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충신 (2)
광명력 11월 24일 심야, 제이크 로버츠는 아퐁 서북부 해안가에 자리한 황실 안가에서 샤를 11세와 독대했다.
마리오 드라기의 요청을 받고 로이와의 상담을 위해 아퐁으로 이동한 지 1주일이 지나서야 성사된 만남이었다.
“뭐, 충분히 드라기 입장에서는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겠지.”
편안한 복장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샤를 11세는 말했다.
제이크 로버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만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대 전도자 입장에서도 결정을 나와 로이에게 미루는 게 당연한 거고.”
샤를 11세는 포도주를 한 모금 넘겼다.
“하지만 그대도 알고 있겠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샤를 11세의 물음에 제이크 로버츠는 고개를 땅에 처박은 상태에서 천천히 대답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어, 어차피 아딘 콘스탄틴이 황금 갑옷인 상황에서 그, 그의 목표가 명확한 이상, 그저 노보로바야에서 돌아가는 사태를 파악하기만 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제이크 로버츠의 대답에 샤를 11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어차피 그대가 순식간에 아라곤에서 노보로바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시간만 죽이고 기다리다 보면 벨로디나의 공화국 용병은 쿠만족을 상대로 싸우게 되겠지.”
“하, 하오면 그, 그리 해도 되겠사옵니까?”
제이크 로버츠의 물음에 샤를 11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 더 훌륭한 대안이 없다면.”
“아, 알겠사옵니다.”
제이크 로버츠는 살짝 눈치를 살폈다.
샤를 11세는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가만히 창밖의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물러날 때임을 직감한 제이크 로버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내린 채 뒷걸음질로 방을 나섰다.
그리고 제이크 로버츠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그림자 속에서 로이가 튀어나왔다.
“갑갑하구나.”
샤를 11세의 말에 로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알베르토 데 디에고가 반대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이드 님.”
“인간 중에서도 통찰력이 어지간한 하급 신보다 괜찮은 종자는 종종 나오는 법이니까. 알베르토는 사람 보는 안목이 참 괜찮았지.”
“하오나 아이드 님께 불경한 마음을 품었던 자였습니다.”
“뭐, 정확하게 말하자면 병상에 누워 있던 사돈과 철부지 사위를 좀 우습게 봤던 거였지만.”
“확실한 건 제이크 로버츠를 장로로 세우시는 것은 다시 한 번 숙고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이의 말에 샤를 11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계에서 변수를 없애려면 종단을 전 세계로 확장시키는 게 맞긴 한데…… 사람이 없어,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며 샤를 11세는 포도주를 쭉 들이켰다.
로이가 다가와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지난번에 제이크 로버츠와 대동했던 여자아이는 잠재력이 괜찮아 보이긴 했습니다, 아이드 님.”
“줄리아라고 했던가? 그 여자애, 제이크 로버츠의 조카라고 했던가?”
“사촌의 사생아입니다. 그렇기에 정식으로 로버츠라는 성씨를 따르진 않습니다.”
“차라리 그런 아이를 키우는 게 더 낫겠어. 내가 신물을 모두 손에 쥔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역사는 계속될 거니까.”
“역사의 지속을 위해 아이드 님께서 이러한 고난의 길을 걷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로이의 말에 샤를 11세가 씩 웃었다.
“그런 나의 이상을 위해 엘드랄, 그대도 고난의 길을 걷는 거고 말이야.”
“저는 그저 아이드 님께 충성할 따름입니다.”
샤를 11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쟁반에 뒤집혀 있던 잔을 집어 들어 테이블에 올렸다.
그리곤 그 잔을 포도주로 채우며 로이에게 이야기했다.
“오랜만에 술이나 같이 하지. 그동안 프랑수아의 몸에서 와병으로 고생할 때, 새 숙주가 다치지 않도록 보좌를 잘 해줬으니까 말이야.”
“영광입니다, 아이드 님.”
그렇게 둘의 술자리는 새벽이 지나서 둥근 해가 뜰 때까지 이어졌다.
* * *
“족장 쿤다르 아시오게는 큰 욕심이 없는 사람이옵니다. 전형적인 쿠만의 사냥꾼이라 보시면 되옵니다.”
광명력 992년 11월 25일 오전.
아침 식사를 끝마치고 아딘의 방에서 아딘과 로제, 안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 주제는 쿠만족을 어떻게 용병으로 고용하느냐하는 것이었다.
“이미 나이도 60이 넘은 된 터라 모든 것에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사옵니다. 사실 이러한 보수성이 우리 왕국과의 교역이 막혔음에도 쿠만이 버티는 원동력이기도 하기에 마냥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사옵니다.”
어디선가 구해놓은, 들소 가죽 위에 그려진 쿠만족장 겸 발리크 요새 사령관 쿤다르 아시오게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안톤은 그에 대한 자기 나름의 평가를 아딘에게 말해 주었다.
단순한 인적사항 및 몇 가지 특이사항만 나열된 두루마리와는 달리, 오랜 세월 동안 궁정에서 정무를 처리한 안톤의 평가에 나름 흥미를 느끼며 아딘은 가만히 물을 한 모금 넘겼다.
안톤은 쿤다르 아시오게의 초상화를 빼고 그 자리에 다른 초상화를 꺼내 들었다.
“현재 유력한 후계자는 쿤다르 아시오게의 외동아들인 불카르 아시오게이옵니다. 부친과는 달리 야망이 크고, 외부 세계에 대한 갈망이 강한 자이기도 하옵니다. 사실 이것 때문에 한동안 우리 왕국 동부 국경지대의 경계가 강화되기도 했사옵니다.”
안톤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딘 콘스탄틴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쿠만족의 약탈 위협은 실제 한동안 벨로디나 왕국 동부에 강한 긴장감을 불어 넣기도 했으니까.
“이자라면 충분히 우리에게 용병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현재 사냥터지기로서 아래에 500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유력한 차기 지도자이니만큼 불카르 아시오게가 동의한다면 순식간에 3천까지는 고용이 가능할 것이옵니다.”
그러나 말을 하는 안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문제는 결국 이자에게 들어갈 보수가 후에 우리 왕국에게 독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옵니다.”
그 말에 아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쿠만족 약탈 위협의 핵심 인물 중 하나가 불카르 아시오게였던 만큼, 그에게 용병 고용에 대한 대가가 전달되면 그것은 분명 미래의 위협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소신은 한 가지 생각을 해 보았사옵니다.”
생각이란 말에 아딘과 로제가 모두 안톤을 바라봤다.
안톤은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헛기침을 연발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전하께옵서 배필이 아직 없으신 만큼…….”
그러면서 안톤은 또 다른 초상화를 아딘 앞에 쓱 내밀었다.
“정략결혼?”
아딘은 황당하단 표정으로 안톤과 초상화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불카르 아시오게에게는 딸이 하나 있사옵니다. 그가 가장 아끼는 딸인 만큼, 그 딸이 벨로디나의 국모가 된다면 적어도 다음 세대까지는 벨로디나와 쿠만 사이에 우호 관계가 조성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감히 생각하였사옵니다.”
안톤의 말에 아딘은 어이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안톤은 아딘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미색이 빼어나지는 않사오나 쿠만의 아녀자답게 건장하고 튼튼한 사람이옵니다. 불카르 아시오게 입장에서도 전하와 자신의 딸이 혼약을 맺는다면 쿠만족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더욱 강고해질 것인 만큼 서로에게 괜찮은 전략 아니겠…….”
그 순간, 안톤은 자신의 심장을 후벼파는 강렬한 살기를 느꼈다.
그로 인해 그는 말을 더 이상 잇질 못했고, 순식간에 왼손을 파르르 떨고 식은땀을 흘리며 죽음의 공포에 늪처럼 빠지는 경험을 겪어야 했다.
‘이, 이게 무슨……!’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그저 감기지 않는 눈으로나 바로 앞에 확보된 시야 속 사물을 인지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도, 도대체 누가?’
아딘은 안톤이 건네준 초상화를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 앉아 있는, 아딘이 그저 동생으로 삼은 마법사라고만 일러준 로제는 안톤을 잡아먹을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 설마 저 여자애의…….’
얼마나 대단하면 아딘이 동생으로 삼았을까? 하는 물음을 로제는 단박에 해결해주었다.
‘이 살기와 중압감을 나에게만 집중해? 전하께는 일체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
엄청난 압박감에 안톤의 정신이 혼미해지며 꿈과 현실의 경계 사이에 놓일 무렵, 로제로부터 뿜어져 나오던 가공할 살기는 일거에 사라졌다.
“크후욱…….”
로제가 살기를 거두자 그제야 제 기능을 하게 된 안톤의 육신은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를 기다란 한숨으로 일거에 해소했다.
“응?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나?”
갑작스러운 안톤의 한숨에 아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물었다.
안톤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아, 아니옵니다. 아무 일도 아니옵니다.”
“아무 일도 아니라기엔 식은땀을 지나치게 많이 흘렸는데?”
“살짝 피곤한 것뿐이옵니다. 괘념치 마옵소서.”
안톤의 말에 아딘은 여전히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소드마스터가 갑작스럽게 지병에 시달릴 리는 없겠지.’
오른팔을 잃은 만큼, 피로도가 쉽게 쌓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아딘은 불카르 아시오게의 딸, 다리아 아시오게의 초상화를 안톤에게 밀어 넘겼다.
“정략결혼은 아무래도 너무 나간 생각 같아. 개인적으로 쿠만인을 벨로디나에 귀속시킬 방법을 구상해 둔 게 있으니, 이 문제는 일단 넘어가도록 하지.”
그 순간, 안톤은 확인할 수 있었다.
아딘의 말에 로제의 표정이 급격히 환해지는 것을.
‘설마 저 여자…….’
안톤은 아딘과 로제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전하의 혼사에 관한 문제는 전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내가 언급할 문제는 아니야.’
그렇게 안톤이 자아비판을 하고 있을 때, 아딘은 불카르 아시오게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카판족이 동원 가능한 용병이 2,500에 불카르 아시오게가 동원 가능한 용병이 3,000. 총 5,500…… 반면 벨로디나에 주둔 중인 제니스 쪽 용병은 5만…….’
거의 10대1의 비율이었다.
‘카판족이 훌륭한 궁기병이고 쿠만족은 거인족의 후손으로서 하나하나가 인간 흉기에 버금가는 전사들이지만…… 야전에서라면 모를까 공성전에서는…….’
계산기를 두드리던 아딘은 시선을 가만히 로제에게로 돌렸다.
‘로제와 내가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면 공성전도 그리 어렵진 않겠지. 하지만 명심해야 해. 로제가 지나치게 힘을 쓰면 이 아이의 심장에 무리가 생겨.’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안톤에게로 향했다.
‘안톤이 소드마스터이긴 하지만 지금은 외팔이, 그것도 주로 쓰던 팔이 아닌 왼팔만 남은 검객에 불과해. 결국 전장에서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이지. 아아…… 안톤의 양팔만 멀쩡했더라면…… 결국 빅토르 다비도프를 통한 민란 공작에 의지해야 하는…….’
그 순간, 아딘의 뇌리로 번개처럼 아이디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가능할까?’
아딘은 안톤과 로제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 시선에 안톤과 로제는 동시에 아딘을 바라봤다.
‘로제는 장님의 눈을 뜨게 했어. 그리고 나병을 치유했지. 그건 모두가 망가진 세포와 신경을 회복시키는 작업이었지. 그렇다면 안톤의 팔도?’
안톤의 오른팔이 회복된다면, 그리고 그가 다시 자라난 오른팔에 적응할 시간만 충분히 갖춰진다면 충분히 과거의 역량을 보일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아딘 콘스탄틴이 기억하는 안톤의 과거는 위대한 장수이자 벨로디나 제1의 검객이었다.
‘문제는 로제가 심장을 다치지 않는 선에서 그걸 할 수 있느냐인데…….’
아딘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한동안 로제를 바라봤다.
어딘지 모르게 부담스러운 시선에 로제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아딘의 눈을 계속해서 직시했다.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아딘은 안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톤. 잠시 자리를 좀 비워줄 수 있겠나? 로제와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말이야.”
아딘의 말에 안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잠시 아래층으로 가 있겠사옵니다.”
“그래.”
잠시 후, 안톤이 방을 나섰다.
그가 방을 나서자 아딘은 천천히 로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