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콘스탄티노바 (2)
광명력 993년 4월 12일.
콘스탄티노바 외성은 싸늘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성벽과 망루에 선 제니스 공화국 정규 용병들은 적들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신의 무기를 살피고 있었다.
“어디서 저렇게 많이 모인 거지?”
“진짜 민란인가?”
“저기 저놈들은 쿠만족이라고 알고 있어.”
“쿠만족? 그 용병 민족?”
“그래. 도대체 무슨 민란이 용병을 끼고 있느냔 말이지.”
남북으로 12km, 동서로 10km에 이르는 콘스탄티노바 외성을 빙 두르고 진지를 구축한 적들.
그들 중 실질적인 전투력을 가진 존재는 쿠만족 용병 5천과 카판족 정예 전사 100인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거대한 콘스탄티노바를 포위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기에 아딘은 빅토르 다비도프를 통해 체르노비치 조직을 이용, 콘스탄티노바 외곽 소도시와 북방 및 동방 요새 그리고 콘스탄티노바 남부 일대 농촌의 민중을 총동원했다.
그 결과 콘스탄티노바 외곽에 구축된 진지에는 총 5만 명의 인파가 몰려 있었다.
“일단 지금 우리가 확보해 놓은 식량이라면 대략 한 달은 버틸 수 있습니다.”
참모의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구만.”
그러면서 불카르 아시오게는 제법 오랜만에 다시 만난 딸 다리아를 바라보았다.
“민병대 무장 상태는?”
공식석상인 만큼 다리아는 불카르 아시오게에게 예의를 갖추며 답했다.
“무장이라 부르기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그렇겠지. 식량 확보에나 열을 올렸지, 무장에는 신경 안 썼으니까.”
불카르 아시오게의 시선이 로제에게로 향했다.
“대마법사께서 보시기에 저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얼마나 힘을 가해야 할 것 같습니까?”
그 물음에 로제는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라버니의 명령은 성벽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거예요. 무너뜨리기 위한 방법 따위는 아예 내 머릿속에 없어요.”
“크흠.”
불카르 아시오게는 헛기침을 하며 살짝 다리아에게 눈빛을 보냈다.
‘뭐 하는 년이야?’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린 다리아는 어깨를 슬쩍 으쓱거릴 뿐이었다.
불카르 아시오게는 눈을 찌푸렸다.
‘콘스탄틴의 동생이라 거 특별히 물어본 건데…….’
아딘이 모종의 작전을 위해 모습을 감춘 현재, 실질적으로 혁명군을 지휘하는 것은 불카르 아시오게였다.
문제는 그에게 딱히 지휘권을 행사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신호를 주기 전까지, 군을 움직이지 마시오.”
사라지기 전 아딘이 남긴 명령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아딘의 신호는 전적으로 로제를 통해서만 받아볼 수 있었다.
‘참모 회의는 매일같이 꼬박꼬박 하라고 해서 하는데…… 거 참…… 할 이야기도 없고…….’
불카르 아시오게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참모들을 바라봤다.
참모들은 대체로 긴장한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일단 우리는 콘스탄틴 전하의 명령이 내려오기 전까진 이곳에서 대기한다. 그때까지 최대한 민병대의 무장 상태를 경무장 수준으론 끌어올리길 바라며, 특별히 할 말이 없으면 오늘 참모 회의는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 이의 있나?”
이의가 없으므로 참모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 * *
4월 12일 늦은 밤.
콘스탄티노바 매음굴.
왕할멈의 집 다락에 세 남자가 모여 있다.
“강녕하시었사옵니까, 전하.”
안톤의 인사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야말로 잘 있었는가?”
“전하의 심려 덕분에 잘 지냈사옵니다.”
아딘의 시선이 빅토르 다비도프에게로 향했다.
그는 절제된 예의를 보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딘은 안톤을 바로 앉힌 후 입을 열었다.
“여러 정황과 정보를 종합했을 때, 제니스 공화국은 현재 벨로디나를 두고 굉장한 고심에 빠져 있다.”
안톤과 빅토르 다비도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알겠지만, 제니스 공화국은, 구체적으로 공화국을 이끄는 3대 상단은 손익 계산에 따라 움직이는 종자들이다.”
아딘은 가만히 바닥에 펼쳐진 벨로디나 전도의 남부를 가리켰다.
“저들이 우리 조국의 혁명에 대항하는 것이 손해가 막심한 행동임을 깨닫는다면, 혁명은 콘스탄티노바에 흐를 피를 끝으로 더 이상의 피를 갈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딘은 말을 이었다.
“나와 안톤이 왕궁을 점령하러 들어가면, 그대는 즉시 콘스탄티노바 전역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도록 조치해야 한다.”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우려는 잘 알고 있다. 콘스탄티노바에 주둔 중인 최정예 용병을 대상으로 민중이 봉기를 일으킨다는 것은 곧 대규모 학살로 이어진다는 것을.”
빅토르 다비도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혁명은 피를 머금지 않고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이것을 그대도 잘 알기에 민중 봉기를 처음부터 계획하지 않았던가?”
빅토르 다비도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콘스탄티노바 내부에서 봉기가 발생하면 현재 성벽에 집중된 적군은 일시적으로 지휘 계통에 혼선이 생길 것이다. 그때, 내가 로제에게 신호를 보내 외부를 포위 중인 혁명군이 일제히 성벽으로 돌격하도록 할 것이고.”
아딘은 콘스탄티노바 서쪽을 가리켰다.
“다른 곳은 모두 공갈이 섞인 위협일 뿐일 것이고, 실질적으로 혁명군의 핵심 전력은 모두 이곳 서문을 공략할 것이다. 그러니 그대도 민중 봉기가 서쪽에 집중될 수 있게끔 조정해주길 바란다.”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혁명의 성공이 우리 눈앞에 다가올 것이다. 외세에 침탈당해 신음하는 이 땅과 백성을 위해, 선지자의 재림을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아딘의 말에 안톤은 감명을 받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빅토르 다비도프는 입술을 깨물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 * *
노보로바야.
제이크 로버츠는 아지트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런 제이크 로버츠를 로이는 의자에 앉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은 죄가 있나?”
로이의 물음에 제이크 로버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장로님.”
“근데 왜 그렇게 떨고 있지? 왜 무릎을 꿇고 있고, 왜 머리를 처박고 있지?”
“그, 그게…… 베, 벨로디나의 난동을 바로잡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을 담아…….”
“교주께서 그대 전도자에게 명령하신 것은 그게 아니었다.”
로이의 말에 제이크 로버츠는 입을 다물었다.
“교주께서는 그대의 보고를 잘 받아 보셨다.”
“가, 감사합니다.”
“그대의 공로를 치하하시는 한편, 내게 보다 구체적인 상황을 알아오라 지시하셨다.”
제이크 로버츠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오는 길에 전서구 하나가 이곳에 들어온 것을 확인했다.”
로이는 손을 내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제이크 로버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로이는 가만히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더니 이내 그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민란의 주동자를 찾고, 그와 향후 양국 간의 관계에 관한 협상의 장을 마련하도록 하라……. 장사치들다운 발상이군.”
로이는 가만히 제이크 로버츠를 바라봤다.
“그대가 공화국에 민란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넘기지 않았다니, 참 기특하게 생각한다.”
“가, 감사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 이에 대하여 교, 교주님께 지, 직접 아뢰고자 하였는데 때마침 장로님께서 오시어서…….”
로이는 씩 웃었다.
“공화국은 벌써부터 패배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미, 민중이 들고 일어난 이상 안 그래도 적자 덩어리인 괴뢰국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 내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국이 자치령을 개간했을 때에도 처음엔 적자 덩어리였는데, 시간이 지나며 점차 흑자로 전환이 됐고 지금은 아주 중요한 경제적 거점이 됐다. 쯧쯧쯧…… 역사가 짧고 근본이 없으니 단기적 이익에만 매달리지.”
로이의 말에 제이크 로버츠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조국을 모독하는 것에 분노할 법도 하건만, 그는 마치 평소 생각하던 것을 로이가 말하기라도 한 양 조용히 그 말을 듣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대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로이의 물음에 제이크 로버츠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답했다.
“자, 장로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런 제이크 로버츠의 반응에 로이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아딘 콘스탄틴을 만나고 싶다. 사실, 그것을 위해 이곳까지 직접 왔다고 해도 무방하지.”
로이의 말에 제이크 로버츠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분부 따르겠습니다.”
로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푹 쉬어두라, 전도자여. 내일 늦은 밤, 우리는 콘스탄티노바로 갈 것이다.”
* * *
4월 15일 새벽.
콘스탄티노바 지하 하수도.
오래전, 동방광명교 총대주교 성전의 오수 처리용도로 쓰이다 현재 방치된 이 거대한 공간을 아딘과 안톤 그리고 31명의 중무장한 기사들이 걷고 있었다.
“총대주교 성전에 자주 다녔지만, 이런 장소가 있는 줄은 나도 몰랐지.”
선두에 선 아딘의 말에 안톤과 기사들은 귀를 기울였다.
“사실 알 필요가 없었지. 애초에 나는 왕궁을 정문으로나 드나들었지, 이렇게 하수도를 이용해 드나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계속해서 걷던 아딘이 별안간 멈춰섰다.
안톤과 31인의 기사들은 눈앞에 드러난 계단과 그 위에 자리한 조그만 구멍을 가만히 바라봤다.
“더욱이 사제들이 변을 보던 곳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딘은 씩 웃으며 안톤과 기사들을 바라봤다.
“오늘, 우리가 외세를 등에 업은 찬탈자 유리 콘스탄틴을 사로잡는다면, 그리하여 이 땅과 백성이 구원을 받는다면, 이곳은 그 누구도 다시 찾아올 수 없을 정도로 메워질 것이다.”
아딘의 말에 안톤과 기사들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한 차례 푹 숙였다.
“아편과 뇌물, 부패로 얼룩졌던 위대한 성전은 다시금 재건될 것이다. 그때에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돈도, 벽돌도 아닌 선지자의 재림을 갈망하는 민중의 순수한 마음일 것이다.”
한 차례 습격 조직원의 마음을 다진 후, 아딘은 선두에서 계단을 올랐다.
그 뒤를 안톤이 따랐고, 이어서 31인의 기사들이 과거 아딘을 위해 봉사하던 서열대로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후, 아딘과 안톤 그리고 31인의 습격대는 버려진 총대주교 성전의 화장실에 모두 올라섰다.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리길 바란다. 이곳에서 그대들이 이룬 성과가 그만큼 민중의 피를 덜 흘리게 할 것이니.”
그러면서 아딘은 주머니에서 수정 구슬을 꺼냈다.
“다비도프. 시작하라.”
첫 번째는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보내는, 콘스탄티노바 민중 봉기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로제. 시작이야.”
그리고 두 번째는 로제를 향해 보내는, 대대적인 공격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작전 개시.”
마지막으로 아딘은 안톤과 기사들에게 명령한 후 찬란한 황금빛에 휩싸였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