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전후처리(2)
이원익이 한양으로 장계를 보내는 동안, 누르하치는 무순(撫順, 푸순)에 입성했다.
그곳에 있는 선조들의 무덤에 고유하고, 즉위식을 치러 여진의 한(汗)이 되었음을 선언하기 위함이었다.
무순이 노천탄광으로 유명하기는 한데……. 뭐, 이런 걸로 나중에 시비가 걸리진 않겠지. 조선과 여진의 균형도 좀 맞춰 놔야겠고.
아직 특구에 관한 것은 불투명한 상황이지만, 조선으로서도 특별히 막지는 않았다.
무순은 누르하치의 옛 터전이기도 했고, 조상들의 능묘에 참배한다는 명분은 충분히 강력했다.
오히려 지금은 삼국의 결속을 다져야 할 때라고 생각했는지,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 주었다.
조선의 정승이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리인 자격으로 비변사 부제조 곽재우가 참석한 것이다.
때는 계사년에서 갑오년으로 넘어가는 정초, 누르하치의 즉위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아이신교로 누르하치는 열성조께 아룁니다. 우리 족속을 핍박했던 명을 몰아내고, 주션의 나라를 다시 세우려 하나이다.”
나는 누르하치의 고유를 들으며, 중간 과정을 회상했다.
처음에 누르하치는 여진이라는 이름이 흉하다며, 국호와 민족명을 ‘만주’로 고치려고 들었다.
- 어떻습니까, 형님?
- 음, 확실히 여진(女眞)의 한자는 여러모로 낮잡아 보는 느낌이 강하지. 그렇지만 만주도 조금 그래.
나는 만주국이 떠올랐다. 하필 지금의 일본 사람인 내가 후원해서 일어선 거나 마찬가지라 더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조선으로서도 그 건주위의 이만주를 연상하는 이름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터였다.
- 옛 금나라는 스스로를 주션이라 했고, 몽골은 자기네 식대로 발음해서 주르첸이라고 불렀다지. 그대로 가는 게 낫지 않겠나? 음차할 글자는 따로 정하고 말일세.
- 과연, 형님이십니다!
몽골이 천하를 움켜쥐었던 시절, 여진, 그러니까 주션은 완전히 아포칼립스 그 자체를 맞이했다. 변변한 기록 하나 남기지 못하고, 원조 때 쓰인 금사 정도고 그들의 역사였다.
아예 정체성 자체를 말살당하다시피 한 그들은 역사와 전통에 꽤 목말라 있었다. 누르하치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렇게 여진족은 이제 만주족이라는 이름 대신, 스스로를 주션으로 자처했고, 음차는 숙신(肅愼)으로 정했다.
“이제 주션과 일본, 조선은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고자 하오니, 열성조께서는 이 의리가 깨지지 않게 도우소서.”
역시 체급 때문에 불안한 것일까. 중간에 내 이름도 거론되었고, 끝은 아예 삼국의 의리를 운운하며 마무리되었다.
의례가 남은 게 별로 없어서인지, 의복을 제외하면 여러모로 조선의 방식이 많이 엿보였다.
즉위식이 끝난 뒤에는 곧바로 연회가 열렸고, 나와 곽재우는 누르하치의 바로 옆자리로 안내받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축하를 담은 농담을 건넸다.
“이제는 자네도 전하(殿下)라고 불러야겠군?”
“제가 어찌 감히 형님께 존칭을 받겠습니까. 게다가 형님께서도 일본에서는 도노(殿) 소리를 들을 분이 아니십니까.”
“그도 그렇구만, 하하하.”
물론 전하와 도노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이런 자리에서 굳이 그걸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 숙신의 장수와 부족장들이 자신의 서열에 맞춰서 누르하치의 앞으로 나왔다.
“칸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명을 몰아냈다는 것은 주션에게 다시없을 위업이다.
더구나 내가 보내는 물자를 누르하치가 움켜쥐고 있는 이상, 저들은 철저히 복종해야만 했다.
그렇게 누르하치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며, 숙신의 건국시조가 되었다.
* * *
누르하치의 즉위식으로부터 보름이 지난 뒤, 조선의 국왕은 직접 안동(安東, 원래의 단둥)으로 나왔다.
나는 이미 동격으로 예우 받고 있었고, 누르하치도 정식으로 숙신의 한, 그러니까 왕으로 올라선 만큼,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전하.”
“그렇구려, 공방.”
세자는 한양에 남았다고 했다. 아직 나이는 꽤 어릴 터인데, 지금의 국왕은 꽤 늙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허리는 꼿꼿했고, 눈에도 총기가 엿보였다.
나와 인사를 나눈 그는 누르하치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나 역시 한의 즉위를 축하하오.”
“숙신은 삼국의 우의를 잊지 않을 겁니다.”
주션의 칸은 조선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 나까지 끼워서 삼국이라 에둘려 표현했다.
역시 아직은 조선을 두고 아주 안심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어쨌거나 그렇게 서로 예를 차리고 난 뒤, 삼국의 수뇌부는 본격적인 논의로 들어갔다.
“요동을 조선의 영토로 넘겨준다는 것은 아주 반가운 이야기일세. 하지만 특구는 대체 무엇인가?”
“이번 전쟁은 조선만의 것은 아니었지요. 게다가 저나 숙신도 기여한 바가 적진 않습니다.”
내가 그렇게 운을 떼자, 조선의 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네. 공방은 많은 물자를 댔을 뿐만 아니라, 명국의 강남을 교란하여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지. 그리고 숙신 한도 북경까지 들어갔다고 하니, 그 공을 외면할 수는 없지.”
“그러나 현실적으로 요동을 삼국이 공에 따라 나누긴 어렵습니다. 그런 이유로 영유권은 조선에 맡기되,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나누고 싶다는 이야기지요.”
“흠, 일리가 있군. 큰 틀에서는 나도 공방의 뜻에 동의하는 바일세.”
그렇게 큰 그림이 나왔고, 이제는 구체적인 내용을 이야기할 때였다.
“명국은 장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지?”
“그렇습니다, 전하. 하지만 현실적으로 장성 밖의 모든 땅을 빼앗아올 수는 없지요. 적당히 지키기 좋은 자리에서 멈춰야 할 겁니다.”
요하를 경계로 잡자. 내가 그렇게 제안하자 나머지 두 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하, 요하라…….”
요즘에는 조선에서도 태조와 정도전의 행적이 많이 부각되고 있다고 했다.
아직 고려이던 시절에 동북면 원수 이성계가 요동성까지 들어간 적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재상으로서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추진했다는 것에 주목한 모양새였다.
조선의 국왕 역시 마찬가지인지, 그의 눈에서는 기이한 열기마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과욕불급이라 했으니, 그만하면 충분하다. 더 나가봐야 지키기만 어려울 뿐이지. 숙신의 한은 어찌 생각하는가?”
“명나라와의 경계는 아국이 신경 쓸 바는 아닌 듯합니다.”
“그도 그렇군.”
이 자리는 결국 조선과 숙신의 영토를 확정짓기 위한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최대한 많은 땅을 가져갈 수 있을까.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것이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그래, 공방이 특구에 관한 건을 이야기했으니, 아국과 숙신의 경계도 생각했을 듯한데…….”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다시 공은 내 쪽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역시 눈치를 보거나 긴장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 여진은 송화강 유역으로 옮겨간 데다 솔빈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니, 백두산을 기점으로 삼는 게 어떨까 싶었습니다만…….”
거기까지 들은 양측의 반응은 엇갈렸다. 조선의 국왕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누르하치는 얼굴에 ‘불-편’ 두 글자를 띄우고 있었다.
그러나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 한의 즉위식을 보니, 선조들의 능묘가 무순에 있었더군요. 그걸 참작할 필요는 있겠습니다.”
“흠, 능묘는 중요하지.”
요하 이동(以東)을 통째로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조선 국왕의 반응이 살짝 식은 듯했다. 반면, 누르하치의 얼굴에서는 이제 아까의 두 글자가 사라진 상태였다.
나는 벽에 걸려 있는 지도에 철령과 무순에 동그라미를 친 뒤, 다시 무순에서 중강진까지 직선을 그었다.
“그러니 철령까지는 조선의 땅으로 두되, 무순으로부터 강계의 중강진을 잇는 선을 경계로 삼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순에서 중강진까지라…….”
“그 위로는 기후가 따뜻하지 않으니, 어차피 농사도 잘 되지 않을 겁니다.”
이제 조선도 상업을 중시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줄곧 유지해 온 전통이 어디 갈까. 내가 날씨까지 거론하자, 조선의 국왕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영유권은 그렇게 하는 대신에, 특구 자체는 제가 생각한 원안대로 했으면 하네.”
이번에는 누르하치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잠겼다.
특구에는 삼국이 통용할 만한 법을 세우기로 했으니, 사실 어느 한 나라의 온전한 영토라고 하기는 어려운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쁘지 않습니다. 조선이 형님의 제안에 동의한다면, 저 역시 그에 해당하는 영토를 특구로 내놓도록 하지요.”
그렇게 요동 특구의 범위가 정해졌다. 요하와 송화강을 경계로 삼고, 그 안에서 다시 내가 제안한 대로 조선과 숙신의 국경을 그었다.
특구에서 통용할 법령에 관한 것은 이제 실무진의 몫으로 넘어갔다.
나는 동양 무역회사에 속한 상인들과 옛 에고슈의 거상, 그리고 혼다 마사노부를 불러왔고, 거기에 이시다 미츠나리까지 붙였다.
조선에서는 국왕을 따라온 호조의 관료들이 나왔다. 그리고 숙신은 몇몇 부족장들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누르하치가 나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생이 많겠구만.”
“형님께서 직접 나서진 않으시는 겁니까?”
“실무진이 튼실한데 굳이 내가 조율할 필요가 있겠나.”
“그건 좀 부럽군요.”
이제 기틀을 다져야 할 나라의 비애일까. 그렇다고는 해도 오히려 누르하치 본인이 직접 진두지휘하는 만큼, 만만히 볼 일은 아닐 터였다.
그리고 내가 실무진에게 조율을 넘겼다고 해서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혹시 특구에 남을 사람이 있는가?”
조만간 여기에도 상인들이 공장을 올릴 터였다. 노동력이야 현지에서 어떻게든 때우면 된다고 쳐도, 그걸 지키고 이쪽의 이익을 옹호할 만한 수준의 치안 병력 정도는 남길 필요가 있었다.
“물론 토지를 봉록으로 줄 수는 없지만, 내가 직접 고용하는 조건이 될 걸세. 어떤가?”
몇몇이 손을 들었다. 사람은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원한다고 했던가.
고니시군에서는 자신의 영지를 지닌 무사를 부러워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그 반대 경우도 없지는 않다고 했다. 예전의 마츠나가 히사히데도 영지 경영은 귀찮다고 말한 적도 있었고.
이대로 돌아간다 해도 일본에서는 이제 무사의 지위가 끌어내려지고 있는 판이다. 그러니 새로운 터전에서 그럴듯한 직함이라도 받고 싶다는 태도였다.
이제 남은 근심거리라고 해 봐야 명나라가 다시 요동을 회복하겠다고 나오는 것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건 이미 예고된 위험이었고, 대책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무리를 짓고 스모토로 돌아가려는데, 초원에서 온 손님들이 있었다.
“귀공이 고니시 유키나가라는 일본의 집정이오?”
링단 칸, 북원의 후예로 얼마 전에 조부에게 몽골 카간의 자리를 이어받은 자였다. 그가 보바이를 대동하고 나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