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새로운 벨로디나 (4)
가만히 위원들의 말을 듣던 아딘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혁명재판소에서 재판관들과 배심원들 간에 심각한 이견이 생길 경우, 혁명중앙위원회가 중재를 선다는 것이 혁명재판소 설치에 관한 포고령에 명시된 규정입니다.”
위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잘 열리지도 않는 전체회의가 열린 것이니까.
“그런데 전체회의에서도 이렇게 의견이 나뉘니…… 참 재미있을 따름입니다.”
아딘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딘이 실제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모든 위원의 표정이 굳은 상태에서, 이내 아딘의 얼굴에 드리웠던 미소도 사라졌다.
“혁명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아딘의 물음은 질문이 아니었다.
“민중을 위한 국가를 세우겠다는 것. 그게 혁명의 본질입니다. 외세로부터 그리고 억압적인 귀족 체제로부터 벨로디나와 민중을 구하고자 우리는 일어섰던 것입니다.”
아딘의 말에서 어떠한 뉘앙스를 느낀 빅토르 다비도프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배심원단의 다수는 일반 민중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리 콘스탄틴의 왕후를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다.”
불카르 아시오게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왕후를 죽이자는 쪽과 그럴 필요가 없다는 쪽의 표정이 점차 대조돼 가는 것을 보던 아딘은 자신의 뜻을 확고히 밝히며 말을 마쳤다.
“그러나 그 여인이 왕후로 있으며 벌인 패악질 그리고 그 여인이 상징하는 구체제가 있는 만큼, 이 땅에서 살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습니다. 고로 나는 그녀를 국외추방하는 것이 어떤가 생각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위원들 사이에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추방?”
“나쁘진 않은데…….”
“그래도 귀족들은 다 죽이는데 왕후를 살리는 건…….”
그렇게 잠시 소란이 이는 사이, 빅토르 다비도프와 불카르 아시오게 그리고 안톤 사이에 눈빛이 오갔다.
몇 차례 눈빛 교환 이후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장 먼저 안톤이 헛기침을 하고 손을 들어 소란을 잠재웠다.
“내무총괄위원, 말씀하십시오.”
아딘의 말에 안톤이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입을 열었다.
“의장께서 내놓으신 절충안에 대해 저는 찬성합니다. 마땅히 그녀가 받아야 할 벌을 받음과 동시에 사형이라는 지나친 형벌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아주 훌륭한 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뒤이어 빅토르 다비도프도 입을 열었다.
“저도 의장께서 하신 말씀에 동의합니다.”
불카르 아시오게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저도 의장님 말씀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끝으로 세 사람 사이에 오가던 눈빛 교환과 연이은 찬동 발언을 지켜보던 로제마저도 아딘의 안에 찬성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나머지 위원들도 모두 아딘의 안을 찬성했고, 마침내 혁명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왕후의 국외추방이라는 중재안을 혁명재판소에 넘기는 것으로 결론이 나며 끝났다.
* * *
광명력 12월 1일 저녁.
제니스 공화국 수도 아라곤.
크리스티나 콘테의 저택 소연회실에서 3대 상단 총수와 원로원 주요 3대 파벌 수장 그리고 집정관 헨리 피셔가 서열대로 테이블에 앉아 포도주와 빵을 앞에 둔 채 회의를 하고 있었다.
집주인으로서 가장 상석에 앉은 크리스티나 콘테가 좌우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도 다들 아시겠지만, 우리가 오늘 이곳에 모인 이유는 피셔 집정관께서 건의하신 안건에 관하여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고자 함입니다.”
그녀의 말에 모인 이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티나 콘테가 말을 이었다.
“최근 벨로디나에서의 사업 철수와 게마인샤프트에서 발생한 유목민의 난동으로 용병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도 올라가는 실정입니다. 이 문제를 해소하고자 피셔 집정관께서는 치안 부문을 정부가 맡아서 관리하는 방안을 제시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여러분들께서 혹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에 모이기 전, 헨리 피셔가 이야기한 정부 치안대 설립안은 원로원 전체와 다른 상단 총수 그리고 지방 유력자들에게까지 모두 알려진 상태였다.
그런 만큼, 이곳에 모인 이들은 이미 오기 전에 자기만의 생각을 다 정리해 둔 상태였다.
“내가 먼저 말을 해 보겠습니다.”
마르코 루비오가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나 콘테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시작했다.
“난 집정관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쓸데없이 콧대만 높아진 용병 나부랭이들의 기세를 확 꺾을 가장 최적의 정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루비오 상단 총수가 찬성하자 헨리 피셔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하지만 마르코 루비오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리오 드라기가 입을 열면서 헨리 피셔의 미소는 다시 쏙 들어갔다.
“난 반대하오. 치안과 국방은 시민이 담당한다는 것, 더 나아가 전제정권의 출현으로 필연적으로 이어질 정부의 무력 보유를 금지하는 것은 건국의 아버지들 이래 공화국의 유구한 전통이오. 일시적인 경제적 어려움으로 무너뜨릴 만한 전통은 결코 아니란 말이오.”
그러자 원로원 3대 파벌 수장 가운데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자 마르코 루비오가 거세게 반박했다.
“전통도 전통 나름입니다. 지금 상황은 전통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그 전통은 정부가 전제 정권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조상의 지혜로부터 온 것이오!”
“이대로 가다간 용병 나부랭이들이 우리 머리 위에 서게 생겼습니다.”
“고작 용병 따위에게 휘둘릴 만큼 공화국은 나약하지 않소.”
“그 용병놈들이 칼을 쥐고 있잖습니까!”
“그 칼을 준 건 공화국이오!”
마르코 루비오와 마리오 드라기 사이에 논쟁이 오갔다.
그 논쟁은 현재 원로원 내부의 의견 대립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두 총수가 싸우자 원로원 3대 파벌 수장들도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헨리 피셔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논쟁을 지켜보았고 크리스티나 콘테는 아무 말 없이 포도주를 마시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우리가 제국은 물론 벨로디나 야만인들에게까지 밀린 거 아닙니까!”
“뭐?!”
급기야 논쟁이 감정싸움으로 가기 시작할 무렵, 크리스티나 콘테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날카로운 여인의 고음이 남자들의 논쟁을 잠시 잠재웠다.
크리스티나 콘테가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감사를 표한 후 이야기했다.
“건국의 아버지들께서 세우신 전통은 아직 용병의 존재가 그리 크지 않던 시대에나 통용이 되던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입을 여는 사이 다른 두 상단 총수들은 포도주를 마시며 목을 적셨다.
“그때 건국의 아버지들께서는 지금처럼 용병이 자신들의 주제를 넘어선 행동을 할 것을 예측하진 못하셨을 겁니다. 그러니, 현 상황에서 전통에 얽매이는 건 옳은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에 마리오 드라기와 두 원로원 의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반면 마르코 루비오와 다른 한 원로원 의원 그리고 헨리 피셔의 표정이 밝아졌다.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이 안건에 대해 생각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전통이 아닌, 미래를 위해서 말입니다.”
크리스티나 콘테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소연회장은 침묵에 잠겼다.
그 침묵 속에서 눈치를 살피던 헨리 피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문제를 원로원 표결에 붙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헨리 피셔에게로 향했다.
마리오 드라기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어차피 원로원 표결로 포고령이 내려질 것 아니었나?”
헨리 피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아예 논의 자체를 원로원에 맡기고 알아서 표결에 붙이도록 해보면 어떻겠냐는 말입니다, 총수님.”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심지어 헨리 피셔의 후원자인 크리스티나 콘테의 얼굴도 굳어버렸다.
“집정관. 지금 하신 말…… 무슨 뜻인지 알고는 계시죠?”
크리스티나 콘테의 물음에 헨리 피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원로원 의원들 사이에 시선이 교차했다.
서로 이견을 지닌 채 대립하던 세 사람은 이내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집정관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좋겠지 싶습니다.”
그 순간, 3대 상단 총수들의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이 새끼들이…….’
하지만 그들에겐 딱히 명분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 당장 자기들끼리 의견이 일치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던 만큼, 원로원으로 모든 걸 떠넘기자는 헨리 피셔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이후 논쟁이 몇 차례 더 오갔지만, 결국 3대 상단 총수는 원로원으로 이 안건을 떠넘기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지금 일이 제대로 되고 있는 게 맞지?’
모든 손님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크리스티나 콘테는 우려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제대로 된 판단을 쉽사리 내릴 수가 없었다.
* * *
12월 5일 오전.
크리미아 항구에서 배 한 척이 돛을 펼친 채 남쪽으로 항해하기 시작했다.
배 선미 부분에선 한 여인이 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슬픈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았어…….’
유리 콘스탄틴의 왕후이자 최종적으로 국외추방형을 선고받은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아들아…… 이제 우리 어떻게 살아야 하니?’
강보에 쌓인 채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여인은 연신 눈물을 흘렸다.
배에 탄 사람들은 그런 여인을 힐끔거리기만 할 뿐, 가까이 다가가거나 말을 걸진 않았다.
어차피 모두 다 게마인샤프트에서 헤어질 사이였으니까.
그렇게 한동안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이내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그 차가운 냉기에 아이가 깨어 울음을 터뜨리자 황급히 선실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막, 그녀가 인적 드문 곳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려 할 때,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찬바람을 맞게 하면 됩니까? 아직 어린아이에게.”
갑작스럽게 나타난 남자의 말에 여인은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아이를 꼭 껴안은 채 사내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무 경계하진 마십시오. 일국의 왕후를, 국모를 어찌 할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인간은 아닙니다.”
사내의 말에 여인은 더욱 긴장했다.
“메로네바 왕후. 그대를 모시기 위해 내가 친히 이 배 전체를 샀습니다.”
남자의 말에 여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저를…… 죽이려는 건가요?”
여인의 말에 사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죽이다뇨.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모시는 분의 명령에 따라 메로네바 왕후를 그분께 모셔드리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누, 누가 날 부르던가요? 아, 아딘 콘스탄틴, 그 사람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사내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위대한 샤펠 제국의 황제께서 그대를 원하고 계십니다. 저는 위대한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드는 충실한 종, 제이크 로버츠입니다.”
사내, 제이크 로버츠의 말에 여인은 한동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