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합구필분(1)
* 지난 화에 착오가 있어서, 체첸 칸 부얀을 랑단 칸으로 잘못 썼습니다. 그 부분을 제외하면 바뀌는 것은 없으니 그대로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몽골의 칸이 여긴 어쩐 일로 왔지?”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누르하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게는 볼 일이 없다, 종놈의 자식아.”
“뭐야?”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너희 일족은 아버님 밑에 있다가 이씨 일족에게 굽실거렸지. 그리고 이제는 다른 주인을 찾은 모양이더군.”
그래도 칸을 참칭할 정도면 역시 개팔자가 상팔자가 아닌가. 상대가 마지막까지 비아냥을 덧붙이자, 끝내 누르하치가 칼을 빼들었다.
“아우는 잠시 기다리게.”
“형님!”
“걱정 말게.”
나는 여진의 칸을 안심시킨 뒤, 불청객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로 온 것인가? 모욕하러 온 것이라면 차라리 전쟁을 하고, 그게 아니라면 용건이나 말하고 가라.”
“역시 요동의 주인은 너인 모양이군. 저 치도 꼼짝 못하는 걸 보면,”
“고작 그런 말이나 하러 온 거라면, 손님도 아니겠군.”
손님을 해하는 것은 일본이든 초원이든 어디나 금기시될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막말을 퍼붓는 자를 대접해 줄 이유는 없었다.
마지못해 부얀을 안내해 온 조선의 관료들도 고운 눈으로 보지 않고 있었고, 누르하치도 칼끝을 살짝 올려든 상태였다.
“나는 격에 맞는 사람만을 상대하지. 그리고 여기선 오직 고니시 공, 그대만이 나와 격이 맞을 뿐이다. 쭉정이들은 버리고 나와 손을 잡자.”
“쭉정이?”
“그래. 누르하치나 보바이를 장기말로 쓴 것은 칭찬해 줄 만하지만, 초원의 지배자는 나다.”
부얀 옆에 있는 보바이를 보니, 긴장과 두려움을 억지로 감춘 기색이 역력했다.
닌자들은 그가 부얀에게 의탁했다고 전했지만, 아무래도 그 이후에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모양새였다.
“보바이와 누르하치, 이 두 녀석에게 갔던 물자를 내가 받았다면, 지금쯤 북경을 불태웠을 거다. 하지만 아직도 늦진 않았지.”
“허세가 심하군.”
아마 내가 이쪽의 사정에 어두웠다면 망설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르하치는 아우지만, 보바이는 정말 장기말처럼 쓴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부얀의 호언장담은 개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위대하신 초원의 지배자가 여태껏 뭘했지? 네 녀석이 말한 두 사람이 내가 부리는 개라면, 너는 뭔가? 명나라의 개?”
“말이 심하군.”
“너는 길이나 빌려줬을 뿐이지, 전쟁 중에도 계속 명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나?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나는 상대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먼저 기세를 몰았다.
“지금 명나라는 아예 국경을 닫아걸고 일체의 교류를 끊었지. 안타깝게도, 양다리를 걸치던 누군가도 같은 취급을 당했고.”
“그, 그걸 어떻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중요한 건, 너와 네 부족이 아사 직전이라는 게 아닐까?”
초원에서 살아남으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체급을 줄이고 멀리 도망가서 상대적인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가라후토, 그러니까 사할린과 맞닿은 지역에 정착한 자들이나, 그보다 더 북방으로 올라간 소수 민족이 그런 경우다.
그리고 나머지 방법은 정주민에게 식량을 얻어내는 것이다. 강압을 하거나 혹은 고개를 숙이거나.
그리고 아직은 명나라가 강대한 시절이었기에, 부얀은 후자 중에서도 후자에 속한 경우였다.
초원에서는 가장 강대한 세력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명나라에 식량을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거다.
지금은 그조차도 끊겨 버렸고 말이다.
“대, 대체…….”
내가 저쪽의 상태를 정확하게 짚어내자, 부얀 칸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물자가 필요하면 얌전히 교역을 하거나 고개를 숙이고 구걸할 일이지, 감히 모욕을 가하고 협잡질을 해?”
“자, 잠깐…….”
“여기 누르하치가 칸을 참칭했다고 했나? 너는 무슨 자격으로 칸을 자처하지? 고작해야 뼈다귀가 하얗다는 것 정도가 전부 아닌가.”
근데 그거 알고 있나? 흰 뼈도 태우기에 따라서는 까맣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마지막 부분을 나지막하게 말하자, 부얀의 기세는 완전히 꺾여 버렸다.
“미, 미안하게 되었소. 부디…….”
“이제 좀 옳은 말을 하는군. 근데 사과를 할 대상이 나밖에 없나?”
“이보게, 누르하치. 내가 실언을 했네.”
“그는 내 아우고 나와 동격이다.”
내가 위치를 바로잡자, 부얀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저래서 하얀 뼈라는 건가?
원래 아랫사람으로 부리던 자가 동등 이상으로 올라서면 아니꼬운 게 인지상정이긴 했다.
누르하치의 조부인 기오창가가 선대 몽골의 칸인 자사크투를 섬겼으니, 부얀이 저런 반응이었던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원래 유목민이 정주민보다도 출신을 더 따지는 편이니까.
그러나 발도 누울 자리를 보고 뻗어야 하는 법이 아니던가. 꼴에 한껏 오만한 태도로 찾아오면 누가 반긴다고.
부얀이 자신의 오판을 바로잡으려면, 제법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터였다.
“너는 나만 모욕한 게 아니지. 내 선조들까지 싸잡아서 까내린 걸, 고작 말 몇 마디로 넘어가겠다는 거냐?”
누르하치는 사납게 웃고 있었다.
내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굴지만, 역시 그도 일국의 주인다운 풍모를 갖춘 자였다.
“너희는 모욕을 당하면 수레바퀴를 돌리지. 나라고 못할 것 같으냐?”
“비천한 양치기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그럼 죽어야지.”
“살려 주십시오!”
곧바로 이마를 땅에 박는 걸 보면, 몽골의 상황이 어지간히도 나쁜 모양이었다.
“처분은 아우가 알아서 하시게.”
“감사합니다, 형님.”
뒷일은 누르하치에게 넘기고, 나는 다시 요동에서의 일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조선에서 요동도 관찰사로 승차시킨 권율이 따라붙으며, 질문을 해 왔다.
“그래도 몽골의 칸인데, 저렇게 해도 괜찮은 겁니까?”
“몽골의 칸은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던가?”
“대체 어느 정도기에…….”
“그냥 명이 쇄국에 들어갔을 뿐이네.”
“아.”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요동도 관찰사는 그 의미를 곧바로 이해했다.
“명나라의 정책은 옥석을 가리진 않더군. 덕분에 이런 일도 생겼지만 말일세.”
“유목민들에게는 힘든 나날이겠군요.”
“그러니 자네의 역할도 막중하네. 명나라는 두렵지만 이쪽은 아직 만만할 테니까.”
내 말을 들은 권율은 새삼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너무 힘주고 있진 말게. 여길 지키는 건 조선만의 역할은 아니니까. 아니 그러한가, 미츠나리?”
“예? 아, 예, 쿠보.”
안에서는 미츠나리가 업무를 보고 있었다. 요동도 관찰사는 조선의 관료인 권율이지만, 좌우도사는 각각 나와 누르하치가 파견한 인사가 맡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좌도사로 정한 사람은 이시다 미츠나리였다.
“일은 좀 어떠한가?”
“많이 배우는 중입니다. 이 공께도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만 듭니다.”
원래도 문치파였던 그는 조선 측 사람들과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게다가 내가 일전에 야만을 끝내겠다고 선언한 게 마음에 들었는지, 그도 좀 더 태도가 전향적으로 바뀐 상태였다.
“물론 스모토와 비하면 일장일단이야 있겠네만, 조선에서도 배울 것이 많을 것이니 힘쓰도록 하게.”
“예, 쿠보.”
그렇게 미츠나리를 독려하는 동안, 누르하치가 용건을 끝낸 모양이었다. 그는 불청객을 잡아끌고 들어왔다.
올 때까지만 해도 당당했던 몽골 칸의 몰골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대충 이야긴 끝났습니다, 형님.”
“어떻게 하기로 했나?”
“저와 형제의 의를 맺기로 했습니다.”
“나도 그래야 하나?”
“이런 떨거지를 굳이 형님께서 상대하셔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이 형제지, 사실상 부하로 부리겠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뭐, 먼 길 왔으니, 일단 밥이라도 먹여서 보내지.”
마침 점심을 먹을 때였다. 나는 권율에게 요청하여, 특별한 찬 하나를 준비하게 했다.
“정말 그렇단 말입니까?”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네.”
“아주 재밌는 일이 벌어지겠군요.”
잠시 후, 조촐하게 차려진 상이 올라왔다. 물론 양적으로만 그러했지, 나름 신경을 쓴 차림이었다. 나와 권율, 그리고 누르하치, 거기에 나름 손님대접을 받게 된 부얀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각자의 앞에는 튀김을 얹은 흰쌀밥이 올라와 있었다.
“어서 먹지.”
“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부얀은 기가 꺾인 얼굴로 조금씩 찬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질문을 던졌다.
“어찌하여 본요리는 집지도 않고, 하찮은 것들만 먹는 건가?”
“보, 본요리라 하시면……?”
“새우 말일세.”
내가 그의 앞에 놓인 그릇을 가리키자, 다시 부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역시 하얀 뼈인 이유가 있었군.
“저, 저는 감히 먹지 못하는 겁니다.”
“어째서지?”
“그, 그게…….”
“솔직하게 말해도 좋네.”
내가 친절하게 대답을 요구하자, 상대는 눈을 딱 감고 예상했던 답을 내놓았다.
“어, 어떻게 사람이 벌레를 먹는단 말입니까?”
“그럼 우린 사람도 아닌가?”
“그, 그게 아니오라…….”
내가 그렇게 질문을 던지자, 권율은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누르하치도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고, 오직 부얀만이 쩔쩔매고 있었다.
나는 새우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흔히 먹는 식재료 중 하나였다. 조선도 마찬가지. 권율도 딱히 식성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다.
누르하치 역시도 사정은 비슷했다. 유목민은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는다지만, 주션은 반농반목에 어로까지 하는 민족이었으니까.
그러나 내륙에서만 지냈던 몽골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자네가 이걸 먹어야만, 우리와 같은 길을 갈 수 있겠지. 그래도 먹지 못하겠나?”
“혀, 형님, 제발…….”
부얀은 이제 형님으로 모시는 누르하치에게 애걸했지만, 그게 통할 리 없었다.
“먹게. 안이 아주 뜨거우니 조심하고.”
강권을 이기지 못한 몽골인은 마지못해 새우튀김을 집었다. 칸쯤 되고 보면 결혼도 했을 텐데, 왜 그걸 못 먹고 있는지.
그렇게 몽골의 칸은 통과의례 아닌 통과의례를 치르고 돌아갔다.
“근데 정말 이렇게만 해도 되는 겁니까?”
“먹을 거야말로 사람을 꺾는 좋은 수단이지. 아직은 질색하겠지만, 그 맛있는 새우를 튀기기까지 한 게 아닌가. 결코 잊지 못할 걸세.”
“그건 그렇지요.”
그리고 나도 권율과 누르하치의 배웅을 받으며 배에 올랐다.
선실로 들어가니, 안에서는 내가 명나라에 파견했던 닌자가 부복하고 있었다.
“다섯 번째 단조가 주인님께 인사올립니다.”
“다섯 번째? 바뀐 모양이군.”
“예, 전임자가 은퇴를 했기에.”
“그럼 자네 대신 다른 닌자를 파견해야 하나?”
“원래는 그렇습니다만, 지금 몸을 빼낼 수는 없기에 미루었습니다.”
나는 닌자의 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잠입해서 인적 수단을 마련해야 하는 임무였던 만큼, 중간에 인원을 교체하기는 어려웠다.
“알겠네. 그럼 보고하도록.”
“예.”
그는 위충현의 동향사람을 가장해서 접근하고 있다고 했다. 원본이 되는 사람은 지금쯤 일본에서 포로로 머무르고 있을 터였고, 그 자리를 대신해서 들어간 것이다.
물론 고향을 떠난 지 오래인 위충현이 그런 세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명하신대로 위충현을 충동질해 두었습니다.”
“상당한 신임을 얻은 모양이군.”
“아직까지는 그렇다고 판단됩니다.”
“좋아.”
나는 선실 한쪽에 놓인 서랍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이걸 먹이도록 해라. 명나라의 고위인사들조차 없어서 못 구하는 물건이니, 좋아서 받아먹을 것이다.”
“무엇입니까?”
“원래는 오향(烏香)이라고 하지만, 나는 다르게 부르고 싶더군. 참독이라고 말이야.”
“차, 참독……!”
닌자는 상자를 흘끗 보았다.
“저 역시 오향에 관해서는 들은 게 있습니다만, 명약이 아니었습니까? 그냥 독도 아니고 참독이라니…….”
특별히 표본이 될 만한 것들에 붙는 접두사가 바로 ‘참’이다. 새 중에 범속한 녀석은 참새라 부르고, 다랑어 중의 으뜸은 참다랑어가 아니던가.
그러니 세상에 퍼진 만 가지 독 중에서 가장 흉악한 녀석은 참독이라고 불러야 맞을 터였다. 아편 정도면 그래도 될 녀석이지.
“처음에는 기분을 좋게 해 주지만, 차차 정신을 좀먹으며 끝내는 사람을 망가뜨리니 참독이 아니고 뭘까.”
“그, 그렇습니까?”
“먹여 보고 나서 추이를 보면 알 것이다. 처음에는 위충현에게만 주되, 황제에게도 전달하게끔 꼬드기도록.”
“예, 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