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초원의 문명 (5)
카르기아족의 족장 카르갈이 예언자의 예언에 따라 봉쇄 조치를 내린 지 일주일이 지났다.
카르기아족의 오크들은 영역 내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사냥도, 채집도 없이 오로지 쌓아 둔 식량과 가축화된 들소 및 얼룩말의 고기로 버텨야 했다.
‘한계야. 명확한 한계야.’
그리고 지금, 카르갈은 동족 포식의 현장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부족원의 인내심이 한계치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동족을 포식하는 것은 야만스러운 호가르의 잡것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런데 어떻게 카르기아족의 긍지를 품고 살아간다는 존재가, 그것도 전사라는 놈이 동족을 먹는단 말이야!”
카르기아가 분노의 일성을 뿜어냈다.
그의 두터운 성대에서 뿜어져 나온, 사자와 같은 포효에 동족 포식을 한 오크 전사는 바들바들 떨어야만 했다.
“당장 저놈을 처형해! 처형하고 시체는 마을 바깥 저 멀리 하이에나 무리들 근처에 던져 버려!”
“사, 살려 주십시오, 족장님! 살려 주십시오!”
“어서 죽여!”
“아버지! 아버지!”
[뻐억-!]
간절히 자신을 찾는, 11번째 아들의 죽음을 냉혹한 눈으로 바라보던 카르갈은 주변의 부족원들을 한 차례 쏘아본 후 예언자와 함께 자신의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명백한 경고였다.
나는 내 자식조차 규율을 어기면 죽이니까, 개기지 말고 말 잘 들으라는 그런 경고.
“후우.”
움막으로 들어온 카르갈은 사자 가죽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리곤 자기 맞은편에 앉는 예언자를 향해 이야기했다.
“한계에 도달했네. 한계 말이야. 긍지를 가져야 할 전사라는 놈이 동족을 먹었어! 미개한 호가르의 야만족처럼!”
카르갈의 말에 예언자는 차분하지만 상당히 떨리는 목소리로 최대한 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족장님, 그 호가르족이…… 조금 전에 멸망했습니다.”
예언자의 말에 카르갈은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호가르놈들이 멸망하다니?”
“폭풍이…… 황금빛 폭풍과 타오르는 분노가…… 그들 모두를 죽여버렸습니다. 전사와 일꾼,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가릴 것 없이 말입니다. 모조리 찌르고 베고 태우고…… 마을 전체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예언자의 말을 듣던 카르갈은 이내 콧방귀를 뀌었다.
“보나 마나 인간이라고 잡아먹으려고 덤벼들었겠지. 멍청한 야만족들.”
“예정대로라면 이틀 뒤에 폭풍은 이곳을 지나칠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참으면 됩니다.”
“자네도 봤잖아. 지금 슬슬 한계치까지 온걸.”
“이틀입니다. 이틀만 버티면 다시…….”
순간, 예언자는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그리고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뭐, 뭔가? 또, 또 예언인가?”
카르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예언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카르갈의 물음에 대답했다.
“바, 방금…… 방금……”
“방금 뭐?”
“베, 베뭉가르족 전사들이…… 화, 황금빛 폭풍에 의해…… 몰살당했습니다. 조, 족장 비, 비켈르르도 같이……”
족장과 전사의 몰살.
그것은 곧 한 부족의 전멸을 뜻했다.
족장도 없고 전사도 없는 오크 부족은 곧 주변의 다른 부족이 찾아와 여자만 빼가고 완전히 멸망시킬 테니까.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베뭉가르족이 왜? 그것들은 인간을 먹지도 않고 건들지도 않잖아.”
카르갈의 물음에 예언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카르갈의, 지나치게 컸던 목소리는 움막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호위의 귀로 들어갔고, 그것은 곧 부족 전체에 호위의 입을 통해 퍼져갔다.
* * *
광명력 992년 7월 28일.
아딘은 총 세 차례에 걸쳐 오크와 싸웠다.
첫 번째는 호가르족 전체.
두 번째는 베뭉가르족 비전투계급 오크 남성.
마지막 세 번째는 베뭉가르족 전사 전체와 족장 비켈르르.
그리고 아딘은 그 모든 전투에서 깔끔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앞으론 로제 말대로 할게. 그냥 우리한테 적대적으로 나오는 오크는 다 죽이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날 밤, 모닥불 피워놓고 그 위에서 팔팔 끓은, 라인하르트가 만든 가젤 수프를 한 그릇씩 먹으며 아딘은 로제에게 이야기했다.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 죽이면 돼요, 오라버니. 다 죽이면 아무 문제도 없어져요.”
다소 과격한 그녀의 말에 아딘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테인 남작한테서 배운 건가? 저런 극단적인 가치관은? 아니면 용의 유전자 때문인가?’
그러면서 아딘은 로제의 곁에 꼭 붙어있는 토리를 바라봤다.
이제는 약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는지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보단 평온해진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수프를 먹고 있었다.
“저기…….”
가장 빠르게 수프 한 그릇을 비운 라인하르트가 두 번째 수프를 퍼담은 후 그것이 식는 사이 아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체가 뭡니까?”
라인하르트의 물음에 아딘은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라인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여동생분은 마법사에, 고용인님은 마법 황금 갑옷을 입은 전사에…… 오크를 무슨 개 패듯이 패 죽이고…… 혹시…… 소드 마스터십니까?”
아딘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보입니까?”
“그것 말고는 딱히 설명이 안 돼서 말입니다.”
“그럼 그렇게 믿으십시오.”
답변을 마치고 아딘은 수프를 마저 들었다.
라인하르트는 입을 다문 채 잠시 아딘을 바라보다 이내 그릇을 들어 수프와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수프를 다 먹은 아딘은 토리를 바라보며 제니스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잭슨 양.”
“네, 네?”
토리는 화들짝 놀라며 아딘을 바라봤다.
“아퐁어를 하시는 줄은 알지만, 제 동생이 듣지 않았으면 해서 이렇게 제니스어로 이야기합니다.”
“네, 네…….”
“잭슨 양의 아픔…… 제가 감히 경험해보지도 않고 모두 안다고 하면 교만이겠지만, 그래도 저는 잭슨 양이 겪은 고통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아딘의 말에 토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이 습해지는 것을 보며 아딘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무어라 위로한들, 잭슨 양의 상처가 모두 치유되는 데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다시는 잭슨 양이 아플 일이 없으실 겁니다.”
“…… 고맙습니다…….”
“제 볼일이 끝난 후, 잭슨 양을 브릴트까지 모시겠습니다. 그곳에서 배편으로 파라곤으로 돌아가시면 될 겁니다. 이제 가족들에게 가셔야죠.”
결국, 토리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연신 아딘에게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언니가 왜 우는 거예요?”
로제는 갑작스런 토리의 울음에 당황하며 아딘에게 물었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로제에게 이야기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했어. 그래서 기뻐서 우시는 거야.”
“아…….”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릇을 내려놓고 가만히 토리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내가 구한 거야. 희망도 없던 한 인간을 지옥의 구덩이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딘은 뿌듯함을 느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아딘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라인하르트는 이내 말없이 수프 국물을 쭉 들이켰다.
* * *
다가오는 폭풍이 호가르족과 베뭉가르족을 몰살시켰다.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으며, 그들이 살던 영역에는 풀 한 포기조차 남지 않았다.
소문은 삽시간에 카르기아족 전체로 퍼져 나갔다.
전투계급이나 비전투계급이나,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 공포에 잠식돼 갔고, 일부는 공황에 빠져 이상증세를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이 카르갈로 하여금 결심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예언자는 눈을 부릅뜬 채 카르갈을 바라봤다.
카르갈은 단호한 표정으로 자기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폭풍과 만나겠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오늘입니다. 조금만 지나면 폭풍은 우리의 영역을 지나갑니다. 그럼 다시 부족민들을 밖으로 풀어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공포에 잠식된 채 말이야.”
“……”
“이대로 폭풍이 지나간다 해도 부족민의 속에 새겨진 공포는 사라지지 않아. 그렇다면 그 공포를 없애기 위해선 공포와 직접 대면하는 수밖에 없어.”
카르갈의 말에 예언자는 항변할 수 없었다.
비록 그가 자신의 예언과 조언을 잘 따른다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이 본인의 뜻에 부합할 때나 그러는 것이었다.
“폭풍이 언제쯤 지나가지?”
카르갈의 물음에 예언자는 고개를 푹 숙인 후 대답했다.
“말이 5천 걸음을 걷기 전, 폭풍은 이곳에 도착합니다.”
“얼마 안 남았군. 일어나게. 염소를 데리고 가야겠어.”
“저, 저도 말입니까?”
예언자의 말에 카르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며 이야기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그대가 폭풍인지 아닌지를 식별해 줘야지.”
예언자는 사색이 된 얼굴로 카르갈을 바라봤다.
시커멓게 죽기 시작하는 예언자의 회색빛 얼굴을 바라보던 카르갈은 이내 움막을 빠져나왔다.
“염소를 준비해! 첫째는 나 대신 부족민들을 잘 통제하고, 둘째랑 셋째는 나랑 같이 간다. 빨리빨리. 시간이 없어.”
명령을 하달한 후 카르갈은 가만히 허공을 바라봤다.
저 멀리 북쪽 하늘에 가득한 먹구름은 서쪽으로 가던 방향을 틀어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면서도 카르갈은 의연해지려 노력했다.
그가 의연해야만 부족민들의 불안이 가라앉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 *
광명력 992년 7월 30일.
아딘의 마차는 렝고스 서북부에서 가장 큰 강인 메콩가 강 상류 수원지를 지나고 있었다.
상류 수원지라곤 하지만, 이제 갓 우기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던 만큼 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흐음…… 보자…… 이제 겨우 3분의 1 정도 지점을 통과했네. 아니지, 벌써라고 해야 하나? 한 달 정도를 예상했으니까…….’
생각보다 순조로운 여정은 전적으로 라인하르트의 존재와 로제의 냉방 덕분이었다.
‘만약 내가 직접 마차를 몰고 또 밥을 먹고 이랬어 봐. 로제가 냉방을 안 해줬어 봐. 지금 3분의 1은커녕 오히려 원래 계획보다 더 늦어졌을지도 모르지.’
렝고스의 여름 더위에 사람이나 말이나 모두 영향을 받지 않으니, 체력적으로 지칠 일도 거의 없었다.
그것이 여정을 예상보다 앞당겼다 생각하며 아딘은 두루마리를 말아 품에 넣었다.
‘네르갈의 시험…… 도대체 뭘까?’
불칸의 시험은 그를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오만하고 사악한 자가 밑바닥으로 떨어져 갱생한 후 다시 위로 올라서려는 노력.
그것을 자신은 지지하고 응원한다며, 그래서 아딘이 자신을 만족시켰다며 불칸은 자신의 신물을 선뜻 아딘에게 하사했다.
‘네르갈도 그렇게 좀 쉽게 주려나?’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딘은 가만히 팔짱을 꼈다.
‘응?’
그때, 커다란 갈대밭이 들썩이더니 한 무리의 오크가 길가에 나타났다.
“어떻게 할까요?”
라인하르트의 물음에 아딘은 그에게 마차를 세우라 명령했다.
곧 마차가 섰고, 오크 무리는 자기들끼리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가장 덩치가 큰 녹색종 오크가 염소를 품에 안은 채 천천히 마차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라인하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연 로제가 적개심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아딘은 신중한 눈빛으로 가만히 염소를 든 오크를 바라봤다.
오크는 마차로부터 5m 정도 거리를 둔 채 멈춰섰다.
그리곤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나는 카르기아족의 긍지를 지키는 족장, 카르갈이다.”
녹색종 오크어로, 카르갈은 아딘에게 인사했다.
아딘은 인상을 찌푸리며 카르갈을 바라보았다.
“그대, 황금빛 폭풍은 우리의 언어를 할 줄 안다고 들었다. 나는 카르갈이다. 나는 그대에게 평화를 이야기하고자 찾아왔다.”
카르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용기 있게 앞장섰지만, 막상 아딘의 앞에 서자 마음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두려움을 잊기 위해 카르갈은 더 우렁차게 외쳤다.
“나는 카르기아족의 긍지를 지키는 족장, 카르갈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딘은 조심스럽게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그리곤 두루마리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다시 그것을 품에 집어 넣고는 카르갈을 바라보며 외쳤다.
“나는…… 아딘이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