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충신 (1)
대륙 극동지방 특유의 거친 눈보라는 다행히도 아딘과 로제가 쿠만으로 향하는 하늘길에서는 마주할 일이 없었다.
그야말로 천운으로 눈보라를 피할 수 있었던 두 사람은, 예정보다 이틀을 앞당겨 광명력 992년 11월 24일 정오에 쿠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운이 좋았어. 자칫 잘못했으면 눈보라에 되게 고생했을 건데 말이야.”
쿠만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발리크 요새를 향해 걸어가며 아딘은 로제에게 말했다.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저는 기대했어요. 눈보라랑 마주치길.”
“눈보라가 강한지 네가 강한지 시합이라도 하려고?”
“그건 아니구요. 그냥 궁금해서요. 눈보라가 얼마나 강한지.”
로제의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생 대부분을 따뜻한 슈드 자치령에서 보낸 만큼, 그녀에게 있어서 눈이란 매우 특별한 존재일 것이니까.
‘부산 사는 친구들도 다 이렇던데.’
그런 생각을 하며 아딘은 가만히 마법 주머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두루마리는 향후 2주일 동안 눈보라가 없이 맑고 추운 날만 지속될 것임을 알려주었다.
“눈보라는 다음에 언젠가 볼 기회가 생길 거야. 드물긴 하지만 콘스탄티노바에도 눈보라가 몰아칠 때가 있거든.”
“정말요?”
“뭐, 자주는 아니지만 앞으로 콘스탄티노바에 살다 보면 가끔은 보게 될 거야.”
아딘의 말에 로제는 활짝 웃었다.
눈보라가 얼마나 강한 재해인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그저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기대감이 상당히 클 터였다.
‘하기야 벨로디나 사람들도 태풍에 의한 피해에 대해선 감을 못 잡을 테니까.’
슈드 자치령과 제니스 공화국에 빈번한 태풍 피해에 대해 벨로디나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슈드 자치령 출신 로제 또한 벨로디나 사람들이 겪는 눈보라 피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라 생각하며 그렇게 아딘은 로제의 손을 잡고 얼어붙은 대지를 걷고 또 걸었다.
‘상트보가르에 비해서 크게 쇠락한 느낌은 없어.’
발리크 요새로 향하며 아딘은 극동의 도시 쿠만의 전경을 두루 살폈다.
벨로디나인과는 확연히 다른, 가히 오크에 준하는 덩치와 근육을 자랑하는 쿠만인들의 모습에선 상트보가르에서 보았던 민중의 피폐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늘 그랬다는 양, 가죽옷을 입고 창과 화살을 챙겨 든 채 사냥을 떠나는 모습은 일견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두루마리도 딱히 쿠만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없었어. 하기사 애초에 교역보다는 수렵과 채집으로 자급자족하는 형태였으니까.’
똑같이 제니스 강점기에 의한 피해를 입음에도 한쪽은 완전히 도시가 몰락하고, 다른 한쪽은 그래도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딘은 묘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그나저나 일단 발리크 요새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숨좀 돌려야겠는데…….’
쿠만 자체에 대한 개괄적인 정보야 두루마리를 통해 얻었다지만, 발리크 요새의 사령관이자 쿠만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선 아직 정보가 많이 부족했다.
거기다 닷새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상트보가르에서 이곳까지 날아온 덕분에 아딘이나 로제나 모두 피로가 상당히 누적된 상태였다.
‘아무리 신물의 힘이 대단하고, 용의 마력이 강한들 결국 나나 로제나 껍데기는 인간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딘은 요새 근처에 있는 조그만 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삭풍이라…….’
간판에 벨로디나 문자로 적힌 쿠만어를 바라보며 아딘은 피식 웃었다.
‘쿠만인들 다운 작명 센스야.’
그렇게 생각하며 아딘은 로제와 함께 여관 삭풍으로 들어갔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둘을 반긴 건 고기 삶는 냄새였다.
그다음으로 둘을 반긴 건 여관 홀에 앉아 칼을 손질하던 여관주인의 시선이었다.
“어이쿠. 어서 오십시오.”
여관주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딘에게 다가왔다.
아딘과 로제의 행색이 벨로디나인의 전형이었던 만큼 그의 입에선 유창한 벨로디나어가 흘러나왔다.
“방은 2층에 있습니다. 남는 게 방이니 얼마든 쓰고 싶은 만큼 쓰시면 됩니다.”
여관주인의 환대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일단 사흘 정도 숙식할 예정입니다. 방 2개 부탁드립니다.”
“방 2개에 사흘 치 숙식비…… 예전에는 1골드로도 충분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요즘은 좀 올랐습니다. 3골드 정도는 주셔야…….”
3배나 오른 가격이었지만, 벨로디나의 인플레이션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마법 주머니에서 5골드를 꺼내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여관주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일단 점심 식사를 좀 하고 싶습니다. 제일 잘하는 거로 2인분 부탁합니다.”
“멧돼지를 산딸기술로 숙성시켜 만든 요리가 최고입니다. 산딸기술하고 같이 드시면 왕도 부럽지 않을 겁니다.”
여관주인의 과장된 말을 들으며 아딘과 로제는 천천히 창가 쪽 테이블로 가 자리를 잡았다.
“여기는 그래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네요?”
로제의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트보가르야 쿠만하고의 교역 이외에는 딱히 자급자족할 거리가 없었잖아. 하지만 여긴 달라. 구태여 교역을 안 하더라도 사냥과 채집으로 충분히 자급자족이 가능하지.”
“아…….”
“대신 뭐 풍요롭거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어. 당연하긴 하지만, 교역이 많으면 많을수록 물산은 풍족해지고 의복이나 건축은 화려해지니까.”
아딘의 말에 로제는 단박에 이해했단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파세레빌에서 동쪽으로 오면 올수록 허름해진 거네요.”
“그렇지.”
그렇게 아딘과 로제는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도시와 교역 및 자급자족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는 주로 로제가 질문을 던지고 아딘이 김현수가 대한민국 12년 공교육 및 대학교육 4년의 결과물을 통해 습득한 지식 및 아딘 콘스탄틴이 제왕학을 배우며 습득한 지식을 동원해 답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무르익어갈 무렵,
[벌컥-!]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두꺼운 곰 가죽을 입은 채 터덜터덜 여관으로 들어온 남자의 허리에는 검 한 자루가 채워져 있었고 손에는 토끼 2마리가 쥐어져 있었다.
“어이쿠, 토끼 2마리라…… 그럭저럭 하루 밥값은 했네.”
때마침 아딘과 로제의 음식을 들고 나오던 여관주인이 사내와 토끼를 확인하고는 피식 웃으며 쿠만어로 그렇게 한 마디 내뱉었다.
사내는 여관주인에게 대꾸하지 않고 그저 토끼를 여관 구석 바닥에 내려놓을 뿐이었다.
‘어?’
그런 사내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피던 아딘은 곰 가죽 아래 드러난 사내의 얼굴이 굉장히 낯이 익은 얼굴임을 확인했다.
‘잠시만…… 설마?’
여관주인이 테이블에 음식을 세팅하는 사이 아딘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사내에게 다가갔다.
아딘이 다가오자 그제야 사내는 아딘을 의식했다.
그리고 아딘을 본 순간 사내의 눈빛이 변했다.
그 사내의 눈빛을 확인한 순간 아딘은 사내의 정체를 확신했다.
“아아…….”
[쿵-!]
사내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에선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딘도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끼며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안톤…… 살아있었구나.”
사내, 안톤 르보프가 눈물을 흘리며 아딘에게 절했다.
“전하!”
그리고 그제야 아딘은 안톤 르보프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팔이…….”
오른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 * *
아딘을 탈출시키고, 안톤은 500에 이르는 중기병들과 싸웠다.
소드마스터의 살벌한 붉은 검기 앞에서 제니스 공화국 루비오 상단 소속 중기병들은 가을 농부의 낫에 수확되는 밀처럼 힘없이 썰려 나갔다.
하지만 안톤 역시 사람이었다.
아딘을 보호하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에서, 이미 체력적으로 상당히 지친 상황에서 500의 잘 훈련된 중기병과 싸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중기병들 가운데 일부가 소드마스터와의 싸움에 특화된 몇 가지 마법 도구를 들고 있었다는 점이 큰 문제였다.
[서걱-!]
결국 안톤은 중기병 200기의 목을 썰었을 무렵, 기습적인 공격을 당해 오른팔을 잃고 말았다.
오른팔을 잃은 상황에서 그가 더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톤은 그대로 주인 잃은 말에 올라탔고, 최대한 아딘을 보호하고자 북동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달리고 또 달렸다.
200의 중기병을 잃은 용병들은 처음엔 곧잘 추격하다가 이내 추격을 포기했다.
덕분에 안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가 생명을 대가로 오른팔을 바쳤다는 것이었다.
오른손잡이인 그에게 있어서 오른팔의 소실이란 곧 무력의 소실을 의미했다.
과다출혈과 정신적 고통, 몰려오는 육체적 피로 속에서 안톤은 결국 한 이름 없는 야산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때 저는 제 삶이 끝났다고 생각했사옵니다. 여기까지가 내 삶이구나 생각하며, 그래도 전하를 살렸다는 것에 자랑스러워하며 그렇게 저는 죽음의 신을 기다렸사옵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고된 수행 중인 사제와 마주한 것이었다.
마음씨 좋은 사제는 그 자리에서 안톤을 치유해 주었고, 사제의 신성력으로 출혈이 멎고 상처가 아문 안톤은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이승으로 되돌아오게 됐다.
“저에게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신들의 뜻으로, 선지자의 의지로 여겼사옵니다. 그랬기에 동방으로 이동했사옵니다. 이곳, 쿠만에서 최대한 미래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제 생각이었사옵니다.”
그대로 안톤은 무작정 육로를 이용해 쿠만으로 왔다.
1월의 눈보라를 헤치며, 지나가던 짐승들을 잡아 닥치는 대로 생식하며 그렇게 그는 쿠만에 도착했다.
그러나 쿠만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쿠만은 철저히 폐쇄적인 사회였고, 쿠만의 지도층들은 유리 2세나 제니스 공화국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급자족으로도 충분히 먹고살 만하니까. 당연히 그랬겠지.”
아딘의 말에 안톤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안톤을 아딘은 위로했다.
“그래도 그대와 같은 충신이 있기에 아직 벨로디나에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옵니다, 전하. 저는 충신이 아니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사는 버러지일 뿐이옵니다.”
“아니다. 그대가 생의 의지를 놓지 않았기에 이처럼 나와 재회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크흑…….”
괴로워하는 안톤을 바라보며 아딘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두루마리에서도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야말로 안톤은 여기서 객원에 불과한 거야. 쿠만 전체의 운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객원.’
그것이 안톤의 자존감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렸음을 생각하며 아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른팔을 잃은 소드마스터. 비록 소드마스터로서의 힘은 남아있다지면 더 이상 예전 같진 않겠지. 쿠만족 지도부 입장에서도 구태여 이런 반쪽 소드마스터를 따라 벨로디나 및 제니스 공화국과 싸울 이유가 없고.’
문득 아딘은 안톤이나 빅토르 다비도프나 모두가 결국에는 충신이며, 충신의 끝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아딘의 입맛을 쓰게 만들었다.
아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안톤에게 이야기했다.
“그대를 살려둔 것은 분명 신들의 뜻과 선지자 마우세스 레비의 의지가 담긴 운명일 걸세.”
“전하…….”
“그대가 고난을 겪었듯 나 또한 고난을 겪었네. 그리고 고난을 이겨내며 난 많은 것을 얻었지.”
그렇게 이야기하며 아딘은 슬쩍 로제를 바라봤다.
두 남자가 연출한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린 그녀는 나온 음식에 손조차 대지 못하고 있었다.
“곰탱이랑 아시는 사이였는 줄은 몰랐네. 허허, 이거 참.”
때마침 여관주인이 안톤이 먹을 음식도 가져와 테이블에 세팅했다.
아딘은 그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준 후 안톤과 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모든 좋은 일도 배가 불러야 즐길 수 있는 법. 일단 지금은 즐겁게 식사를 하자고.”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