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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35화 (35/225)

35화 일본에서 왔소이다 (5)

“아니되옵니다, 저언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실제로 목격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풍경이었다. 조선의 간관들이 내 앞에서 이러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답례품에서 철을 제외시키라는 이야기였다.

수십의 신하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정전을 울렸다. 몇몇 신하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이들이 반대를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훈구와 사림이 대동단결하는 진풍경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터.

하지만 조선의 국왕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과인도 그대들의 뜻을 따를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은 남으로 왜구를 막고, 북으로 여진의 무리를 억누르기 위함이니라.”

“전하, 신이 물러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쭙고자 하옵니다.”

역관에게 저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니, 영의정이라고 했다. 역시 윤원형이 가짜 사신의 왕래에 책임을 질 예정인 것처럼 보였다.

“어찌 왜인에게 철을 내리시는 일이, 왜구를 막는 방도라 하시옵니까?”

“왜구를 상대하기에, 총통보다 좋은 것이 있던가?”

국왕의 하문에 앞으로 나섰던 신하는 입을 닫았다. 당장은 반박하기 어려운 질문인 듯했다. 그가 한 발짝 물러서는 태도를 취하자 왕이 말을 이어나갔다.

“삼호전 원장경(미요시 나가요시)의 사신이 무엇을 가져왔는지 아는가?”

“수우각(물소뿔)과 구리, 유황인 줄로 아뢰옵니다.”

이 질문에 답한 사람은 내 길안내를 맡았던 기대승이었다. 그도 반대의 대열에 서 있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렇도다. 수우각은 활의 재료이며, 구리와 유황은 총통에 쓰이는 것이 아니던가.”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던 자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덕을 쌓으면 알아서 왜적이 물러가리라는 입에 발린 반론은 나오지 않았다. 당장 10여 년 전에 대규모 침입이 있었으니, 그들도 무력의 필요성은 긍정하는 모양새였다.

“원행장의 말을 들으니, 이미 화약이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한다. 그렇다면 장차 왜구를 막으려면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장차 원행장이 해마다 공물을 보내겠다 하였으니, 과인은 그 뜻을 가납하려 한다.”

왕의 말에 좌의정 이준경이 화답하듯 나섰다.

“신이 도순찰사로 나가 왜구를 상대하여보니, 실로 활과 총통만 한 것이 없었나이다. 이 일은 마땅히 오래 유지해야 할 줄로 아뢰옵니다.”

그나마 신하들 중에서 근왕파에 해당하는 사람이 이준경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말은 왕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나머지도 무사통과였다. 다음번에는 회회청을 가져오라는 조건이 더 붙긴 했지만, 나로서도 괜찮은 일이었다. 그만큼 가져올 상품 중에 청화백자를 더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기는 일본의 무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사치품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것은 그중에서도 상중상에 속하는 보물 대우를 받았다.

게다가 문화인으로 이름 높은 소에키와 이마이 소큐가 모두 내 편이었기에, 이들을 이용해서 유행을 조절하는 방법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도자기의 양식이 다양해지는 건 나로서도 마다할 거리가 되지 못했다.

“삼호전 원장경의 사신, 원행장에게 답례품을 내리도록 하라. 그리고 왜관에 도요와 대장간을 지어 필요한 양을 충당케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       *

아직 교역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쓰시마에는 이번에 가져간 물목의 두 배가 넘는 수량이 남아 있었고, 이것들을 온전히 옮겨야 이번 해의 할당량이 마무리될 터였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좋다마다요. 제 안목이 넓어지는 기회였습니다.”

소에키는 조선에서 만들어진 다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눈이 시릴 것 같은 하얀 백자 찻잔 하나, 그리고 막사발처럼 생긴 찻잔을 또 하나 놓아두고 감상했다.

“음, 흐음······. 뭔가가 떠오를 듯한데 아직 말로 정리하기가 어렵군요.”

나는 명상에 빠진 그를 내버려두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스즈키는 스즈키대로, 철괴 하나를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었다.

“이거 되게 질이 되게 좋은데? 이걸로 철포를 만든다면······.”

“아, 그렇게는 하지 않을 거야. 꾸준히 교역하면서 넉넉해지면 철포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전부 공구로 만들 예정이지.”

내 말에 사이카슈 수장의 아들은 어리둥절해했다.

“공구? 이 좋은 쇠를 가지고?”

“그래. 철포는 일본의 쇠를 가지고도 만들 수 있지만, 공구는 그렇지가 못하거든.”

“철괴 몇 개만 팔 수 있어?”

그는 조선의 철을 탐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내게 아쉬운 것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너에게 줄 수는 있지만, 그러면 철포를 만든 장인을 소개시켜 줄 수 없어.”

“야, 잠깐만.”

하나를 갖고 싶다면, 다른 하나를 포기하라는 요구에 스즈키는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손에 든 철괴를 원래 있던 자리에 두고 왔다.

“어쩔 수 없지. 약속은 꼭 지켜.”

“물론이야.”

나는 배에 실린 짐을 한번 더 둘러보고 다시 고물로 나왔다. 거기서 멀어지는 조선 땅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갑판 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야?”

“낯선 배 수십 척이 우리 앞을 막고 있습니다!”

병사 하나가 가리킨 쪽에는 그 말대로 한 무리의 선단이 이쪽의 항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결코 이쪽을 환영하는 모양새는 아닌 듯했다.

“깃발에 사각형 네 개, 쓰시마 도주의 가몬입니다!”

다소 의외였다.

쓰시마 도주는 이쪽에 전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나는 유즈야 야스히로를 노려보았다.

그도 뜻밖의 상황이었는지, 당황해하고 있었다.

“제 주군께서 고니시 님께 등을 돌릴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뭐지?”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어쩌면······.”

유즈야는 말을 흐렸다. 짐작이 가는 데가 있긴 했던 모양이었다.

“빨리 말해!”

눈앞에 적을 두고, 변명을 기다려 줄 여유 따윈 없었다. 아니, 채근하는 자체가 인내심의 한계였다.

“소 마사모리의 수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또한 주군의 일족이니, 저 깃발을 쓸 수 있습니다.”

“그가 무슨 힘이 있어서?”

마지막에 상관을 찾아와서 패악을 부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이 마지막 발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쓰시마의 무사들 중에는 그에게 동조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도주가 그를 알아서 처결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저자가 무리를 이끌고 나왔다는 이야기면, 쓰시마가 넘어갔을지도 모르겠군.”

“그, 그건······.”

도주의 심복조차도 상황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도 우리와 같이 섬을 떠나 있었으니, 모든 걸 상세히 알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으니, 쓰시마 도주가 배신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자네는 선실에 구금해 둬야겠네. 이해해 주길 바란다.”

“어쩔 수 없군요.”

유즈야는 순순히 포박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에 양측의 거리는 화살이 닿을 거리를 살짝 넘길 정도로 가까워졌다.

스즈키가 나를 찾아왔다.

“어쩌면 저들이 나팔총으로 무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만에 하나라도 도주가 배신했다면······.”

“그럴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거 같은데.”

나도 그럴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히타카츠의 상관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왜?”

“저들의 수가 너무 적어. 만약 쓰시마 전부가 적이 되었다고 한다면, 지금 앞에 있는 숫자의 두 배는 있어야 정상이야.”

사이카슈는 잠시 생각하더니 내 말에 동의했다.

“그것도 그렇네.”

“쓰시마 도주가 배신을 했건, 아니면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왔건, 상관을 견제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

가까워진 만큼 상대의 숫자도 명확해졌다. 스물네 척의 소조선이면 한 척당 30명 내외. 총 병력 수는 칠백을 살짝 넘기는 수준이었다.

이쪽의 관선은 병력보다는 짐을 우선시했기에 머릿수만 놓고 보면 저쪽이 우리의 다섯 배를 넘어갔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배의 구조로나, 병기의 우위로나 이쪽이 훨씬 유리했다. 상대는 그걸 생각지 못했겠지만.

쓰시마의 석고는 일만 석.

만약 다른 다이묘들이었다면 이백에서 오백을 거느리고 있을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쓰시마는 임진왜란에도 오천을 파병하고 뿌리가 뽑혔다고 했으니, 지금도 그 정도의 숫자를 상정할 필요가 있었다.

나머지 병력은 아마도 히타카츠를 견제하고 있거나, 아니면 도주의 병력과 대치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시간 끌지 말고 단번에 끝내 버리자.”

“무슨 수로?”

“이쪽의 체급이 크잖아. 그대로 들이받으면 어쩌지 못하겠지.”

내 말을 들은 스즈키는 양쪽의 배를 훑어보았다.

“배가 상할지도 모르는데?”

“히타카츠와 합류하는 게 우선이니까.”

오백 석짜리 관선, 그리고 이백 석 언저리로 추정되는 소조선. 이 둘이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결과는 뻔할 터였다. 약간의 손실쯤은 감수해도 괜찮다는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고용주 나리의 뜻을 따라 드리는 게 좋겠지. 내 배도 아니지만.”

스즈키는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양측의 거리가 더 가까워졌지만, 내 휘하의 선단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상대편은 일부가 진로를 방해하고, 나머지는 접현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쾅! 우지끈.

“사람 살려!”

“배를 버려라!”

선수를 가로막고 있던 소조선들은 그대로 박살나거나, 전복되어 버렸다.

“와아아아아!”

순식간에 적선의 숫자는 스무 척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그걸 본 우리쪽 병사들의 기세가 올랐고, 상대는 위축된 듯했다.

그렇지만 속도가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다시 서너 척의 소조선에 접현을 허용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앞서 간 동료들보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비참한 결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쏴라!”

타당, 탕!

높은 뱃전 위에서 아래쪽을 향해 산탄이 흩뿌려졌다. 갈고리를 걸어왔던 적선은 순식간에 피투성이로 변했다.

“으악!”

접현한 상대는 전투력을 상실했다.

“밧줄을 끊어라.”

전투력을 잃은 적선에게 볼 일은 없었기에, 밧줄을 끊고 다음 접현을 기다렸다. 여유가 생겨서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두 척의 관선도 사정은 비슷하게 돌아가는 모양새였다.

이요 수군과 벌였던 전투가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때 상대했던 함급이나 숫자를 생각한다면, 이번 상대는 오히려 쉬운 먹잇감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전속력으로!”

내가 타고 있는 관선의 노꾼들은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다른 배들 역시 전속 전진을 의미하는 깃발을 확인하자, 바로 옆에 따라붙었다.

그동안 적은 더 이상 접현을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거리를 벌리는 태세를 취했다.

“물러가나?”

“더 달려들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상당히 판단이 빠른걸.”

스즈키의 말대로였다.

여전히 저쪽을 경계하는 동안, 저들은 바다에 빠진 자기네 편을 건지고는 뱃머리를 돌렸다.

가만히 지켜보니, 멀어지는 소조선의 고물에서 누군가가 나와서 외쳤다.

“이번에는 물러가지만, 네놈들은 쓰시마에 발붙일 곳이 없을 거다!”

목소리가 낯익었다.

“저거 소 마사모리 맞지?”

“아마도. 몇 마디 대꾸라도 해 줄까?”

스즈키는 맞고함을 치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말렸다.

“됐어. 그보다도 역시 히타카츠도 공격받는 모양인데, 서두르자.”

우리는 선실에 갇혀 있던 유즈야를 풀어주었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상황을 질문했다.

“어찌되었습니까?”

“보다시피. 배가 살짝 상하긴 했지만, 우리쪽 인명피해는 없었어.”

“다행이군요. 역시 소 마사모리였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쓰시마 도주는 나를 배신할 생각이 없었나?”

“결코, 결코 배신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이번이 쓰시마가 처한 곤경을 해소할 기회라며 즐거워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협조를 좀 해 줄 수 있겠나? 우린 정보가 필요해. 쓰시마에 병력이 정확히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소 마사모리가 얼마나 장악하고 있을지 말해주었으면 좋겠군.”

쓰시마 도주의 심복은 기꺼이 정보를 내놓았다. 가짜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내가 아는 바와 종합해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유즈야의 의견과 내 추정을 합쳐보면, 대강 이천에서 삼천쯤의 병력이 소 마사모리의 편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원래 도적질에 능한 자들이 주로 마사모리와 친했기에, 하나같이 날래고 사나운 자들일 겁니다.”

“쓰시마 도주도 지금 가네이시 성에 갇혀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

“아마도 그러시리라 생각합니다.”

세가 불리할 때는 농성만큼 유리한 것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쓰시마 도주에게 미곡을 지급했으니, 성에 식량이 모자랄 가능성은 극히 드물기도 했다.

상관도 목책을 두르고 신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런 상대를 섣불리 치기는 어려웠을 터. 아마 양측이 대치하는 가운데, 일부를 빼내서 나를 잡으려 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배의 크기 때문에 공격을 단념한 듯싶군요. 육지에서 야전을 벌일 생각인가 봅니다.”

유즈야는 전투를 목격하지 못했기에, 그렇게 추측했다. 신무기의 존재를 제외하면 그 견해는 거의 이치에 맞았다.

“비슷하겠지. 그렇다면 먼저 상관과 합류한 다음에 쓰시마 도주를 구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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