앞에 샥스의 장막이 허무하게 깨져 버린 것이다.

세은이 별 생각 없이 괘씸해서 영한을 선택한 것 같았지만, 실상은 지극히 냉정한 계산 아래에서 이뤄진 행동이었다.

아무리 마왕 중에 무력이 하급에 속한다 하더라도 마왕은 마왕.

경지에 발을 들이지도 못한 채연과 소진은 샥스의 공격을 단 일 합이라도 받아낼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경지를 엿본 영한만이 샥스의 공격을 피할 만한 유일한 전력이었다.

거기에 뒷목을 잡고 아슬아슬 할 때까지 집어 던지며 공격의 타이밍을 익힐 시간까지 주었다.

그사이에 위치를 발견하면 더 좋았겠지만, 공격의 중심에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기감만으로 샥스의 권능을 파훼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결국 영한이 익숙해졌을 무렵, 그를 멀리 던져놓고 외곽에서 샥스의 위치를 탐색한 것이다.

“시렌! 이 개놈! 이 곳까지 따라와서 나를 방해할 생각이냐!”

신성력을 통해 세은의 정체를 파악한 샥스가 표독스럽게 외쳤다.

하얀 비둘기의 몸체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날개를 지닌 샥스는 폭발의 충격으로 부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어디서 개소리야? 따라온 건 너잖아. 인마.”

“이곳이 오피뉴가 아니라는 사실은 대기 중의 마나만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따라왔다니? 뭐라고 짖는 거냐?”

위기에 몰린 샥스가 온 힘을 다해 분노했다.

가뜩이나 예전에 세은에게 아주 호되게 당해 마왕의 위조차 겨우 지켜냈던 샥스였다.

새로운 장소에서 힘을 키워 30개의 군단을 지휘하던 예전의 성세를 회복하려 한 샥스의 계획이 무위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이 새끼들도 아는 게 전혀 없는 거 같아, 진짜.”

휴우.

단탈리안 정도의 예지가 가능한 마왕이 아니면 원하는 대답을 얻기가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마왕들에게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는 상당히 회의적인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차라리 목이 날아가더라도 거짓 정보를 주면 주었지, 세은의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할 마왕은 거의 없었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세은은 머릿속에 떠오르던 몇몇 마왕을 지워냈다.

우선의 눈앞의 샥스를 제일 먼저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샥스는 가장 내뱉는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유명한 마왕 중에 하나였다.

“아는 게 없으면 그냥 다시 꺼져.”

세은은 냉정하게 일갈하고는 신성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에일린. 신의 심판.”

우우우웅―

신성력이 세은의 의지에 따라 발동을 시작하자 태양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와 세은의 손에서 검의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갑자기 열대기후로 변한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주변을 잠식했다.

“크으윽!”

“으앗!”

샥스는 물론, 가장 가까이 있던 영한 역시 훅 끼쳐오는 열기에 몸을 추스르기 바빴다.

“자, 시간 없으니 바로 끝내자. 힘도 다 회복 못한 거 같은데 의미 없는 반항 말고, 인마.”

태양을 닮은 붉은빛으로 이루어진 검이 쥔 세은이 말했다.

검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힘에 샥스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세은은 샥스가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검을 바로 아래로 내리그었다.

“천벌.”

신성력의 검이 아래를 향함과 동시에 청명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치기 시작했다.

쾅, 쾅, 콰앙!

샥스가 숨을 공간을 전혀 주지 않는 광범위하고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크아악! 시렌 이놈! 언젠가 이 치욕을…… 꼭 개처럼 죽여주마!”

“응. 그래.”

계속해서 내려치는 번개에 맞을 때마다 존재의 힘이 깎여 나가던 샥스가 마지막 힘을 다해 저주의 말을 뱉었다.

그러나 이미 수도 없이 그런 말을 들었던 세은은 태연하게 샥스를 약 올렸다.

치이익―

이윽고, 샥스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자 세은이 천벌을 멈췄다.

번개로 인해 달아오른 땅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샥스가 있던 장소의 반경 10미터는 완전히 초토화된 상태.

“좋아. 끝났네.”

마지막으로 샥스가 완전히 소멸한 것을 확인한 세은이 말했다.

“몬스터들을 따로 잡을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야. 약한 애들이 숫자가 많으면 더 귀찮다니까.”

“…….”

세은의 말에도 일행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채연은 이미 몇 번이고 봤지만 역시나 익숙해질 수 없는 세은의 능력이었다.

그러나 일행 중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영한이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세은의 전력을 마주한 영한은 떡 벌어진 입을 도저히 다물 줄 몰랐다.

세은은 그런 일행들에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돌아가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