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종교 전쟁 (7)
마사노부는 그날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되돌아왔다. 그의 옆에는 제법 나이가 든 승려 한 사람이 따라와 있었다.
“아와지의 잇코슈 승려 중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분입니다.”
“소승은 지츠고라 합니다.”
지츠고라는 이름,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났다. 얼굴이 아주 낯선 걸 보면,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일 터였다. 아마도 이치로를 통해 들었던 것 같은데, 애매하게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잇코슈 승려 중에 지츠고라는 법명을 들은 적이 있소만, 혹시 나와 구면이시오?”
“소승은 쿠보를 처음 뵙습니다만, 소에키 선사를 통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아, 그러시오?”
처음 보는 승려에게서 오랜만에 반가운 이름을 들었다.
하지만 소에키는 이미 사카이 밖으로 나가 천하를 떠돌고 있는 상황. 게다가 내 입장에서 보면, 이자는 그를 잇코슈에 가까이 끌어들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약간 기분이 나빠졌지만, 일단 참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마사노부에게 시선을 돌렸다.
과연 내가 제시했던 조건에 일치하는 자일까. 그런 의문을 담아서 쳐다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지츠고 대사님은 혼간지의 전전전대 법주이신 렌뇨 대사님의 열 번째 아들 되시는 분입니다.”
그 말을 듣고 무심코 턱을 쓰다듬었다.
지금 법주인 겐뇨가 11대라고 했으니, 8대쯤에서 갈라져 나온 자인 셈인가. 촌수로 따지면 대충 조부뻘이나 증조부뻘 항렬쯤 되는 것 같았다.
승려가 결혼을 해서 자녀를 본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세습시킨다. 처음에는 상당히 어색했지만, 지금도 사실 어색했다.
하지만 지금 일본은 그게 되는 나라니, 그러려니 할 수밖에.
일단 내가 언급했던 조건에는 그럭저럭 맞는 자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뒤, 바로 용건을 꺼냈다.
“지츠고 선사를 부른 까닭을 아시오?”
“겐뇨가 쿠보의 발 아래에서 분란을 일으키려 하기 때문인 줄로 압니다.”
“바로 보셨소.”
“소승은 교단 내에서 힘이 없습니다.”
정말로 그러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태도였다.
“내가 선사에게 무엇을 원하다고 보시오?”
“그야 물론 겐뇨의 견제가 아닙니까. 허나, 소승은 법주의 자비 덕에 가까스로 목숨만 연명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물론 견제라면 견제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굳이 겐뇨와 교단 내 영향력을 겨룰 필요는 없소.”
법주와 다툴 필요가 없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겐뇨와 다리를 놓아 달라고 부르신 것이신지······?”
“물론 그건 더더욱 아니오.”
지츠고는 물론이고, 마사노부마저도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아와지만의 혼간지 교단을 만드시오.”
“예?”
“당신네 교단의 가르침을 약간 훑어본 적이 있소. 극락왕생을 하는 조건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지?”
흔히 잇코슈로 통하지만, 이들의 기원은 정토종이라는 불교 종파에서 기인했다.
한국에서 가장 알기 쉬운 인물은 바로 원효.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 사람이다.
교의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간단했다.
염불을 외는 것만으로도 부처가 될 수 있다.
정작 그런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개조(開祖)의 혈통을 신성시하는 건 우스운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런 교리였다.
“교리 정립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내 따로 보내주겠소. 그러니 선사는 영내의 잇코슈 신도들을 한데 모으고, 겐뇨에게서 독립할 준비를 하시오.”
여러 종교를 거느려야 할 입장이라면 적당한 수단이 하나는 있었다. 다만 그걸 써먹으려면, 각 종교별로 관리를 할 만한 존재가 있어야만 했다.
가톨릭이야, 내게 협조적인 프로이스 신부가 맡고 있으니 따로 조치를 취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잇코슈는 이제 관리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이왕이면 외부의 입김에 휘둘리지 않을 조직이면 더더욱 좋을 터였다.
내 말을 들은 지츠고는 매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는 말까지 더듬어가며, 자신이 들은 것을 다시 질문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요. 내 영향력 밖에서도 포교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까진 바라지 않소. 대신 겐뇨의 색을 남김없이 지워 버리시오.”
그는 내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후의 진행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 * *
나는 이치로를 시켜, 영내의 다른 종파들과도 접촉을 시도했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바로 종교를 초월한 충성맹세였다.
가장 큰 세력은 가톨릭이지만, 근소하게 잇코슈가 그 뒤를 잇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다양한 종교가 뒤섞인 상태였다.
심지어 네덜란드에서 온 프로테스탄트까지.
“꽤나 복잡하군. 지금까지 별 일없이 흘러온 게 신기할 지경이야.”
“그들 대부분은 쿠보의 통치에 별 불만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어.”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미리 대비한다는 마음으로 조치를 취할 생각이었다.
파악이 끝난 뒤, 나는 각 종교별로 대표 한 사람씩으로 오도록 했다. 그리고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입을 열었다.
“나는 내 영지 내에서 모든 종교를 보호하려 한다. 아와지국 내에서는 신앙에 따라 부당한 처우를 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도시의 질서를 따르기만 한다면.”
내 말을 들은 각 종교 지도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로이스 신부와 지츠고 선사는 이미 언질을 받았고, 나머지는 목소리를 크게 내기 어려운 규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골치가 될 만한 것은 이자나기 신궁의 신관들이었는데, 그들 역시 고개를 조아리기만 했다.
애초에 덴노가 전적으로 내 편이었다.
그리고 신토 교리를 재정립하면서, 다른 종교들 역시 쿠니츠카미(国津神 국진신, 덴노의 조상신인 아마츠카미와 구분되는 지방 신앙)의 형태로서 용인하게 했다.
그러니 지금의 신토는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교리에 못 박아 놓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참가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반론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가장 앙숙 관계인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마저도.
이 둘은 특히 불안했기 때문에, 일부러 불러세웠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역시, 서로를 비방하거나 핍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대들의 신을 두고 맹세할 수 있는가?”
프로이스 신부, 그리고 아직 이름을 외우지 못한 프로테스탄트 목사는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신의 이름을 들먹였으니, 그에 따르는 거부감 정도는 있을 터. 하지만 지금 벌이는 일이 가벼운 건 아니니, 기독교의 십계명에도 어긋나는 건 아니었다.
목사는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하지만 프로이스 신부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제 개인적으로라면, 얼마든지 맹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교황 성하께 순명해야 하는 몸, 로마에서 거부하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음을 알아주십시오.”
“그때는 그때 가서 정리할 일이다. 이미 남만의 토이고(土耳古 투르크의 음차)에도 밀레트라는 제도가 있지 않던가? 그 정도만 따라주면 된다.”
물론 술탄의 강력한 동방제국에 비하면, 내 세력은 보잘 것 없다. 하지만 아쉬운 건 가톨릭이고, 그들만을 위한 특례를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저 역시 영내의 가톨릭 신자들을 대표하여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물론 이 모든 건 보여 주기식으로, 미리 프로이스 신부와 말을 맞춰 놓은 것에 불과했다.
일단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고, 그 다음은 중앙 교단에 따로 존재하는 경우에도 도시의 법을 우선시하라는 메시지를 내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졌다.
* * *
“이봐, 우리 주군을 어떻게 생각하나?”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빙글빙글 웃으며 혼다 마사노부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가 섬겼던 옛 주인은 잇코슈를 용납하지 않고, 모두 추방해 버렸잖은가.”
“그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원래 마사노부는 다시 미카와로 돌아가려고 했다.
직속상관인 히사히데와는 맞지 않는 편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밑에서 공을 세울 만한 기회를 많이 받지 못했다.
그 자신은 무예가 출중하지도 않아, 다른 무사들에게 밀렸다.
그리고 참모 노릇 역시 힘들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둔한 무골이라면 모르되, 그 또한 머리가 비상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료로서는 더더욱 할 일이 없었다.
사카이로 온 이후, 영지를 따로 관리할 필요도 없었고, 그저 봉록이나 받으며 군무에 집중할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건너뛰는 것 역시 곤란한 일이었다. 이미 자신은 주군을 한번 배신했다는 오명이 붙은 몸. 여기에 다른 수치를 얹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옛 사냥친구였고, 혼다 가문은 가신으로서 입지가 탄탄한 편이었다.
다만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의 옛 주군은 잇코슈를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괜찮을 듯싶었다.
그렇게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혼간지에서 문제의 서찰이 날아왔다. 그걸 내팽개치고 떠나 버리면, 자신은 다시 신의 없는 자가 될 터. 이것만 정리하고 사직하려 했다.
만약 추방령이 내린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오히려 떠나기는 쉽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쿠보의 해법은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지츠고 선사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했고, 그것마저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잇코슈의 입지가 굳어지면, 그때는 정말로 떠나리라. 그렇게 결심한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상관인 히사히데가 찾아와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봐, 마사노부. 나를 건너뛴다고 해서, 하극상이라고 생각하진 않겠네. 쿠보의 곁에서 뜻을 펼쳐보지 않겠나?”
마사노부는 흠칫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히사히데가 자신의 말을 이었다.
“자네를 방출할 생각도 있었지. 제법 머리는 똑똑한데, 똑똑한 놈일수록 믿기가 어려운 법이니 말이야.”
“그러시다면 지금은 어째서······?”
“적어도 신의는 있어 보이거든.”
주군을 바꾸는 일은 그런대로 흔한 편이었다. 하지만 혼다 마사노부는 아예 반기를 든 경우였다.
영리한 편이니,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잠시 그의 의탁을 수락했다. 하지만 결코 그를 중용하지는 않았다.
주군 된 입장에서, 그리고 상관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신뢰하기 어려운 자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마사노부 역시 그 사실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갈 만한 곳이 없는 처지. 그냥 눌러앉아 생계를 꾸리던 차였다.
그게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혼다 마사노부 사이의 불화를 키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자네가 잇코슈까지 저버렸으면,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자라고 생각했겠지. 절대 쿠보의 곁에 두려고 하진 않았을 걸세.”
“지금은 아닙니까?”
“적어도 등에 칼을 꽂지는 않겠지. 그리고 쿠보에게는 인재가 아주 많이 필요해.”
“그렇다면 제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실 겁니까?”
히사히데는 그의 질문에 껄껄 웃었다.
“그건 자네가 쿠보에게 받아낼 몫이지. 어쩌겠나?”
그는 말로 대답을 하는 대신, 언제든 떠날 수 있게 꾸려 놓았던 짐을 완전히 풀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