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헌법과 천상의 신들 앞에서 (3)
“집정관.”
크리스티나 콘테의 부름에 헨리 피셔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민권리장전의 본질을 잊지 마세요. 건국의 아버지들이 꿈꾸었던 공화국은 정부가 시민보다 아래에 있는 나라였다는 점도 잊지 마시고요.”
그 말에 헨리 피셔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항상 명심하고 있습니다, 총수님.”
그 모습을 보며 크리스티나 콘테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벨로디나와의 교섭 그리고 유목민 왕조에 관한 이야기는 이틀 후에 드라기 총수의 저택에서 열리는 회의 때 이야기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확실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최대한 집정관은 잠자코 계세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끝났다.
그러나 한결 당당해진 헨리 피셔와 처음 그의 후견인을 자처했을 때의 뜻과는 상반된 결과물에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크리스티나 콘테,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난 균열은 느리긴 했지만, 점차 눈에 띌 정도로 선명해져 가고 있었다.
* * *
광명력 994년 5월 1일.
이른 새벽부터 자정까지, 벨로디나 전국에서 민중투표가 실시됐다.
밤새도록 각 지역 행정관들이 개표한 결과, 투표율은 99%에 이르렀고 찬성은 97%에 달하는 것으로 최종 집계됐다.
“99% 투표율에 97% 찬성이라…… 거기다 반대는 기껏해야 1%고 나머지 2%는 오기로 인한 무효표…….”
5월 2일 저녁.
여름 궁전 서재에 앉아 투표 결과를 보던 아딘은 별안간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정통성 하나는 완벽해지겠어.”
콘스탄틴 왕가의 유일한 직계 혈족이라는 혈통적 정통성에 혁명 지도자라는 군사적 정통성, 신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종교적 정통성에 이제는 민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는 민주적 정통성까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정통성이 아딘에게 주어졌다.
“어떤 면에선 참 무서운 거야.”
강한 정통성을 지닌 정치인에게 비판을 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여전히 전근대적 관념이 강하게 남아 있는 세계에서, 민주적 정통성까지 갖춘 지도자를 과연 누가 견제할 수 있을까?
‘곧 구성될 국가평의회의 집단지성을 믿어봐야 하는 걸까?’
어차피 아딘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다 해서, 그가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처리하고픈 생각도 없었다.
아딘은 그저 세상의 방향을 앞으로 나아가게끔 이끌고 싶을 뿐이었다.
그것이 네르갈과의 약속이었으니까.
‘큰 틀에서 국가평의회의 존재는, 비록 민주집중제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의회가 존재하지도 않는 이 세상에서, 분명히 의미 있는 진보라 볼 수 있어.’
아딘 이후에 국왕이 될 자는, 불멸의 검으로부터 택함을 받지 못하는 이상, 헌법이 부여한 국가 상징으로서의 역할과 벨로디나광업공사 대주주의 역할만을 할 뿐이었다.
‘벨로디나광업공사가 향후 세계 산업에 영향을 끼칠 마정석 생산을 독점하긴 하지만, 그 회사의 대주주라는 신분만 가지고서는 절대권력을 가지지 못하겠지.’
자격이 없는 자, 즉 불멸의 검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자에게는 절대권력을 주지는 않겠다.
하지만 마냥 허수아비로만 남겨두지는 않겠다.
적당히 한 목소리 낼 수 있는, 어느 정도는 힘을 가진, 그러나 그 힘이 전제군주권이라 불리기에는 약한 정도의 왕.
그것이 아딘이 꿈꾸는, 자기 다음대를 이을 왕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오늘, 벨로디나는 그 첫걸음을 매우 순조롭게 뗐다.
‘국가평의회가 7월 1일 개원하여 첫 임기를 시작하면, 혁명중앙위원회는 해산한다. 그리고 7월 17일 내 대관식과 내각 임명식이 진행되겠지.’
아딘은 가만히 창가로 향했다.
그리곤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참…… 이게 일이 겉잡을 수 없이 커졌어.’
아딘은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자신의 본래 자아인 김현수를.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원칙주의자이긴 했지만 별다른 큰 야망을 가지고 있진 않았던 김현수의 자아는 거의 표면에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김현수의 자아와 아딘 콘스탄틴의 자아가 마치 옷에 묻은 향기처럼 남은 자신의 새로운 자아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나저나 빅토르 다비도프는 어쩐다?’
자아에 관한 짧은 상념을 끝내고 아딘은 다시 현실로 관념을 돌렸다.
‘대놓고 나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일단 마법사이자 외교관으로서 나름 써먹을 구석은 많은 사람이야. 어차피 체르노비치도 사실상 해체된 상태에다가 구성원 대부분이 행정관으로서 안톤에게 복종하는 현실이니까.’
마치 계륵과도 같다 생각하며 아딘은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해도 속 시원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뭐, 언제든지 제거하려면 할 수 있는 상태니까, 일단은 내버려 두고 쓸 수 있는 데까지는 쓰는 게 맞긴 하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아딘은 천천히 서재를 빠져나갔다.
* * *
광명력 994년 5월 5일.
혁명중앙위원회를 통해 왕국 헌법이 공식적으로 채택됐음이 선포됐다.
그 즉시, 벨로디나 전역에서는 마을평의회 구성을 위한 작업이 진행됐다.
“추첨?”
“추첨으로 의원을 뽑아?”
마을평의회 의원 선출 방식은 추첨이었다.
“무식한 농민이 추첨에서 걸리면 우린 그 사람한테 지배를 받는 건가?”
“아이고. 글자도 못 읽는데 그런 높은 자리에 내가 뽑히면 어떻게 하지?”
문맹률이 높은 농민에게 지배당할 수도 있다는 지식인의 우려와 마찬가지로 문맹률이 높은 자신들이 뽑히면 감당할 수 있겠나 하는 농민의 우려가 교차하는 가운데 그렇게 추첨은 이틀에 걸쳐 전국에서 진행됐다.
문자 그대로 무작위 추첨이었던 까닭에, 실제 마을평의회로는 대체로 농민들이 많이 들어가게 됐다.
하지만 지식인이나 농민의 우려는 그다지 현실성이 없는, 다소 과한 것이었음이 금방 밝혀졌다.
“농수로를 놓을 거냐 말 거냐, 뒷산에 나무는 얼마나 심을 거냐 하는 문제에 구태여 지식인이 필요하진 않지.”
“내가 글자는 몰라도 언제 뭘 어디다가 심어야 하는 지는 잘 알지.”
여전히 벨로디나가 가난한 농업국가였던 까닭에 대체로 마을평의회에는 농업에 관련된 사항만이 논의되었고, 그 자리에는 오히려 지식인보단 농민이 더 제격이라는 것이 구성 일주일 만에 밝혀졌다.
그리고 마을평의회에서 도시평의원을 뽑을 때는 대체로 지식인들이 선발된 만큼 식자층의 불만은 순식간에 잦아들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을평의회에서 도시평의회로, 도시평의회에서 지역평의회로 평의원들을 뽑아 올리는 과정이 5월 말 끝났다.
6월 1일, 전국의 지역평의회에서 국가평의원을 선출했고 그들은 6월 25일 콘스탄티노바에 모두 모였다.
* * *
콘스탄티노바 왕궁.
오랜 세월에 걸쳐 축조된 벨로디나 건축의 정수를 담은 아름다운 건축물.
그것의 용도를 두고 혁명중앙위원회에서는 잠깐의 설왕설래가 있었다.
“그래도 왕궁은 왕궁입니다. 봄의 궁전이야 애초에 어전회의도 열리고 또 대신들이 집무를 보던 곳이기도 하니 상관이 없다지만, 국왕이 생활하던 여름 궁전을 국가평의회 건물로 쓴다는 건 과합니다.”
봄의 궁전을 내각청사로, 여름 궁전을 국가평의회 건물로 쓰자는 아딘의 제안에 의외로 반대를 표한 건 빅토르 다비도프였다.
“임시로 귀족의 저택 중 하나를 의회로 쓰다가, 겨울 농한기에 일손을 놓게 되는 농민들에게 일자리도 줄 겸 해서 따로 의회 건물을 세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괜찮은 구상이긴 했지만, 아딘은 기각했다.
“구태여 새롭게 건물을 올릴 필요가 뭐 있습니까? 애초에 거대한 궁전 4개를 모두 왕실이 쓰던 것 자체가 낭비였습니다. 새로이 시작하는 만큼, 이제 그 낭비의 전통을 좀 없애야 하지 않겠습니까?”
크게 목숨을 걸 사안도 아니었기에 빅토르 다비도프도 끝까지 자기 뜻을 굽히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게 여름 궁전은 국가평의회 의사당으로 이름이 변경된 후 개방됐고, 봄의 궁전은 내각청사로 이름이 변경된 후 개방됐다.
7월 1일 정오.
국가평의회 의사당에선 초대 국가평의회 개원식이 총대주교 권한대행 알렉세이 주교의 축복 기도 아래에 성대하게 개최됐다.
그 자리에서 국가평의회는 첫 번째 안건인 ‘혁명중앙위원회의 해체와 그 유산의 상속 및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의 국왕 대관식에 관한 포고령’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그렇게 시계는 아딘의 국왕 등극 대관식인 7월 17일을 향해 달려갔다.
* * *
광명력 994년 7월 17일 정오.
가을 궁전과 겨울 궁전 사이 공간에 3,000명의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나 총대주교 권한대행 알렉세이가 그대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에게, 위대한 선지자 마우세스 레비와 그를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택한 천상의 신들로부터 부여받은 지상의 권한으로 묻노라.”
3,000명으로 북적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차분했다.
그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알렉세이 주교는 팔키르와 로제가 만든 목걸이 형태의 확성기를 목에 걸고는 대관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대는 벨로디나 국민의 수호자이자, 그들의 통합을 이끄는 자이자, 국가 전체를 상징하는 자로서 그 의무가 명시된 왕국 헌법에 충실할 것을 맹세하는가?”
그 물음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합장한 상태에서 아딘은 대답했다.
“맹세하나이다.”
“그대는 신앙의 수호자로서 그 어떠한 종류의 그릇된 악의와도 접하지 않고, 모든 유혹을 이겨낼 것이며, 오로지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왕좌를 지킬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하나이다.”
그 이후로도 몇 가지 의례적인 질문이 이어졌고, 아딘은 계속해서 “맹세하나이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마침내 열 번째 질문이 끝나고, 아딘이 열 번째 답변을 마쳤을 때, 알렉세이 주교는 왕관을 높이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했다.
“위대한 선지자 마우세스 레비시여, 천상에서 우리를 굽어살피시며 인간의 운명과 자연의 법칙을 주관하시는 신들이시여, 오늘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이 벨로디나를 다스릴 왕으로 등극하오니, 왕의 앞길과 국가의 앞날에 축복을 더하소서.”
그 순간, 하늘에서 별안간 번개 두 줄기가 내리쳤다.
두 줄기 번개는 제단 양쪽에 자리한 기둥 최상부에 내리꽂혔고, 곧 기둥 최상부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아…….”
“신들이시여…….”
“선지자시여…….”
그 모습을 보며 대관식에 참여한 민중들 사이에선 신과 선지자를 찾는 기도가 터져나왔다.
알렉세이 주교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아딘의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그리곤 소리없이 제단에서 내려갔다.
알렉세이 주교가 무대에서 퇴장하자 아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잠시 타오르는 기둥의 불꽃들을 바라보며 양팔을 활짝 펼쳐 기도하는 모습을 연출한 후 천천히 뒤로 돌았다.
99개의 계단 아래로 보이는 군중, 그리고 혁명중앙위원회 위원의 자격으로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로제를 바라보며 아딘은 피식 웃었다.
그런 아딘을 바라보며 로제도 피식 웃고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곧 아딘은 양팔을 펼쳐보였다.
“와아아아-!”
그 순간, 여기저기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아딘은 공식적으로 벨로디나 왕국 제20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