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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49화 (149/175)

149 헌법과 천상의 신들 앞에서 (2)

잔뜩 얼어 붙은 회의실 내부와 긴장한 빅토르 다비도프를 바라보던 아딘은 이내 검을 칼집에 넣었다.

그리곤 그것을 칼집째로 허리춤에서 푼 후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건넸다.

“한 번 뽑아 보십시오.”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뽑아 보십시오.”

재차 아딘이 뽑을 것을 종용하자 빅토르 다비도프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후 양손으로 검을 받았다.

그리곤 아딘과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칼자루를 잡았다.

“응?”

건네받은 검의 무게감이 그리 묵직하지 않았기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예사로 생각했다.

그러나 칼은 칼집에서 뽑히지 않았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더 힘을 줘 칼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검은 마치 수천 년간 뿌리내린 거목처럼 뽑힐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빅토르 다비도프가 젖먹던 힘까지 쓰고, 그로 인해 그의 이마와 목에 땀이 흥건해졌지만, 검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뽀, 뽑을 수가 없습니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아딘에게 검을 도로 건네주었다.

검을 받은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안톤에게 건넸다.

안톤은 처음부터 힘을 줬지만, 마찬가지로 검을 뽑히지 않았다.

이내 검은 불카르 아시오게에게로 갔고, 이후 로제에게로, 그리고 나머지 위원들에게로 갔다.

그리고 그 누구도 검을 뽑지 못했다.

다시 검은 아딘에게로 왔고, 아딘은 그것을 가볍게 뽑아내며 위원들을 바라봤다.

“이 검은 성검입니다. 신이 만든 검이자, 고대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군주가 사용했던 제왕의 칼입니다. 스스로 의지가 있기에, 아무에게나 뽑히지 않습니다. 성검 자신이 생각하기에 적합하다 싶은 인간에게만 뽑히는, 아주 고고한 존재입니다.”

아딘은 다시 검을 칼집에 넣고 허리춤에 맸다.

그리곤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내 뒤에 왕이 될 사람이 이 검의 선택을 받는다면, 그는 국가원로자문회 의장직을 맡아 내각과 국가평의회에 이런저런 조언을 전달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성검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그저 국가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왕좌를 차지할 뿐, 그 어떠한 공직도 맡지 못할 것입니다.”

아딘의 말에 결국 빅토르 다비도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겨우 저런 칼에 국가의 운명이 정해진다고?’

그러나 불만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런 불만을 꺼내기에는, 이미 그를 제외한 모든 위원이 아딘이 이야기한 ‘성검’에 매료된 상태였다.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재무총괄위원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아딘의 허리춤에 매인 검의 칼자루 끝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간절히 바라는 사람에게 뭐 하나는 오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왕국 헌법 초안은 자잘한 문구와 오탈자 교정을 거친 끝에 최종적으로 통과됐다.

“우리는 민중의 뜻을 구현하는 민중을 위한 국가를 만들고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최종안이 확정된 왕국 헌법은 최종적으로 벨로디나 민중의 찬반 투표를 통해 공식적인 효력을 발효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딘은 의장으로서 왕국 헌법의 민중투표 회부를 선언한 후 회의를 끝냈다.

‘민중투표에서 이걸…… 뒤집을 수나 있을까?’

회의실을 나서며 빅토르 다비도프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이내 그 희망은 이성이 내린 비관에 짓눌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애초에 민중 가운데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안톤 르보프가 장악한 행정관들이 적당히 선전활동만 하면 모두 찬성표를 던지겠지.’

한때 체르노비치 조직원으로서 빅토르 다비도프를 따랐던 이들은 현재 모두 안톤을 따르는 국가 행정관이 돼 있었다.

여전히 일부는 자신을 찾아와 안부 인사도 건네고 시국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곤 하지만 정치적으로 그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독하구나.’

빅토르 다비도프는 그렇게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봄의 궁전을 빠져나갔다.

* * *

광명력 994년 3월 5일.

콘스탄티노바를 시작으로 전국에 왕국 헌법 찬반 민중투표 실시를 알리는 포고문이 거리 곳곳에 붙었다.

“헌법? 그게 뭐래?”

“나라의 뭐 기본적인 골격이라고 해야하려나?”

“그걸 우리가 찬성해야 한다고?”

“꼭 찬성은 아닌데, 우리가 찬성하면 저게 그대로 통과가 된다고 하네.”

“이야. 세상 참 좋아졌어.”

빅토르 다비도프의 예상대로 민중은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각 도시 관청마다 마련된 왕국 헌법 책자는 식자층에서나 열람했을 뿐이었고, 그들 가운데서도 대부분은 국가원로자문회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국가평의회의 존재였다.

물론 제각각 의견은 달랐다.

“가장 작은 마을 단위에서 먼저 마을평의회를 만들고, 마을평의회에서 도시평의회 의원을 선출하고, 도시평의회에서 지역평의회 의원을 선출하고, 지역평의회에서 최종적으로 국가평의회 의원을 선출한다라…….”

“국가평의회는 법안을 만들고 심의할 수 있고, 내각을 구성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내각에서 제출한 예산안을 심사할 수도 있다고?”

“이거 완전 제니스 공화국 원로원 아닌가?”

“아니지. 제니스 공화국 원로원도 이 정도 권한은 없을걸? 아니, 애초에 그쪽은 이런 식으로 선출되는 게 아니잖아.”

“허어, 참. 이거 정치를 이런 식으로 해도 되는 건가?”

민중을 억압하는 체제에는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혁명적인 무언가에 관심이 없는 보수적인 지식인들은 국가평의회의 존재에 회의감을 드러냈다.

“아래로부터 민중의 뜻이 상부로 전달되는 아름다운 구조 아닌가?”

“마을평의회가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상당히 큰 거야. 옛날에는 귀족이나 대지주 같은 유력자들이 자기네들 방안에서 마을 돌아가는 일을 좌우했다면, 앞으로는 마을 주민 스스로가 마을 돌아가는 일을 훤히 알게 된다는 것 아닌가?”

“역시 아딘 콘스탄틴 의장은 대단해. 망나니라는 소문이 귀족 사교계에 있긴 했는데, 이제 보니까 이런 혁신적인 면모에 대한 반동이 그런 헛소문을 만든 거였어.”

반면 혁명에 대해 우호적인 지식인들은 국가평의회의 존재를 굉장히 높게 평가했다.

“국가평의회는 결국 유력자 잔치가 되고 말 걸세. 마을평의회에서 도시평의원을 뽑을 때, 그 마을에서 말 좀 잘 하고 똑똑한 사람이 가겠지. 도시평의회에서 지역평의원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일 거고, 지역평의회에서 국가평의원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고. 결국, 국가평의회는 과거 귀족 시대보다 조금 나을 뿐, 진정으로 민중의 뜻이 국정에 반영되는 건 아니란 걸세.”

빅토르 다비도프를 비롯한 극소수의 급진주의자들은 국가평의회를 그런 식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식자층에 한정된 것이었다.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빈곤한 민중은 자기들이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새로운 나라의 시작을 연다는 사실 하나에 자부심을 느끼며 잔뜩 들떠 있을 뿐이었다.

“아, 당연히 찬성해야지. 빌어먹을 것들이 다 사라지고, 이제야 우리가 배부르게 먹고 살 시대가 왔는데, 찬성해야지.”

“암만. 우리가 누구 덕분에 자식 잡아먹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났냐고. 다 우리 대왕님 덕분 아니겠어?”

“찬성해야지. 찬성.”

“반대하는 놈들은 다 제니스에 붙어먹던 것들뿐일 거야.”

아딘을 아예 대왕으로 부르는 민중이 대체로 찬성으로 의견이 기울어진 가운데 그렇게 시간은 혁명중앙위원회에서 고시한 투표일인 5월 1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4월 5일 늦은 저녁.

제니스 공화국 수도 아라곤.

크리스티나 콘테의 집에서 집주인과 집정관 헨리 피셔가 포도주를 나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벨로디나가 헌법이란 걸 만든다고 하던데, 참 우스운 일이죠?”

크리스티나 콘테의 말에 헨리 피셔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우리로 치면 일종에 시민권리장전 같은 걸 만들겠다는 건데…… 뭐, 아딘 콘스탄틴이 상당히 개혁적인 인사라는 것만큼은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헨리 피셔의 말에 크리스티나 콘테는 잔을 쥔 채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개혁적 인사라…… 참 웃긴 말 같아요. 구시대 왕족이 여전히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자신이 왕으로 군림하겠다는 걸 성문화하는데 개혁적이라…….”

“뭐, 적어도 군주의 즉흥적인 칙령에 따라 좌우되던 시절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샤펠 제국만 보더라도, 최소한 벨로디나는 앞으로 우리처럼 예측 가능한 국가로 변모할 것입니다.”

헨리 피셔의 말에 그녀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헨리 피셔는 그 시선을 피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하게 가슴을 편 채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켜기까지 했다.

그 당당한 모습에 일순간 크리스티나 콘테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순식간에 다시 안색을 평안하게 교정한 후 미소를 지으며 포도주를 한 모금 넘겼다.

“벨로디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최근 게마인샤프트 쪽이 심상치 않습니다. 카반드 왕조를 자처하는 유목민 반란군이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한 상태입니다. 트링겐과 뵌가르트 정도를 빼면 사실상 가을이 오기 전, 게마인샤프트는 유목민의 손에 떨어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카반드 왕조라…….”

“그 지역에 있던, 아주 고대의 왕조입니다.”

헨리 피셔의 말에 크리스티나 콘테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도 알고 계시네요?”

헨리 피셔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카데미에서 역사를 전공했습니다. 기록물이라곤 점토판 몇 개뿐이긴 하지만, 엄연히 실존했던 거대한 왕조입니다.”

“게마인샤프트에 통일 국가가 들어선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의 서진을 저지하기 위해 벨로디나와 손을 잡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헨리 피셔의 말에 크리스티나 콘테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죠, 집정관?”

“말 그대로입니다. 벨로디나가 적어도 헌법이라는 틀을 가진, 예측 가능성이 높아진 국가가 된 만큼, 그리고 때마침 유목민에 의한 통일 왕조가 게마인샤프트에 들어선 만큼, 우리 입장에선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합법적으로 취득한 자산을 몰수한 것들이 바로 벨로디나에요. 그들이 헌법을 가지건 뭘 가지건, 여전히 야만적인 존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 문제는 외교적으로 풀 문제입니다. 만약 유목민 왕조와 벨로디나가 손을 잡는다면, 우리에게는 악몽 그 자체가 될 겁니다. 그 전에 선수를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헨리 피셔의 모습에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조심스러움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자기도 군대를 부린다 이거지?’

헨리 피셔를 바라보는 크리스티나 콘테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런 그녀의 눈빛을 가만히 여유롭게 응시하며 헨리 피셔는 포도주를 쭉 들이켰다.

크리스티나 콘테도 포도주를 쭉 들이켰다.

탁.

잔을 내려놓은 크리스티나 콘테는 약간은 싸늘한 눈빛으로 헨리 피셔를 바라보았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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