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야인의 땅(3)
북병사 이일의 대접은 융숭하지도, 박하지도 않았다.
아니, 여기부터는 변방이라는 걸 생각하면, 오히려 신경을 안 썼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하게 보이기도 했다.
“일본국의 역도들이 여진족과 손을 잡았다고는 해도, 여기까지 직접 나오시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결자해지라 하였으니……. 나야말로 조선의 배려에 감사드릴 뿐이오.”
정상적인 국가라면, 외국군이 들어온다는 사실 자체에 반감을 느끼는 게 당연할 터였다.
평생 군문에 몸담은 숙장이라면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중간의 과정이 워낙 복잡하게 꼬여있어서인지, 일천의 철포수도 별 탈 없이 받아들여졌다.
당장 이일부터가 일본인 상인에게 간자 혐의를 씌우려다 실패하지 않았던가.
“그 역도는 어떠한 자입니까?”
“나 역시 노이합적의 말을 토대로 추측할 뿐이오만……. 매우 끈질긴 자일 것이오.”
“확실히 독종일 것 같기는 합니다.”
보통 사람이 바다를 건너서 생소한 족속과 손을 잡지는 않을 터, 이일의 예상은 사실과 상당히 닿아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공방.”
이일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도성에서 노이합적을 만나셨다고 하셨는데…….”
“그렇소.”
“노이합적의 성품은 간교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 조부와 부친을 죽인 명에게 고개를 숙인 자인데, 그 말을 그대로 믿으십니까?”
누르하치가 부간과 이미 손을 잡고, 함정을 팠을 가능성이 있다. 이일은 그런 관측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물론 경계를 하자면, 충분히 그럴싸한 말이긴 했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이 여진과 무슨 관련이 있어서?”
“공방은 아국에 염초와 유황을 공급하시지 않습니까. 멀리 나와서 변이라도 당하시면, 양국의 관계는 금세 파국으로 치닫겠지요.”
이일도 서인으로 분류되는 자였다. 게다가 오랫동안 장수로 봉직했으니, 부산포에서 어떤 물목이 오가는지 정도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병력 일천을 추가로 끌어오지 않았소이까. 게다가 역도들이 여진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기밀로 감춰야 할 터인데, 내게 말해서 저들에게 득 될 게 무엇이겠소?”
“딴은 그렇습니다. 장수된 자로서 사소한 가능성도 놓치지 말아야 하는지라……. 잠시 기우에 빠지고 말았군요.”
사소한 가능성이라……. 이일이 벌인 소행을 생각하면,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아직 조선의 병마절도사였고, 도토야 조세이를 잡으려면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는데, 굳이 핍박해서 원한을 더할 필요는 없겠지. 이미 내가 조선 국왕에게 넘긴 장부에는 그의 이름도 제법 자주 나오는 편이었다.
“그나저나 울라부의 상태는 요즘 어떻소이까?”
“그간 아국의 방침은 압록과 두만이라는 두 큰 강을 경계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허나 군비가 넉넉해지면서, 점차 두만강 너머 야인의 땅을 개척해왔지요.”
여진족 중 상당수를 번호로 편입할 수 있었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간 쌓아올린 성과가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간 셈이라며, 이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영릉(英陵, 세종.)께서 정하셨던 옛 경계는 지킬 수 있었습니다만, 부간의 낌새가 심상치 않습니다.”
“조만간 강을 넘을지도 모른다는 말이구려.”
“바로 보셨습니다.”
부간이라는 이름은 나도 생소했다.
니탕개나 우을기내 같은 경우는 그래도 이순신과 엮여서 좀 낯익은 이름이었다.
거기에 조금 더 파봐야, 누르하치나 그와 다투었던 부잔타이, 거기에 조선 초기의 동명가첩목아니 하는 자들 정도만 떠오를 뿐이었다.
어쨌든 이미 도토야 조세이가 건너간 시점에, 뒤틀릴 대로 뒤틀렸을 터였다. 누르하치가 조선에 번호를 자처하며 찾아오기도 했고.
새삼 아는 이름이 나온다고 해봐야, 별 의미는 없지 싶었다.
“그간 북병사가 여진족을 잘 억눌러왔다고 들었소. 그러니 일본국의 역도 몇이 울라부에 붙었다고 해서, 갑자기 전세가 역전되지는 않았을 듯도 하오만…….”
그렇게 떠보자, 이일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안면 피부 깊은 곳에서는 맥박이 꿈틀거리는 게 보일 지경인데도, 안색은 평온을 가장하는 듯했다.
“그 역도 몇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시잖습니까! 무려 화약을 쥐어줬습니다. 여진족이 화기를 사용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말까지 곱게 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기어이 그는 언성을 약간 높이고야 말았다.
“진정하시오. 이래뵈도 내가 꽤 많은 무기를 고안해냈다고 자부하오만, 신무기의 등장이 완전히 판세를 뒤엎지는 않더이다.”
“그것도 누구 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이일은 술을 쭉 들이킨 뒤, 여진족의 전술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설명했다.
“한 손에는 검이나 창을 들고, 나머지 한 손에는 짧게 자른 조총을 들고 있었습니다. 접근전을 벌이기 전에 한 차례 사격을 실시하니, 아군의 피해가 적지 않단 말입니다.”
칼이나 창은 서로의 기량에 따라 막거나 피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총은 그렇지가 못하다. 그래서 조선 기병의 피해가 강요되는 중이다.
이일의 설명은 그러했다.
“조선 기병도 똑같이 총을 들면 되지 않소?”
“공방, 생각해보십시오. 그간 아군의 피해는 전무했는데, 이제는 싸우면 반드시 사상자가 납니다. 그것만으로도 이전과 이후의 차이는 결코 작다 할 수 없습니다.”
“과연 그렇기도 하겠구려.”
나는 빈 잔에 술을 따라주며, 잠시 숨을 돌리게 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진족의 습속은 완전히 유목을 하기보다는 반농반목의 형태를 띄고 있다 들은 바가 있소이다.”
“옳게 들으셨습니다.”
“그러니 멀리 몽골인들과는 달리, 정해진 본거지가 있지 않겠소? 부락을 공격하여 발본색원해버리면 그만일 듯도 한데……."
나는 상식적인 선에서 이야기를 했지만, 이일은 이 내용을 기다린 눈치였다.
“멀리서 오셨으나, 그 혜안이 천리 밖을 내다보십니다.”
첫 마디에 아부가 넘친다 싶더니, 이어지는 말에 그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미 지난 싸움으로 아국의 기병이 크게 상한지라, 머릿수가 크게 부족해졌지요. 그러나 공방이 이끌고 온 철포수가 가세해준다면, 능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일 휘하의 조선군도 여진족을 상대하느라 기병이 주력이었다. 그리고 보병과 기병이 합동 작전을 펼친다면, 필연적으로 보병의 손실이 크게 나올 터였다.
아마 아까 일부러 열을 낸 것도, 내게 압박을 가하기 위함인 듯했다. 그러나 그런 술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 역시 역도들을 잡으러 왔는데, 어찌 조선군에게만 맡길 수 있겠소. 허나 내 지위가 지위인 만큼, 지휘권부터 확실해 해야 할 듯하오.”
이일의 지위는 북병사, 다시 말해서 병마절도사다. 품계로 따지자면 종2품에 해당했다.
그리고 나는 국왕이 실질적으로 대등한 지위를 인정한 일본국의 공방. 정해진 품계는 없지만, 조선에서 나를 휘하로 두려면 세자 정도는 와야 할 터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일의 답이 물 흐르듯 흘러나왔다. 미리 생각이라도 해둔 것처럼 그 말에는 막힘이 없었다.
“물론 서로가 속한 나라가 다르니, 내가 조선군을 지휘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하오. 허나 이쪽의 병사들은 내가 직접 이끌 것인데, 북병사나 그 휘하 장수의 지휘를 받는다는 것도 말은 되지가 않잖소이까.”
“이미 어명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공방을 최대한 지원해드리라 하셨으니, 소장 또한 그리 행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인선은 내일 정하도록 하지요.”
확실히 이일에게는 꿍꿍이가 있는 모양새였다. 아무리 어명이 있다고 해도, 이일쯤 되는 고위 장군이 순순히 병력을 내어준다?
시대를 막론하고, 지휘관은 자기가 휘두를 수 있는 직속부하는 남에게 주려 하지 않는 법이었다.
하물며 북병사쯤 되고 보면, 국경의 으뜸가는 장수다. 그런 것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호의적이라, 되려 의심스러웠다.
자리가 파한 뒤, 나는 이순신을 불렀다.
“자네도 들었으니 거두절미하겠네. 누구를 붙여달라고 하는 게 좋겠나?”
질문을 받은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경흥부사 이경록이 사심없고 용맹합니다.”
“그는 북병사와 친한가?”
다소 까다로운 질문이었는지, 이순신은 음성을 내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곳은 내 사람들이 철통같이 경계하는 중이고, 나는 울라부를 토벌하기 위해 최선의 수를 짜야 하네. 민망할 수는 있겠으나, 최대한 구체적으로 말을 해주어야 할 것일세.”
“자세한 사정은 모르나, 서로 기질이 맞지 않는 걸로 압니다.”
“그렇군. 달리 쓸만한 사람은?”
이순신은 몇몇 이름을 거론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이일이 아끼는 편이라는 설명도 붙어 있었다.
“알겠네. 대강 감이 잡히는군.”
* * *
“병사 영감, 부르셨습니까?”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순신에게 조언을 구하는 동안, 이일 역시 자기 휘하의 장수들을 불러놓고 있었다.
“내일 일본국 경공방을 도울 장수를 뽑을 것이다. 내가 믿을 만한 부하는 너희들이 아니겠느냐.”
“말씀만 하십시오.”
“공방이 이기게 하되, 최대한 피해가 크게 만들어라.”
그 말을 들은 장수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볼 뿐, 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방이 직접 왔다. 필시 여진족에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지. 그걸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이다.”
“하오나 어명은…….”
“최대한 공방의 행사에 협조하라 하셨지. 하지만 도성은 멀고, 군사의 일은 긴급한 법이 아니더냐. 그가 무엇을 숨겼는지 알아내는 것 역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일본국 공방이라는 지위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니 달리 꿍꿍이가 있을 터였다. 이일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던 중에, 그의 당여 중 하나인 정철이 서신을 보내왔다.
- 공방의 지위는 높고 그 심계는 깊으니, 그가 먼 길을 왔음은 필시 다른 뜻이 있어서일 것이오. 그러니 그가 무엇을 위해 왔는지 알아내도록 하시구려. 만약 좋은 빌미를 잡을 수 있다면, 차후의 교역에서 아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올 수 있을 것이외다.
이일이 보기에도 옳은 말이었기에, 그 역시 이번 일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부유한 공방의 약점을 움켜쥘 수만 있다면, 아국에게든 이일 스스로에게든 결코 나쁠 게 없을 터였다.
그러나 휘하 장수들에게 그런 사정까지 이야기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북병사로서 조선의 국익을 강조했다.
다행스럽게도 공방의 지위가 직접 나돌기에는 수상할 정도로 높은 만큼, 부하들을 설득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 중 대부분이 이일의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하오면 최대한 야인들을 공방의 부대와 맞붙도록 몰아넣으면 되겠습니까?”
“마땅히 시기를 보아가면서 해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먼저 성심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공방이 너희들을 온전히 믿게 해라.”
그러다가 울라부에 가까워지면, 그때 공방의 힘을 빼놓을 것. 그게 이일이 내린 지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