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콘스탄티노바 (3)
불칸의 갑옷과 불멸의 검 그리고 네르갈의 목걸이.
황금빛 찬란한 이 신물들은 빛을 발하며 강렬한 인상을 주지만, 반대로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착용자의 존재감을 옅게 만들기도 한다.
민중 앞에서 아딘이 구원자의 면모를 보일 필요가 있을 때에는 찬란하게, 마치 지상에 강림한 태양처럼 빛을 발했다.
하지만 지금, 왕궁으로 침투해 전쟁의 성패를 좌우할 전략 목표를 확보하려는 시점에서 신물들은 아딘의 존재감을 최대한 감추며 그를 어둠과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푹-!]
왕궁 남쪽 외곽에 자리한 총대주교 성전.
그곳에서 나온 아딘은 안톤과 31인의 습격단원을 가을 궁전으로 보냈다.
그곳에 자리한 유리 콘스탄틴의 부인, 왕후를 사로잡는 것을 그들의 몫으로 맡긴 것이었다.
[푹-!]
그리고 아딘은 지금, 국왕 유리 콘스탄틴이 거하는 여름 궁전으로 향하며 두 명의 용병을 어둠 속에서 찔러 죽이는 중이었다.
‘허수아비라도 괴뢰정권 유지를 위해선 필요하다 이거군.’
“와아아아-!”
바닥에 쓰러지는 용병을 바라보던 아딘은, 저 멀리 왕궁 외성 너머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와도 같은 함성을 듣고서, 잠시 시선을 그리로 돌렸다.
‘됐어. 콘스탄티노바가 내우외환에 휩싸인 이상, 왕궁 내부에 있는 것들이 어딘가로 도망칠 우려는 없어.’
어차피 민중 봉기나 외부의 공격은 전술 단위에서의 움직임에 불과했다.
로제와 5천 혁명 정예군에 의해 서문이 뚫리고 그 이후 시가전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더라도, 그리고 그 결과 혁명군이 승리하더라도 전쟁 자체를 끝낼 전략적 한 수는 될 수가 없었다.
‘만약 제니스 공화국이 작정하고 벨로디나를 공격하려고 한다면, 크리미아에 주둔 중인 2만 용병에 추가 파병까지 시켜서 우리를 밀어버리려 하겠지.’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려 든다면, 유리 콘스탄틴의 존재는 강한 명분이었다.
찬탈자에 맞서 정당한 국왕을 복귀시키겠다는 것만큼 좋은 명분은 없으니까.
‘설령 저들이 벨로디나를 포기한다 하더라도, 유리 콘스탄틴을 수중에 넣게 둘 수는 없지. 그랬다간 두고두고 틈만 나면 그를 앞세워 침략할 궁리만 할 테니까.’
그랬기에 아딘에게는 유리 콘스탄틴의 신병확보가 가장 중요했다.
그의 신병만 확보한다면 가장 큰 우환은 제거되는 셈이었으니까.
‘왕후도 사로잡아야 해. 어찌 됐건, 그녀는 콘스탄틴 왕가의 핏줄을 잉태했다고 대외적으로 공인된 상태니까.’
두루마리를 통해 확인한 왕후의 존재를 떠올리며 아딘은 코웃음을 쳤다.
‘왕좌에 오르느니 차라리 그냥 계시지 그러셨소.’
아딘은 유리 콘스탄틴이 있을 곳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 순간, 아딘은 자신의 뇌리를 흔드는 무언가에 다시 웃음을 잃었다.
‘너무 몰입하고 있어.’
왕궁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아딘은 자신의 자아가 점점 아딘 콘스탄틴의 것에 몰입이 됨을 깨달았다.
김현수의 자아가 중심을 잡아준다곤 하지만, 아딘 콘스탄틴의 육신이 오랫동안 거했던 장소에 오니 그 자아가 강해지는 것은 어찌 막을 방도가 없었다.
한 차례 심호흡으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아딘은 다시 조용히 어둠 속에 숨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왕궁 밖에 소란이 있는데, 우린 계속 여길 지키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그거야 콘테랑 루비오 쪽 애들이 알아서 막겠지. 우리야 계약 조건 자체가 여길 지키는 거잖아. 괜히 쓸데없이 초과 노동할 생각하지 말어.”
봄 궁전과 여름 궁전 사이의 정원을 순찰하던 두 용병의 대화를 들으며 아딘은 속으로 웃었다.
‘이게 용병의 한계지.’
아딘이 두루마리를 통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제니스 공화국은 벨로디나에 파병된 용병을 단일한 지휘 계통하에서 통제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극도의 비효율만 야기했을 뿐이었고, 실제 현장에선 그런 비효율적인 일원적 지휘 통제를 가뿐히 무시하고 각 상단별로 따로 움직였다.
그것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역설적으로 벨로디나의 심장부인 콘스탄티노바였다.
오히려 크리미아 같은 경우에는 루비오 상단과 콘테 상단 소속 용병단 수뇌부들이 적절히 연합지휘부를 구성해 협동이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기야 제니스 공화국한테는 크리미아가 가장 중요하니까. 거기서 모든 물자가 오가니…….’
그렇게 생각하며 아딘은 조용히 두 사람의 뒤로 가 검을 휘둘렀다.
[서걱-!]
[툭-!]
거의 동시에 목이 썰렸고,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아딘은 그들의 시신을 뒤로한 채 정원을 가로질러 여름 궁전으로 향했다.
* * *
“피난이라?”
“네, 폐하.”
유리 콘스탄틴은 가만히 고문 제임스 틸러를 바라봤다.
“국왕인 내가 왕궁을 버리고 도대체 어디로 피난한단 말이오?”
“왕궁은 그저 건축물일 뿐, 폐하께서 계시는 곳이 곧 왕궁 아니겠습니까?”
‘입만 산 새끼.’
유리 콘스탄틴은 속으로 욕하면서도 그걸 표정으로도 드러내지 않은 채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섣불리 국왕인 내가 콘스탄티노바를 떠난다면, 폭도들은 더욱 기세등등해질 것 아니겠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이 아니오.”
“하지만 이대로 콘스탄티노바가 폭도들에 의해 무너진다면, 폐하는 물론 이 나라 자체가 무너질 것입니다.”
유리 콘스탄틴은 살짝 팔걸이를 손으로 꽉 쥐었다.
‘건국의 아비라는 자들이 민중 반란을 통해 세운 공화국의 시민이란 작자가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하지만 역시나 그는 속으로나 삭일 뿐이었다.
그 이상 행동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콘스탄티노바를 방비하는 귀국의 병사만 하더라도 1만하고도 5천이오.”
“그중 5천은 오롯이 왕궁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국왕 폐하께서 갈 길을 뚫거나 혹은 왕궁으로 넘어오려는 폭도들을 막거나 할 때뿐입니다.”
“끄흠……”
“어서 피난하십시오, 폐하.”
어차피 제임스 틸러가 피난을 결정한 이상, 유리 콘스탄틴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국가의 대소사조차도 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신변에 관한 것을 정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알겠소. 고문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유리 콘스탄틴의 승낙에 제임스 틸러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지만, 유리 콘스탄틴은 화조차 내지 못했다.
“폐하의 비서 나타샤가 피난 준비를 끝마치는 대로 폐하를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리하시오.”
제임스 틸러는 가볍게 인사한 후 국왕 침실을 빠져나갔다.
유리 콘스탄틴은 그가 나가고 나서야 겨우 한숨이나 내쉴 뿐이었다.
“참…… 하아…… 허허…….”
그렇게 그가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허망하게 내뱉고 있을 때였다.
[쿠당탕-!]
문 너머로 들리는 소란에 유리 콘스탄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문가로 향하자마자,
[콰앙-!]
굉음과 함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곳으로 황금빛이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하는 전신 갑주를 입은 아딘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 누구냐?!”
유리 콘스탄틴은 당혹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아딘의 양손에 잡힌 것들을 확인했다.
하나는 제임스 틸러의 머리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직 살아 있는 나타샤의 머리채였다.
[휙-!]
“으허억-!”
[쿠당탕-!]
아딘은 그대로 제임스 틸러의 머리를 유리 콘스탄틴에게 던졌다.
유리 콘스탄틴은 화들짝 놀라다 그만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며 아딘은 코웃음을 친 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나타샤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그리곤 다시 칼집에서 불멸의 검을 꺼내고서 천천히 유리 콘스탄틴에게 다가갔다.
“누, 누, 누, 누구 없는가! 밖에 누구 없는가!”
고래고래 고함치는 유리 콘스탄틴을 향해 아딘은 차가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실질적으로 이 나라를 지배하는 고문이 죽었고, 허수아비 국왕의 감시자인 비서가 잡혀 온 시점에 밖에 그대를 도울 자가 있을 것 같소?”
아딘의 목소리를 듣고서 유리 콘스탄틴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 이 목소리…….’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기억하고 있나 보오?”
아딘은 씩 웃으며 갑옷의 투구 부분만 해체했다.
“허억-!”
“오랜만이오.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그대도 몰랐으리라 생각하오만?”
아딘은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 웃음 속에서 유리 콘스탄틴은 불과 1년 하고도 수개월 전 자신이 지하 감옥에서 보였던 미소를 떠올릴 수 있었다.
* * *
거대한 가을 궁전의 기둥 뒤에서 안톤은 습격단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이미 오랫동안 그와 호흡을 맞춰왔고, 또 왕궁의 구조를 달달 외우고 있던 이들이었던 만큼, 척하면 척이었다.
[푸욱-!]
[푹-!]
순식간에 가을 궁전 왕후의 침실 밖을 지키던 용병들이 습격단원들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습격단원이 수신호를 보내자 안톤은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안톤은 곧 습격단원들에게 턱짓과 눈짓을 했다.
습격단원들은 즉시 사방으로 흩어지며 가을 궁전으로 통하는 모든 입구를 장악했다.
그것을 확인한 안톤은 즉시 두 사람의 습격단원과 함께 문을 박차고 왕후의 침실로 들어섰다.
“어머!”
“헉!”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안톤과 습격단원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 네놈들은 누구냐!”
왕후의 침대 위에서 왕후와 나체 상태로 뒤엉켜 있다가 안톤과 습격단원들이 등장하자 급하게 이불로 하복부만 가린 남성, 메로네프 공작의 모습에 안톤은 이를 갈았다.
“메로네프가 제니스 공화국에서 낳았다는 딸을 유리 콘스탄틴에게 시집보냈다더니…… 제니스 공화국에서 낳은 딸이 아니라 어디서 주운 인형이었구나.”
안톤의 분노에 찬 목소리에 순간 메로네프 공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르, 르, 르보프 경?”
“그대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전하의 명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안톤은 메로네프 공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안톤은 그대로 검을 휘둘러 메로네프 공작의 목을 쳤다.
“꺄아아악-!”
곁에서 이불로 몸을 가리고 있던 왕후는 얼굴에 메로네프 공작의 피가 튀자 비명을 지르며 이불로 머리까지 가렸다.
땅바닥으로 떨어진 메로네프 공작의 머리통을 발로 밟아 터뜨린 후 안톤은 습격단원 둘에게 턱짓했다.
곧 습격단원들은 침대로 와 왕후를 이불째로 둘러맸다.
“가자.”
안톤은 그 말을 남기고 앞장서서 왕후의 침실을 빠져 나갔다.
‘비로소 왕실의 기강이 바로 세워질 것이니…….’
무너진 왕실의 기강.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하필 안톤이 왕후의 확보를 위해 가을 궁전에 침투했을 때 일어나고 있었다.
‘유리 콘스탄틴의 씨를 품었다는 회임 중인 여인을 품었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리던 안톤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약 전하께서 뜻을 세우지 않으셨다면…… 그러했다면…… 콘스탄틴 왕가에 메로네프의 더러운 씨가 들어올 뻔했구나.’
안톤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선지자시여…… 감사하나이다. 그대가 하늘에서 신들의 곁에 계시며 전하를 위해 기도하신 덕에 이 모든 잘못된 것들이 바로잡히고 있나이다.’
한 차례 기도한 후 안톤은 다시 움직였다.
아직 그가 해야 할 일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