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초원의 문명 (4)
녹색종 오크 호가르족은 서북부 오크 부족들 사이에서도 경원시되는 존재였다.
문명 수준은 신석기 시대에 머물고 있다지만, 오크들도 지킬 것은 지키는 존재였다.
하지만 호가르족에게 그런 건 없었다.
무리에서 도태돼 평생 여자를 볼 일이 없는 비전투계급 오크들을 위해 호가르족 전사들은 인간 여성을 납치했다.
인간 여성이 비전투계급 오크의 원초적 본능을 충족시켜주는 동안, 함께 납치된 인간 남성은 산 채로 오크들에게 뜯어 먹혔다.
먹을 인간이 지나다니지 않으면 심지어 그들은 같은 오크마저도 납치해 잡아먹곤 했다.
잭 존슨은 그런 호가르족 사회에서 인육을 공급하는 첨병이었다.
철기로 무장한 인간은 석기로 무장한 오크에게 상대하기 버거운 적이었지만, 잭 존슨이 오크 사냥꾼들의 매복지로 인간을 유인하고, 미처 그들이 대비하지 못하고 있을 때 오크들이 기습하면 큰 피해 없이 쉽게 사냥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호가르족은 지난 2년간 인육을 공급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잭 존슨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의 외로움을 달래줄 인간 여자의 공급이었다.
<특별히 잭 존슨은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 출신의 여자들을 자신의 노예로 갖길 원했고, 호가르의 족장 살사카르는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
평민 출신에 탐험가를 자칭하는 한량이었던 잭 존슨에게 귀한 집안 여자는 그의 억눌린 욕망과 피해의식을 쏟아낼 대상이었다.
<조금이라도 여자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호가르족이 산 채로 사람을 먹는 모습과 비전투계급 오크 남성에게……>
두루마리가 전해주는 잭 존슨의 범죄 행위.
공황상태에 빠져 로제의 품에서 바들바들 떠는 토리를 대신해 두루마리를 통해 잭 존슨의 죄악을 마차 안에서 홀로 읽고 있던 아딘은 굉장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특별히 자신과 같은 파라곤 출신이자 대대로 파라곤 시장 자리를 지낸 잭슨 가문의 일원인 토리 잭슨에게는 학대의 정도가 심해서 비전투계급 오크 남성의……>
결국, 아딘은 두루마리를 읽는 것을 포기했다.
소설을 쓰기 위해 많은 영화를 봤고, 많은 이야기를 접했다지만, 빙의한 이후 여러 사람을 죽이면서 신경이 다소 무뎌졌다지만, 두루마리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도저히 읽어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아딘은 두루마리를 말아 품에 넣고는 마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잭 존슨을 향해 다가갔다.
[빠악-!]
아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잭 존슨의 안면을 밟고, 밟고 계속해서 밟을 뿐이었다.
잭 존슨은 더 이상 신음소리를 낼 힘도 없는지 아딘의 발길질에 입술이 터지고 치아가 부러지는 와중에도 몸부림만 칠 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잭 존슨을 구타하던 아딘은 마지막으로 그의 복부를 힘껏 걷어찬 후 얼굴에 가래침을 뱉었다.
분노한 아딘의 모습을 로제와 라인하르트 그리고 토리는 입을 다문 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딘은 이내 시선을 토리에게로 돌렸다.
공포에 질린 채 발작적으로 떨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던 아딘은 땅바닥에 굴러다니던 돌도끼를 집어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 오라버니?”
로제가 화들짝 놀랐다.
아딘은 로제에게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준 후 토리에게 돌도끼를 손잡이 방향으로 건네며 이야기했다.
“당신을 학대한 인간. 그 처분,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토리가 떨리는 눈으로 아딘을 바라봤다.
아딘은 무심한 표정으로 토리를 내려다봤다.
토리의 시선이 돌도끼로 향했다가, 잭 존슨으로 향했다.
순간 그녀의 눈앞으로 그녀가 보았던 끔찍한 장면들이 지나갔다.
산 사람을, 그 사람이 직접 보는 와중에 내장부터 발라 먹던 오크들의 흉폭함.
여자의 하반신과 하복부가 뭉개지고 으깨질 때까지 이어지던 비전투계급 오크들의 광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보여주며, 자신을 향해 이야기하던 잭 존슨의 능글맞은 표정까지.
“내 말에 복종하세요. 오늘은 여기까지지만, 다음엔 당신도 저렇게 됩니다. 아시겠어요? 잭슨 아가씨?”
토리가 온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물 뒤로 분노가, 억누르다 못해 광기로까지 변한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으아아아아-!”
토리는 그대로 아딘으로부터 돌도끼를 받아든 채 잭 존슨에게 달려갔다.
로제가 마법으로 그녀의 족쇄를 끊어준 탓에 그녀의 발걸음은 굉장히 가벼웠다.
[뻐억-!]
제대로 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해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그녀의 근육이었지만, 호가르족 전사계급 오크가 쓰던 돌도끼는 강력했다.
돌도끼는 그대로 잭 존슨의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때렸고, 잭 존슨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즉사했다.
“으아아아아-!”
[뻐억-! 뻐억-! 뻐억-! 뻐억-!]
하지만 그녀는 잭 존슨의 머리를 계속해서 내려쳤다.
그가 시체가 된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머리가 더 이상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어질 때까지, 돌도끼의 돌날 부분이 부서질 때까지, 그녀는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 * *
호가르족의 영역에 불이 붙었다.
불은 순식간에 움막을 집어삼켰고, 마을 전체를 휘감았다.
서북부 녹색종 오크 사이에서 야만족으로 취급받던, 마주치는 것조차도 기피되던 존재인 호가르족의 흔적은 그렇게 동족을 배신한 인간의 시체와 함께 불길 속에서 산화됐다.
“보니까 좀 있다 비가 오겠네. 저기 먹구름이 이쪽으로 몰려오잖아. 우린 그만 가던 길이나 마저 갑시다.”
그리고 아딘의 마차는 다시 목적지인 네르갈의 신전을 향해 출발했다.
물론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오늘 저녁은 가젤 한 마리 잡아서 수프를 끓여 먹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저 여자분이 몸이 허약하신 것 같아 그게 좋지 싶은데 말입니다.”
우선 아딘을 대하는 라인하르트의 태도가 달라졌다.
말투, 단어 선정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그렇게 합시다.”
썩 나쁘진 않았기에 아딘도 꽤나 만족할 수 있었다.
“언니, 괜찮아요. 이제 저하구 오라버니가 지켜줄게요.”
그리고 새 멤버가 추가됐다는 것이었다.
다시 뵌가르트로 돌아가자니 이미 일주일이나 되는 거리를 이동했고, 그렇다고 초원에 내버려 두고 갈 수도 없었기에 아딘은 토리도 일행헤 합류시켰다.
덕분에 아딘은 마차 내부를 로제와 토리에게 양보했고, 본인은 마차 지붕 위에 올라가 초원을 바라보며 이동하게 됐다.
“경치 좋다.”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아프리카 초원을 상상하고 만든 지역.
마치 세렝게티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프리카 초원과 똑 빼닮은 렝고스의 풍경을 구경하며 아딘은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우에에엑-!]
가젤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도망치고 있었다.
“잡아! 잡아!”
“도망 못 가게 막아!”
그 뒤를 녹색종 오크 남성 다섯이 나무 몽둥이를 든 채 따라가고 있었다.
‘사냥?’
사냥이라기에는 오크들의 상태가 비실비실했다.
물론 인간과 비교했을 때는, 라인하르트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근육을 자랑하긴 했지만, 오크 사회에서 저 정도 근육은 근육으로 취급도 받지 못했다.
아딘은 라인하르트에게 멈추라 한 후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비전투계급 오크 남성은 평생 여자의 손조차 잡아보지 못하는 것이 오크 사회의 법칙이다.>
<욕구 불만에 시달리는 비전투계급 오크 남성은 그것을 가젤이나 영양 같은 초원의 초식동물들을 학대하는 것으로 해소한다.>
아딘은 피식 웃으며 두루마리를 도로 말아 넣었다.
‘이건 내가 만든 설정이 아닌데……. 하긴 오크에 대한 설정 자체가 미완성이긴 했지. 맥거핀까진 아니었다만…….’
김현수의 소설 영웅일대기는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가 인간 세계에서 위대한 영웅이 돼 가는 일대기를 다룬 대하 판타지 소설이다.
아예 맥거핀으로 남겨두진 않았지만, 오크와 엘프의 경우에는 개별적으로 특이한 존재 한둘이 등장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김현수도 그것들에 대해 구체적인 설정을 짜두지는 않았다.
그나마 엘프의 경우 3대 신물에 대한 설정을 짜느라 약간은 구체적인 설정을 넣어두긴 했다지만, 오크의 경우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인간 및 엘프와 공통 조상을 가진, 인류의 친척뻘 되는 존재.
신석기 시대 정도의 문명 속에서 야만적인 체제를 구가하며 부족 단위로 살아가는 전투 종족.
그게 오크에 대한 설정의 전부였다.
그러므로 지금 아딘이 보고 있는, 비전투계급 오크 남성의 가젤 학대는 그가 만든 것이 아니란 이야기였다.
‘저것들 지나가면 지나가자.’
호가르족의 경우 자신들을 건드리기도 했고, 그들의 행태가 괘씸했기에 몰살시켰다.
하지만 지금 아딘의 눈앞을 지나는 것들은 구태여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어디까지나 호가르족에게 분노했던 거지, 오크란 종 자체에게 분노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건 저것들도 내가 만든 거잖아. 뭐 원형은 다른 사람 거긴 하다만, 그래도 이것저것 차별화된 설정을 넣으려 노력은 했으니까.’
그렇게 아딘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인간?”
가젤을 쫓던 오크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아딘의 마차를 바라봤다.
“오라버니. 왜 멈춘 거예요?”
그때, 로제가 문을 열고 상반신을 내밀어 아딘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것을 본 오크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입맛을 다시며 슬금슬금 마차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 새끼들이?!’
그 모습을 본 아딘은 머리 끝까지 열이 뻗쳐 오는 것을 느꼈다.
‘감히 로제를 보고 입맛을 다셔?’
그대로 아딘은 마법 주머니에서 메이스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곧장 불칸의 갑옷을 장착한 후 마차 지붕에서 점프해 오크들 앞에 착지했다.
“감히 누굴 보고 입맛을 다시는 거야!”
서북부 녹색종 오크어로 고함지르며 아딘은 쌍 메이스를 휘둘러 순식간에 오크 두 놈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헉-!”
“저, 전사!”
[뻑-! 뻑-!]
그 모습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던 다른 두 오크의 정수리를 아딘은 동시에 쌍 메이스로 내려쳐 죽여버렸다.
“그냥 가던 길이나 갈 것이지 감히…….”
오크의 시체를 바라보던 아딘의 시선이 아직 살아 있는 다른 오크에게로 향했다.
다섯 오크 중 죽은 네 놈이 모두 고개를 끄덕일 때 유일하게 고개를 저은 놈이었다.
“가라.”
아딘은 놈을 보내주었다.
놈은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부리나케 오던 방향으로 도로 달려갔다.
아딘은 갑옷을 해체한 후 메이스를 도로 마법 주머니 안에 집어넣은 뒤 터덜터덜 마차로 돌아왔다.
“왜 살려두신 거예요?”
로제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아딘에게 물었다.
“가서 자기 부족원들을 이끌고 오지 않겠습니까?”
라인하르트도 조심스럽게 아딘에게 물었다.
아딘은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며 이야기했다.
“어차피 저놈들은 오크 무리 내에서 최하층 계급이야. 무리에서 발언권이 없다 이거지. 저런 놈들을 좀 죽였다고 설마 인간을 급습하겠어? 오크들도 머리가 있는데?”
아딘의 말에 로제와 라인하르트는 서로 다른 의미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쁜 것들은 다 죽여야 하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자기네 동족이 당했는데…….”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아딘은 호언장담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말어들.”
그리고 그는 다시 마차 지붕 위로 올라갔고, 그의 마차는 오크들의 시체를 밟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30분 후.
“저놈들이다! 저놈들이다!”
“쿠어어어어-!”
“다 죽여버려!”
아딘의 호언장담은 허언이 돼 버렸다.
족히 300은 돼 보이는, 30분 전 아딘이 죽인 오크들보다 못해도 2배 이상은 더 큰 근육을 지닌 오크 전사들이 돌도끼와 돌칼 등을 든 채 얼룩말을 타고 몰려오고 있었다.
“흠흠. 거 참, 의리 하나는 인정해줄 만하네.”
아딘은 자신을 향한 라인하르트의 시선에 계면쩍어하며 마법 주머니에서 검을 뽑은 다음 불칸의 갑옷을 입었다.
“로제. 내가 책임지고 다 처리할 테니까, 넌 마차 좀 지켜줘.”
그리고 아딘은 마차 지붕 위에서 마차를 향해 달려오는 오크 기병대를 향해 도약했다.
‘근데 얼룩말은 어떻게 길들인 거야?’
사소한 궁금증과 함께 아딘은 세 번째 오크와의 전투를 시작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