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야인의 땅(4)
날이 밝자, 북병사 이일은 휘하 군관들을 불러다가 내 앞에 세웠다.
이 중에서 고르라는 이야기였다. 만약 뒷수작을 부리려고 한다면, 이들을 통해서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 공방을 도와드릴 수 있는 장수들이지요. 모두 기마에 능하여, 공방의 조총대를 지원하기에는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북병사는 그렇게 말하며, 여기 있는 장수 하나가 기병을 이백 정도씩 거느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몇이나 데려갈 수 있겠소이까?”
“송구스럽지만, 넷 이상은 어렵습니다.”
숫자를 정리해 보자면, 대강 팔백 가량을 빌려주겠다는 뜻이었다.
조금 적지 않은가 하는 눈으로 상대를 돌아보니, 이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몇 마디를 더했다.
이일은 지도상으로 조선의 국경 중 가장 북쪽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여기, 온성에 도착하시면, 온성부사가 길안내를 겸하여 합류하도록 지시해두었습니다. 그 휘하에 또 기병이 이백이 있으니, 합치면 능히 일천을 이룰 것입니다.”
온성이라면 최북단이었던가.
백과사전에서 그렇게 써 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어느 샌가 함경북도 온성 대신 강원도 고성으로 변해 있던 기억이 났다.
최서단도 그랬지. 평안북도에 위치한 압록강 하구의 섬이었지만, 역시 나중에는 주로 백령도가 거론되곤 했던 것 같았다.
“저, 공방.”
잠깐 잡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일이 내 눈치를 살폈다. 잠시 한 눈을 팔았던 것을, 상대는 심기불편으로 본 듯했다.
“말씀하시오.”
“물론 울라부까지 직선으로 가려면, 회령을 거치는 게 나을 겁니다. 허나 그쪽은 산세가 험하여 군사를 움직이기엔 좋지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 눈은 여전히 지도를 향해 있었다.
아무래도 지도상으로는 약간 돌아가는 모양새였기에, 내가 그 부분에 의문을 품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 그런 게 아니었소이다. 물론 기병의 보조도 좋지만, 혹시 보병 전력을 좀 빼줄 수 있겠소?”
내 요청을 들은 이일의 눈은 의아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전날 북병사도 보았겠지만, 모두가 조총을 들고 있지 않소이까. 하여 앞을 가려 줄 살수가 필요할 듯하외다.”
“살수라면……?”
나는 삼수병 체제를 떠올리며 최대한 그쪽의 용어에 맞췄는데, 오히려 이일이 못 알아듣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삼수병 체제가 임진왜란 이후에 생겨났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이런, 아국의 용어를 사용했구려. 긴 창과 칼을 들고, 접근을 차단하는 병력을 이야기하는 것이오.”
“그렇군요. 공방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기병은 여차하면 얼마든지 몸을 빼낼 수 있지만, 보병은 내 부대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어려운 부탁이기는 했다.
이일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지도의 한 구석을 짚었다.
“그러시다면, 경흥부에 파발을 띄우도록 하지요.”
“경흥부?”
“그렇습니다. 상대적으로 후방에 위치한 까닭에, 경흥부 휘하의 병력은 대체로 보병 위주로 구성되어 있지요.”
그곳의 성이 높고 방비가 든든하니, 이백 정도 빼내도 지장은 없을 것이다. 이일의 설명은 그러했다.
어쨌거나 철포수가 재정전할 시간만 끌어주면 그만이니, 이백 정도면 충분한 숫자였다.
게다가 그 경흥부라는 게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어제 이순신도 경흥부사 이경록을 추천하지 않았던가.
이일 본인은 눈엣가시를 치우겠다는 속셈인 듯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눈앞의 조선 군관 아홉 명, 이중에서 넷을 골라야 했다. 누구를 데려가도 마찬가지일 거라면, 이왕 이일에게 가벼운 부담 하나쯤은 더 안겨줘도 좋을 것 같았다.
“여기 있는 장수들 모두가 호걸이며 영웅으로 보이니, 누굴 데려가겠다고 하기가 어렵구려.”
“그리 보이실 수도 있겠습니다. 전부 제가 신임하는 군관들이니 말입니다.”
“난형난제라 해도 미세하나마 차이는 있을 터, 내가 고르기보다는 북병사의 안목을 믿는 게 좋을 듯하오.”
그렇게 팔밀이를 하자, 북병사는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금세 넷을 뽑고, 그중에 하나를 한 발짝 더 앞으로 세웠다.
“경원부사 한극함이라는 장수입니다. 공방께 붙여드릴 장수들 중에서 가장 배분이 높으니, 이 장수에게 맡기시면 될 겁니다.”
“참으로 듬직한 장수구려. 능히 등을 믿고 맡길 수 있겠소이다.”
* * *
“병사 영감.”
“무슨 일인가?”
아직 북병영을 떠나기 전, 경원부사 한극함은 자신의 상관을 찾았다. 전날 받았던 지시와 약간의 차이가 있었기에, 그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공방의 부대에 경흥부의 군사들이 포함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들 역시 아군인데…….”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어조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거기에 답을 해야 할 이일은 빙긋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전장에 나간 장병 모두가 성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는 없는 법이 아닌가.”
상관의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그 말에는 온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재차 질문하려던 한극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경흥부사 이경록 역시 북병사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마침 같이 찍혔던 이순신도 공방의 부대에 참관으로 종군 중이기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군관은 도로 입을 닫았다.
“역시 자네는 내가 믿고 맡길 만한 장수일세.”
“병사 영감의 뜻은 온성 부사에게도 전하면 되겠습니까?”
경흥부의 병력과는 달리, 온성 부사는 기병을 이끌고 합류할 예정이었다.
도적질도 손발이 맞아야 하는 법. 그리고 아직 그는 북병사와 척을 지지는 않은 상태였다.
“음……. 그러고 보니 온성부에 말을 하지 못했군.”
한 패로 끌어들일 것인가, 아니면 희생양으로 삼을 것인가. 어쨌든 온성부의 지휘관 역시 건원릉의 후예로, 나름대로 전하의 신임을 받는 자였다.
잠시 고민하던 이일은 무릎을 치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되겠군. 미리 말해 둘 건 없네. 하지만 온성부의 병력이 공방의 부대와 같이 위험에 빠지면, 그쪽을 먼저 구하도록 하게.”
어쨌거나 그쪽도 기병이니, 곤경에서 몸을 빼기는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적당히 은혜를 입혀 두면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일의 구상은 그러했다. 그리고 이제는 한 패거리가 된 한극함의 눈에도 그럴싸한 계책이었다.
“알겠습니다, 병사 영감.”
* * *
“하오면, 저희는 먼저 온성으로 가 있겠습니다.”
북병영이 위치한 경성에서 온성까지는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그리고 내가 이끄는 병력은 도보로 움직이는 만큼, 느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덕원에서 경성까지 배를 타고 왔으니, 다시 녹둔도로 해로를 이용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조선 측 역시 빠른 배치가 나쁠 게 없었기에, 내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배에 말까지 태우고 움직이기는 쉽지 않았기에, 북병영에서 지원해준 병력은 모두 육로로 움직일 예정이었다.
녹둔도에서 다시 작은 배로 갈아타고,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일의 수상한 꿍꿍이와는 별개로, 나는 조선군의 지원을 거의 원하는 대로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중간에 약속된 병력과 합류했다.
“경흥부사 이경록이라 합니다. 북병사의 명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갑군. 자네 이야기는 여기 이 공에게 자주 들었네.”
갈 길이 바빴기에, 회포는 배 위에서 풀도록 했다. 역시 그 둘은 뜻이 통하는 편이었는지, 온성에 닿도록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온성 부사는 어떠한 사람인가?”
지금 기대를 걸어 볼 만한 조선 측 장수는 여기 두 사람에, 온성 부사 정도였다. 그러나 역시 이일 휘하의 부대가 먼저 도착할 것을 생각하면, 그 됨됨이는 미리 알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들을 휘어잡을 자신은 있었지만, 손에 쥔 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 아니던가.
내 질문을 받은 이순신과 이경록은 금방 답을 내놓았다.
“아직 바뀌지 않았다면, 이억기라는 장수일 겁니다.”
“네, 그 사람이 맞습니다. 왕실의 선파 되는 사람인데, 장재도 상당하고 사람됨도 올곧은 편입니다.”
“이억기라……. 도착하기 전에 어떠한지 설명을 좀 해 주게.”
물론 유명함으로 친다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측 장군들 중에서 1.5티어쯤은 될 터였다.
그러나 타국의 고위 인사가 반대편 국경의 장수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알 만한 이야기를 눈앞의 두 사람에게 들어야 했다.
“공방의 기대에 어긋날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북병사의 밀명을 받아도?”
내 질문에, 이순신과 이경록의 반응이 엇갈렸다.
경흥부사는 이해하지 못한 기색이 역력했고, 대강의 사정을 알고 있는 이순신은 난색을 표했다.
“공방…….”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다가 이순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공방, 잠시 설명할 말미를 주셨으면 합니다.”
“좋네. 편한 대로 하시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순신은 자신의 전우를 이끌고 나룻배의 한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도 주변에 듣는 귀가 많아, 귓속말로 대화하는 모양새였다.
설명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온 두 사람은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송구스럽습니다, 공방.”
“나는 괜찮네. 타국의 군대와 손발을 맞추자면 온갖 일이 벌어지는 법이니, 고작 이만한 일에 마음을 두겠나.”
어쨌든 이경록도 전말을 파악하면서, 대화할 거리는 상당히 늘어나게 되었다.
주로 누가 왔으며, 누굴 믿을 만하고, 누굴 회유할 만한가. 이런 주제가 대부분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자국의 추태를 드러낸 형국이라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여러 목숨이 달린 일이라 나름대로 적극적인 의논이 될 수 있었다.
“경원부사 한극함은 북병사가 신뢰하는 장수이니, 쉽지는 않을 겁니다.”
“온성 부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장수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빼려 할 듯합니다.”
그들의 평가는 그러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자네들의 평가는 그러하네만, 저들에게 북병사보다 더 큰 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면 넘어올 수도 있지 않겠나?”
이순신은 이제 익숙해졌는지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매우 불편한 눈치였다.
“공방.”
그리고 이경록은 아예 대놓고 눈을 치켜올리고 있었다.
“매수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닐세. 전장에 나온 장수에게 가장 중요한 보상이 무엇이겠나. 적어도 일본국에서는 전공이었는데 말이야. 조선은 다른가?”
“아국도 마찬가집니다.”
“그 전공을 세우게 해 주겠다는 것일세. 그것도 한 사람도 상하지 않게……는 불가능하지만, 최대한 덜 다치게 하면서 말일세.”
“보통 전공으로는 쉽지 않을 겁니다만…….”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렇겠지. 그런데 말일세. 여기 참군이 있는 걸 보면, 달리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겠나?”
북병사 이일이 고문까지 해 버린 장수가 지금 내 밑에서 참군으로 종군 중이다. 이 사실은 써먹기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었다.
“공방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오나 그 전공은 어떻게 세우게 하실 참이십니까?”
“그 수단이라면 이미 저기 있다네.”
나는 뒤따라오는 나룻배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준비해 온 물자가 담긴 상자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