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68)
아리나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재빨리 뒤로 돌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명확했다. 내가 입장했던 거대한 문이 반파되어 있었으니까.
그 근처에는 신관들이 경악한 얼굴로 쓰러진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교황이 지하금지로 보냈던 투를리온이라는 2급 성기사였다.
젠장, 역시 늦었나 보네.
왠지 이렇게 될 것 같았던 기분이라 그리 놀랍지는 않다. 내가 뭔들 잘 풀려 본 적이 있어야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살 난 금속의 잔해를 밟으며 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금발에 신관 복장과 어울리지 않는 어딘가 퇴폐적인 인상. 역시 추기경의 아들이 맞았다. 살바토르. 그는 회장에 입장해 주위를 둘러보더니, 입가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좋은 날 분위기가 왜 이런 겁니까? 제가 오면 안 될 곳이라도 왔나 보지요?”
녀석은 그렇게 말하더니 옆을 향해 손을 휙,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인간의 힘으론 꿈쩍도 안 했을 금속 벽이 쾅!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의도가 분명한 자기과시.
얼마 전 보았을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딴판이다. 나대면서도 약간 주눅 든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자신감이 넘친다 해야 하나.
하긴, 견습 신관 전전하던 녀석이 재앙의 힘을 얻었으니 전지전능해진 기분이 들기는 할 거다.
하지만 이곳은 대륙 제일 교단인 키탄의 본청. 그것도 성녀의 임명식이라는 성대한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던 참이다.
여기 모인 신관과 성기사는 어디 내놔도 최상위권에 위치할 실력자들에, 심지어 숫자도 많다. 주교급이나 부단장급조차 일개 신관, 성기사처럼 취급될 정도로.
아무리 키탄 교 금지에 봉인되어 있던 녀석이 인간에게 기생해 힘을 주는 형태의 재앙이라고는 하지만…… 저런 녀석을 숙주로 삼은 이상 끽해야 2급이 한계일 텐데.
대체 저건 무슨 자신감이지?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는데, 회장에 있던 2급 성기사 둘이 앞으로 나섰다. 3급 이하는 그 주위를 둘러싸 신관들을 보호하는 진형을 취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을 텐데도 정확한 판단에 신속한 행동이다.
연유야 어쨌든, 2급인 투를리온이 당한 이상 그 아래로는 상대가 안 된다 생각한 거겠지.
2급 중 하나가 검을 살바토르에게 겨누고 말했다.
“일단 묻지만…… 투를리온 경을 저렇게 만든 것이 설마 너냐?”
힘에 심취한 듯 히죽거리며 주먹을 보고 있던 살바토르가 그 말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본인에게 겨눠진 검을 보더니 과장된 모습으로 양팔을 크게 벌렸다.
“이런, 프란시스 경. 항상 저에게 망나니니 쓰레기니 하시더니 지금은 또 그러지 않으시는군요. 자리 때문입니까? 아니면…….”
살바토르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경도 지금의 제가 두려우신 겁니까?”
“……네놈이 투를리온 경을 쓰러뜨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미친 것 하나는 확실하구나.”
성기사는 인상을 확 찌푸린 채 기운을 끌어 올렸다.
“추기경님의 체면을 보아서 순순히 투항하면 험한 꼴은 보이지 않도록 해 주겠다. 어쩔 테냐?”
교단의 지휘부가 다 모인 자리. 원래는 이런 곳에서 저만한 소란을 일으켰다는 것만으로 즉결 처형까지 가능할 거다.
추기경의 체면을 봐준다는 성기사의 발언은 빈말이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그런 관대한 조치에도 살바토르는 태연히 비웃음을 날릴 뿐이었다.
“프란시스 경. 뭔가 한 가지 착각하고 계시군요.”
“무엇을 말이지?”
“배려란 말이지요…….”
탓, 살바토르가 발을 박차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약자가 강자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살바토르의 몸이 빠르게 성기사를 향해 돌진했다. 엉성한 동작이긴 하나, 분명 2급과 맞먹을 만한 속도였다.
하지만 성기사 역시 2급에 달하는 실력자. 그것도 꼼수 없이 오직 본인의 노력만으로 그 경지에 오른 사람이었다.
무능력자였던 녀석이 하루아침에 백팔십도 달라진 것이 당황스러울 만도 한데, 성기사는 침착하게 검을 들어 올려 충격을 대비했다.
그동안 쌓아 온 경험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의 대응.
아마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가 무난하게 살바토르를 막아 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검을 드는 폼만 보아도 알겠다. 이제 나름 2급과도 붙을 만하다 여겼지만, 저 성기사는 명백히 나보다 위였다.
분명 2급 중에서도 상위권에 위치한 사람이겠지.
비슷한 기운을 가지게 되었다 해서 동일한 힘을 가지게 되는 건 아니라는 소리다.
덕분에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구경하는데, 신관들의 치료를 받고 있던 2급 성기사 투를리온이 정신을 차렸는지 다급하게 소리쳤다.
“프란시스 경! 그자와 정면으로 검을 맞대면 안 됩니다!”
그의 외침은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부터 프란시스라는 성기사는 이미 저 멀리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콰아아아앙!
“…….”
회장에 싸늘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전까진 놀라긴 했어도 금방 끝날 순간의 소동을 보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보다 훨씬 심각하다.
반쯤 초상집 같은 분위기라 해야 할까.
그럴 수밖에 없긴 할 것이다. 총 세 명 있는 2급 중 둘이 녀석에게 나가떨어진 셈이니까.
이제는 본인들 안위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직시한 거겠지.
그때, 살바토르가 멀리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는 프란시스를 보더니 히죽 웃으며 외쳤다.
“평상시 그렇게 무시하던 나한테 당한 소감이 어떠신가? 괴롭나? 자괴감이 드나? 말해 봐! 그동안 쌓아 온 노력이 배신당한 심정이 어떤지! 죽고 싶은 기분이지? 그게 항상 내가 느끼고 있던 감정이야!”
흡사 광기에 가까운 목소리.
뭔가 소년 만화 악역 캐릭터라도 보는 느낌이라 조금 당황스럽다. 원래부터 저랬던 거 같기도 하고.
겨우 얼굴 두 번 본 게 다인데 뭐 아는 척하기도 좀 그렇긴 하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굳은 얼굴의 교황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교황님, 혹시 제가 키탄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상황에 그런 게 왜 궁금한 것이오?”
“저와 상관없는 일에 나서는데 보상도 안 받을 수는 없으니까요.”
내 말에 교황이 굳어 있던 얼굴을 풀었다. 안도가 아니라 황당함 때문이었다.
“설마 저 녀석을 직접 제지할 생각이오?”
“만남 시간을 늘려 준다면요.”
“……재능이 대단한 것은 알고 있으나, 그대는 아직 젊소.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게 옳은 선택일 것이오.”
3급인 거 알고 있으니 알아서 짜지라는 내용을 고상하게 표현한 거다.
“당장은 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잠시 뒤면 교단 최고 기사가 도착할 거요. 그때까지만 힘을 합쳐 막으면…….”
“그때까지 못 버틸 겁니다.”
단호하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녀석의 능력에 대항할 수 있는 건 아마 제가 유일할 거거든요.”
“그게 무슨…….”
교황이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대신 앞으로 발을 박차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제안은 승낙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 * *
처음에는 대체 살바토르가 어떻게 이긴 건가 싶었다. 같은 2급의 경지래도 녀석과 성기사의 수준은 아득한 차이가 났으니까. 하늘이 꺼졌다 해도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는 소리다.
그렇다고 힘을 숨기고 있었다 하자니 녀석의 기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가던 그때.
내 머릿속의 이런저런 설정을 종합해 나온 해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본인이 강해진 게 아니라면, 상대가 약해지게 만든 거겠지.
지하 금지의 기생형 재앙은 숙주의 신체 수준에 맞춰 실력을 증폭시켜 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재앙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이야 신관의 버프로도 가능하니까.
기생형 재앙, 그러니까 ‘패러사이트’는 숙주의 정신을 바꾼다. 인간에게 헌신의 감정을 가지고 있던 성인이라도 정반대의 증오심을 갖게 만드는 거다.
하나, 그건 오히려 나은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애초부터 부정적인 정신을 갖고 있던 사람에게 기생하였을 때다.
‘패러사이트’가 하는 것은 숙주의 정신을 조종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근본적인 수준으로 뒤바꿔 버리는 것이다.
사람을 개조한다는 것이 아무리 재앙이라도 그렇게 쉬울 리가 없다. 당연히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들어간다.
한데, 숙주에게 그런 과정이 필요 없어진다면 어떨까?
패러사이트는 그 순간 원래 사용되었어야 할 막대한 에너지를 숙주의 능력을 개방하는 데 사용한다. 그리고 그 방향성은 당사자가 가지고 있던 욕망.
하늘을 날고 싶다 생각하면 날개를 달아 주고, 바다로 들어가 살고 싶다 생각하면 아가미를 달아 주고 하는 식이다.
아마 살바토르가 가지고 있던 욕망은……. 다른 사람들이 전부 자기 아래 위치했으면 좋겠다, 이런 거였겠지.
욕망조차 본인의 향상심이 아닌 건 둘째 치고, 굉장히 효율적인 능력이기는 하다.
만약 직접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었으면 실력에 밀려 성기사를 이길 수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완전히 판단이 끝났을 즈음. 내 몸은 회장 중앙에 착지했다.
아무도 꼼짝 않고 있었을 때라 자연히 눈에 띄었을 거다. 장내의 시선들이 전부 내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살바토르의 것을 포함해서.
녀석은 광기 어린 모습으로 웃고 있다가, 나를 보고는 웃음을 뚝 멈췄다.
“너! 그래! 네 녀석도 있었지!”
“사운드 좀 줄여라. 안 그래도 말 많은 녀석이 소리까지 지르니 계속 머리 울리잖아.”
살바토르는 태연한 내 대답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본인에게 빌기라도 할 줄 알았나 보다.
하지만 녀석은 오히려 더 재밌게 됐다고 생각한 건지 다시 히죽 웃었다.
“역시! 너같이 재능 넘치는 놈들은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어! 어때? 세상이 전부 네 거 같지? 그럴 거야. 주위에서는 다 같이 떠받들어 주고, 칭송해 줬을 테니까! 부모님한테도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겠지!”
“…….”
이 새끼, 혹시 내가 레이튼 고아 출신이라는 거 모르나?
아니, 알면서 한 소리일 수도 있겠다. 고도의 정신 공격 이런 거지.
나는 지구에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나서야 차분히 대답할 수 있었다.
“솔직히 나도 내가 재능 쩌는 건 인정하는데, 그것만으로 이렇게 된 건 아니다. 아마 네가 노력한 것보다 만 배는 더 고생했을걸.”
“그렇겠지! 재능이 있었을 테니까! 나도 너 같은 재능만 있었어도……!”
“글쎄. 네가 나만큼 재능 있었어도 딱히 노력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소리를 할 거면 못해도 정식 신관 정도는 따 놓고 했어야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메리트 있는 신분을 가지고 태어나서 견습 신관에 머물고 있는 녀석이 할 말은 아니다.
하지만 살바토르는 내 진지한 충고에 분노한 모습이었다. 녀석은 괴성을 토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감히! 이제는 내 아래인 쓰레기가!”
이성을 잃어서인지 아니면 날 상대론 그것도 필요 없다고 해서인진 잘 모르겠지만, 약화를 거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만약 걸었어도 별 상관은 없었겠지만.
돌진을 살짝 피한 뒤, 녀석의 뒤통수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콰아아앙!
아까 프란시스가 날아갔을 때와 비슷한 굉음이 울려 퍼지고. 나를 보는 시선들에 경악의 감정이 담겼다.
나는 다리를 살짝 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누가 아래인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