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새로운 벨로디나 (5)
광명력 993년 12월 23일 정오.
콘스탄티노바 중심부에 자리한 광장에서 대대적인 공개처형이 이루어졌다.
혁명재판소로부터 사형을 언도받은 구체제 인사들은 수천 명의 시민이 보는 가운데 지하 감옥에서 태양 아래로 끌려 나왔다.
“벨로디나 왕국 만세!”
더러는 구체제를 찬양하는 유언을 남겼다.
“선지자시여 내 영혼을 이끄소서.”
지하에서 종교적인 회심을 경험한 이들은 담담하게 자신의 영혼을 신에게 맡겼다.
“날 용서하시오.”
극히 일부였긴 했지만, 형장에 무릎 꿇은 자신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던 민중에게 용서를 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늘 나를 죽인 칼이, 내일 너희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 이 가축만도 못한 배은망덕한 것들아!”
그러나 대다수는 민중과 사형 집행관을 저주하고, 발악하며, 구차하게 죽어갔다.
그렇게 12월 23일 하루에만 콘스탄티노바에서부터 노보로바야에 이르기까지, 크리미아에서 상트보가르에 이르기까지, 700명의 사형수에 대한 형 집행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2월 24일, 나머지 405명에 대한 형 집행이 일거에 이루어졌다.
이틀에 걸친 피의 향연 속에서 민중의 분노는 일정 부분 해소됐다.
애초에 구체제하에서 양심을 지켰던 이들이 모두 혁명 정부에 가담했기에, 억울한 피해자도 없었다.
“정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랬기에 아딘은 임시로 동방광명교 총대주교 권한대행을 맡고 있는 알렉세이 주교에게 그렇게 말했다.
“정화…… 라뇨?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광명력 993년 12월 24일 저녁.
왕궁에 자리한 총대주교 성전에서 아딘은 알렉세이 주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혁명 과정에서 피와 증오로 얼룩진 벨로디나 전역에 정화가 필요합니다.”
아딘의 말에 알렉세이 주교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아딘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이제 곧, 혁명 정부는 문을 닫습니다. 새로이 세워질 정부에 모든 역사적 책무를 넘기고 말입니다.”
아딘의 논리는 단순했지만 명확했다.
“구체제의 썩은 물을 혁명의 붉은 피로 정화했습니다. 이제 그 혁명의 붉은 피를 정화하여 새로운 정부에게는 깔끔한 벨로디나를 물려줘야 합니다.”
알렉세이 주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비록 구체제하에서, 제니스 공화국이 우리를 탄압했다곤 하지만, 이미 그 책임자라 할 부역자 무리는 처단이 된 상태고 또…… 기본적으로 원수를 용서하라는 것이 선지자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교훈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총대주교 권한대행께서 직접 정화 제의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정화 제의라…….”
“한날한시에 벨로디나 전역에서 이루어질 정화 제의입니다. 콘스탄티노바와 각 지역의 거점 대도시와 소도시 더 나아가 시골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아딘의 말에 알렉세이 주교는 흠칫했다.
“전국에서 말입니까?”
“이미 모든 도시의 사원은 재건이 된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한날한시에 하려면 준비 기간이 좀 많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오지 마을에 연락이 오가는 것만 해도 빠르게 가야 1개월 이상이 걸리는데 말입니다.”
그 우려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딘에게는 그 당연한 우려를 불식시켜 줄 장치가 있었다.
“연락에 관한 거라면, 별문제가 없을 겁니다.”
아딘의 말에 알렉세이 주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새로이 우리 왕국에 합류한 드워프와 정보총괄위원 로제 콘스탄틴이 합작하여 혁명적인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보시면 알 겁니다.”
그러면서 아딘은 가만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보며 여전히 알렉세이 주교는 의구심을 지우지 못한 채 눈만 껌뻑일 따름이었다.
* * *
12월 25일 오전.
샤펠 제국 수도 아퐁.
황궁 알현실.
황제 샤를 11세는 새로이 묵시록 종단 장로가 된 제이크 로버츠와 그가 이끌고 온 메로네바 왕후 그리고 그녀의 아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대, 메로네바의 여식은 고개를 들라.”
샤를 11세의 말에 메로네바 왕후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가득한 근심과 불안을 보며 샤를 11세는 씩 웃었다.
“그대, 메로네바의 여식은 실로 벨로디나를 찬탈한 패륜아 아딘 콘스탄틴의 패악질을 살아서 보여주는 상징이로다.”
샤를 11세의 말에 메로네바 왕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아딘 콘스탄틴은 자신의 사사로운 복수심과 추악한 권력욕을 위하여 숙부 유리 콘스탄틴을 죽이고 숙모인 그대에게 차마 여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누명을 씌우고 국외 추방령을 선고하였도다.”
그 순간, 메로네바 왕후는 샤를 11세가 무슨 의도로 말을 하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의 반응을 보며 샤를 11세는 쐐기를 박는 말을 했다.
“그러나 신들께서 도우사 벨로디나의 정당한 국왕 유리 콘스탄틴의 핏줄은 그렇게 그대의 품에서 살아 있도다.”
그 말에 메로네바 왕후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이, 이 모든 것이 처, 천상의 신들과 선지자 마우세스 레비 그리고 화, 황제 폐하의 은총 덕이옵니다.”
더듬거리긴 했지만, 명확한 발음의 아퐁 지방 표준 샤펠어였다.
샤를 11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분간은 이곳에서 편히 쉬도록 하라. 그대의 건강이 회복되고, 신들께서 정해 주시는 때가 오면 나는 천상이 부여한 정당한 황제의 권위로 잔악무도한 찬탈자 아딘 콘스탄틴을 징벌할 군대를 일으킬 것이로다.”
“화, 황제 폐하를 찬미하나이다.”
그렇게 샤를 11세는 벨로디나를 침략할 명분을 하나 손에 쥐게 됐다.
* * *
마정석 광산 가운데 제일 빠르게, 급하게 필요한 양을 채취할 수 있는 곳은 콘스탄티노바와 카판 대평원 사이에 있는 이름 없는 바위산이었다.
드워프들에 의해 큰바위얼굴산이라 이름 붙여진 이 바위산에서 팔키르가 이끄는 드워프 광부들은 대략 1톤 정도 되는 양의 마정석을 2주 동안 채취했다.
그것을 연마하는 데 또 2주가 걸렸고, 연마한 것으로 아딘이 주문한, 체르노비치가 소유하고 있던 통신용 수정 구슬을 양산하는 데 또 4주가 걸렸다.
처음 채굴이 시작된 광명력 993년 12월 1일부터 광명력 994년 2월 2일까지, 그렇게 수정 구슬은 대량으로 생산돼 벨로디나 왕국 전역에 자리한 동방광명교 사원에 설치됐다.
광명력 994년 2월 3일 오전.
“허허…… 이건…… 이건 실로 천상의 물건이 아닙니까?”
벨로디나 동북방 페름 지방 근방에 자리한, 인구 200명 남짓한 소도시 드베르페르미야에 자리한 사원의 사제와 연락을 끝내고서 알렉세이 주교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아딘은 웃으며 말했다.
“이 물건만 있으면, 시간을 맞춰서 전국에서 정화 제의가 열릴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알렉세이 주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합니다. 사실 제의야, 그 명칭이 무엇이든 무관하게 큰 틀에선 정해진 규격이 있어서 문제가 없다지만, 함께 시작할 시간을 찾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근데 그게 해결이 됐으니,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러면 최대한 서둘러서 제의에서 낭독하실 기도문을 작성하십시오. 그리고 그걸 모든 사원의 사제들과 공유하시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민중 앞에서 선포될 수 있도록 힘써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렉세이 주교의 작업은 시작됐다.
그사이 아딘은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힘썼다.
“식량 수급이 원활합니다. 봄에 뿌릴 씨도 충분합니다. 이 추세라면 올가을 추수 때까지 기근은 없지 싶습니다.”
“각지의 치안이 안정되고 있습니다. 쿠만족 용병 가운데 일부가 정식으로 치안대에 합류한 덕에 신입 치안대원의 훈련 또한 무사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압류한 제니스 공화국 및 구체제 기득권자들의 자산이 현금화됐습니다. 이대로만 가면 혁명 정부는 다음 정부에 1억 7천만 골드의 흑자를 물려줄 수 있습니다.”
식량총괄위원, 치안총괄위원, 재무총괄위원의 보고는 희망적이었다.
“제니스 공화국의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원로원에서 새로이 포고령을 내렸는데, 치안 부문을 정부가 직접 담당한다는 게 주 내용입니다. 이와 관련해 공화국 내부에 분란이 생긴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1차 신병 교육자가 모두 배치가 됐습니다. 추후 여름이 오기 전, 총 5만 정규군이 배치가 될 예정입니다.”
외무총괄위원 빅토르 다비도프와 군무총괄위원 불카르 아시오게의 보고는 당분간은 벨로디나에 큰 외적 위험이 없을 것임을 이야기했다.
“의장님이 말씀하신 것들이 상용화 직전 단계까지 와 있사옵니다. 카판 대평원 마정석 광산 채굴을 위한 준비도 끝난 상황입니다.”
기술총괄위원 팔키르의 보고는 향후 벨로디나의 미래가 이전과 다름은 물론,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국가들과도 다를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특별히 불순 세력은 보이지 않고 있어요. 다만, 노보로바야에서 발견된, 프런티어 상단의 것으로 추정되는 자산에서 미약하게나마 마법적 흔적이 발견됐는데 정확하게 이게 뭐에 쓰인 건지는 확인이 안 되고 있을 뿐이에요.”
정보총괄위원 로제의 보고는 여전히 미심쩍은 게 있긴 하지만, 대체로 혁명을 뒤엎을 반동 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의장께서 말씀하신 헌법 초안이 현재 9할가량 완성된 상황입니다. 곧, 초안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향후 벨로디나에 수립될 합자회사에 관한 법령이 완성됐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벨로디나광업공사의 지배 구조 및 수익 그리고 세무에 관한 법령도 현재 거의 완성이 돼 갑니다.”
그 외 법무총괄위원과 조세총괄위원도 아딘이 내린 명을 잘 이행하고 있었다.
혁명 정부가 제대로 굴러가고 있고, 이들이 곧 다가올 정규 정부에 모든 권한을 넘길 준비가 다 됐음을 확인한 아딘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곧, 혁명 정부는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퇴장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짧은 기간이지만 이룩해 낸 것들은 역사에 두고두고 남아 전승되며 칭송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향후 전 세계로 혁명이 퍼져 나갈 때, 우리의 일은 모범이 될 것입니다.”
아딘의 말은 단순한 치하가 아니었다.
그 말 속에는 혁명을 전 세계에 수출하겠다는 야심이 내포돼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안톤과 빅토르 다비도프는 단박에 잡아챌 수 있었다.
“사실 수고는 의장님께서 제일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뭐 우리야 의장님이 시키는 대로만 잘했을 뿐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불카르 아시오게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아딘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반면 빅토르 다비도프는 살짝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아딘을 바라봤다.
‘혁명의 수출을 위해선 필연적으로 강한 혁명적 리더가 필요한데…… 설마…….’
그런 그의 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이야기했다.
“남은 기간, 열심히 해서 유종의 미를 다들 거둡시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