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11)
둥지 6개가 정리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하나하나 떼 놓고 보면 애초부터 토벌대와 비교될 전력이 아니지 않나.
이쪽은 진입하는 4급만 백 명인데, 저쪽은 5급이 백 마리. 사실 이것만 봐도 결과는 나와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심지어 피해도 경미하다. 방심했다가 중상을 입은 기사가 몇 있기는 했으나, 챙겨 온 포션으로 금세 회복했다. 덕분에 사망자는 제로.
아무리 훈련받은 기사들이라고는 하나 슬슬 방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긴 하다. 그게 아무리 가장 큰 둥지, 하이브를 눈앞에 둔 상태라고 해도 말이다.
“…….”
나는 늘어지게 하품하고 있는 기사들을 힐끗 쳐다봤다.
반복된 싸움으로 컨디션이 가장 저하됐을 녀석들이 가장 큰 전투를 앞두고 여유를 부리다니.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저 모습에 호통을 쳐야 할 2급들마저 태평한 기색이라는 거다.
지휘해야 할 인간들까지 그러고 있으니 기강이 잡힐 리가 없지.
첫 둥지 진입 때까지만 해도 나름 믿음직스러워 보였건만…… 상황 조금 술술 풀린다고 저 꼴이다.
속으로 살짝 혀를 차는데, 데이크가 멋쩍게 웃으며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2급 분들이 계시는데 제가 나서서 뭐라 하기는 좀…….”
아무래도 내 표정이 안 좋은가 보다. 이렇게 타이밍 좋게 와서 변명하는 거 보면.
하지만 사실 난 기사들이 저러고 있는 거에 그다지 큰 유감은 없었다.
별로 내 알 바가 아니기 때문도 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원작이다.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저 발록들 때문에 기사 300여 명이 죽는다.
지금처럼 200명이 추가된 상황이 아니니, 사실상 파견된 인원 전부 전멸했다는 소리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뭐…….
아무리 소풍 나온 분위기로 방심하고 있다 해도 그 절반 정도는 살지 않겠나.
자기 방심으로 죽는 게 내 탓은 아니니까.
데이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다들 듣도 보도 못 한 몬스터라 처음엔 긴장을 좀 한 모양인데, 저희 전력이 너무 압도적이다 보니 금세 풀린 것 같습니다.”
“2급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말은 해 뒀나?”
“빈센트 경께서 출발 전 언질은 주셨습니다만…….”
녀석은 기사들을 둘러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상태를 보면 아무도 믿지 않고 있나 보군요.”
“…….”
이해는 간다. 몬스터와 마물의 구분법도 잘 모르는 시기니까.
걸어 다니는 재앙이란 거창한 칭호를 가진 오우거가 기껏해야 5급 수준.
상황이 이러니 갑자기 2급의 마물이 있다고 해서 바로 납득하긴 힘들 거다. 심지어 그 정보도 문헌에 적혀 있는 게 고작 아닌가.
그래도 3급짜리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했는데, 그 숫자가 너무 적었나?
차라리 한 백 마리쯤 튀어나와서 정신 바짝 들도록 해 주는 게 더 나았을까 싶기도 하고. 그랬으면 사망자가 원작만큼 나오긴 했겠지만.
내심 한숨을 쉬며 손가락으로 2급 기사들을 가리켰다. 아무리 그래도 짧은 충고 정도는 해 두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안에 있는 2급 발록은 총 두 마리다. 적어도 저 둘에겐 일러두는 게 좋겠지. 괜히 방심하다 봉변당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얘기한 그대로다.”
데이크가 놀란 얼굴로 내 쪽을 쳐다봤다.
“설마 이 거리에서 안쪽의 전력을 알 수가 있는 겁니까?”
“대강은.”
“……그게 대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 거죠?”
“스승님의 기술 중 하나다.”
사실 아이언은 그런 거 못 쓴다. 아니, 정확히는 안 쓴다. 어차피 상대가 누구든 상관 없다 생각하는 인간이라. 미리 알아 봤자 뭐 하겠냐 이거지.
하지만 그에 대해 잘 모르는 데이크에겐 나름 그럴듯하게 들렸나 보다.
녀석은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제국 타도의 일등 공신답군요. 하긴, 전쟁에서 그 정도의 업적을 세웠는데 그런 기술 하나쯤 있어도 이상하진 않죠.”
……아이언이 세운 업적은 그냥 모조리 깨부순 거 하나뿐인데. 거기에 무슨 신묘한 기교가 들어간 적은 없다. 어디까지나 원작과 같다면 말이지만.
그러고 보니 조금 궁금해졌다. 그전에도 몇 번 얘가 나한테 아이언에 대해 질문하긴 했는데…… 혹시 팬인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물어봤다.
“너는 스승님에 대해서 좀 알고 있나?”
“그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지요.”
진짜 궁금한 건 어떻게 알고 있느냔 건데.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어떤 얘기를 들은 거지?”
“그야 그 누구 상대로든 지지 않는 최강의 무인이란 평가지요. 성격이 조금 특이하시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
그게 특이하단 말로 커버되는 게 아닐 텐데?
아이언에 대한 소문은 상당히 편향적인지라 보통 한쪽으로 치우쳐 아는 경우가 많았다.
그냥 또라이 같은 인간이라 생각하거나, 혹은 현세에 강림한 무신처럼 인식하거나.
아무래도 데이크는 후자인가 보다.
녀석은 혼자서 뭔가 납득하고는 고개를 다시 두어 번 주억거렸다.
“아무튼, 그분의 기술이라면 저분들도 바로 납득하실 겁니다. 제가 가서 설명드리죠.”
그리곤 바로 몸을 돌려 2급 기사들에게 향한다.
나는 그 뒷모습을 조금 뻘쭘한 얼굴로 바라봤다. 저렇게까지 쉽게 믿으니 오히려 좀 미안한데.
그래도 아이언의 이름을 판 게 효과는 있었다. 데이크의 이야기를 들은 2급 둘이 조금은 긴장한 얼굴로 기강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다고 한 번 풀린 분위기가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하품할 때 입은 가리기 시작했다
아까 장면을 보고 나니 저 정돈 이제 선녀 같다.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뭐.
그쪽을 일별하고 하이브로 시선을 돌렸다. 벽을 뚫고 코드가 투시된다.
2급 발록이 둘, 3급이 서른, 4급이 쉰, 5급이 백.
고등급 비율이 높은 걸 보니 봉인되기 전에 태어난 녀석일 거다. 바포메트가 직접 데리고 다니는 몇 놈 빼면 저게 마지막이라 봐도 무방하겠지.
일단 전력을 비교해 보면 우리 쪽이 더 우세하긴 하다. 3급 이상 수는 똑같다지만, 저놈들은 둥지 안에선 최대 장점인 날개를 사용할 수 없으니까.
어느 정도 고생은 해도 기사단이 무난하게 이길 수 있을 거란 소리다. 어디까지나 별일이 없을 때의 얘기긴 하지만.
속으로 그런 판단을 내리고 있는데, 2급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둥지를 가리켰다.
“저게 바로 하이브다. 딱 봐도 여태까지 봤던 것들보다 몇 배는 커 보이지 않나?”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즉, 마지막으로 저것만 해치우면 사실상 우리 임무도 끝이라는 소리다. 그런데도 설마 이제 와서 방심하다 멍청하게 죽어 버릴 놈은 없겠지?”
말은 참 지금 상황에 걸맞긴 한데…… 문제는 그 얘길 하고 있는 당사자조차 느긋한 표정이라는 거다. 저런 건 그냥 형식적인 인사나 다를 게 없다.
실제로 그 말을 들은 기사들도 전혀 긴장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상급자 기분 변화에 가장 민감할 군인들이 말이다.
2급은 그 뒤로도 연설을 계속하더니,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나를 힐끗거렸다.
“아, 참고로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나, 안에 2급의 발록이 두 마리 있다는 제보가 있다. 일단 주의하도록.”
그리고 끝이었다. 무언가 덧붙이지도 않은 채 2급은 그대로 하이브로 진입했다. 기사들도 아리송한 얼굴로 그 뒤를 따른다.
나는 그걸 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조금은 긴장했나 싶었는데, 그냥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2급 기사쯤 되면 그 자부심이나 자긍심이 보통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야 당연한 일이긴 하다.
2급은 기사 지망생 천 명이 있으면 그중 한 명 정도만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한 경지.
그동안 쌓아 온 세월부터 노력까지. 자부심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는 위치인 것이다.
그런 와중에 그냥 밥 먹고 잠만 푹 자다 보면 2급이 되는 몬스터가 있다면, 어디 그걸 인정하기가 쉽겠는가?
내 공로가 있으니 들어주는 척이나 한 거지, 그런 것도 없었다면 저런 시늉도 안 했을 거다.
지금 와서 또 한마디 해 봤자 잔소리밖에 안 되겠지. 나도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가장 앞서가던 2급이 통로 중간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상하군. 다른 둥지에서는 이쯤 되면 진작 공격해 왔는데…….”
그러더니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방심하고 있다고는 하나 뇌를 어디다 빼놓고 온 건 아닌가 본데.
데이크가 그 틈을 타 내게 다가왔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요. 혹시 지금도 녀석들 탐지 가능하십니까?”
그래도 내 말 믿어 주는 건 얘밖에 없네.
나는 무심한 얼굴로 앞쪽을 가리켰다.
“중앙에 큰 공동이 있다. 전부 거기에 모여 있군.”
“공동 말입니까?”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길래 살짝 고개를 끄덕여 줬다.
“높이가 꽤 되는 공간이다. 안에서 몇 마리 정도는 날 수 있을 정도로. 일부러 저 장소를 고른 모양이다.”
“……몬스터가 전략을 짰다는 소립니까? 이성 없는 놈들인 줄 알았습니다만.”
“그것도 2급쯤 되면 다르지. 저만큼 자라려면 못해도 수백 년은 살아야 한다. 그동안 본인에게 유리한 싸움터 고르는 법 정도는 익혔을 거다.”
“발록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나도 문헌을 봤으니까.”
데이크는 뭔가 더 묻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거기서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아마 지금 상황에 할 얘긴 아니라고 생각한 거겠지.
그때, 우리 대화를 아닌 척 듣고 있던 2급이 다시 묵묵하게 앞장서기 시작했다.
내 얘기에 납득을 한 건지, 또 헛소리라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으론 전자였으면 좋긴 하겠는데.
뭐,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겠다만.
어깨를 으쓱이고 나도 앞으로 걸어 나갔다.
* * *
“발록이다!”
내 생각대로, 공동은 그리 머지않아 나왔다. 안은 벌집을 사방으로 둘러싸 놓은 형태로 생겼는데, 구멍 하나하나마다 발록이 몸을 내밀고 그르륵 거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구멍이 아닌 하늘을 날아다니는 놈 두 마리도 존재했다. 기사들이 녀석들을 보며 경악성을 토해 냈다.
“2, 2급이잖아?”
“진짜로 몬스터가 2급이 되는 게 가능하다고……?”
2급 기사 둘이 나를 놀란 기색으로 돌아봤다. 이제 와서 그럼 뭐 하게.
나는 그냥 검을 꺼내 들며 무심히 말했다.
“놈들의 약점은 머리다. 목을 베면 죽지.”
뭐 어쩌란 거냐는 표정들이다. 확실히, 설명이 부족하긴 했네.
“목 위로는 비교적 약한 편이란 얘기다. 아래 단계 상대할 때는 몰라도 상관없었겠지만, 이제는 필요하겠지?”
그제야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검을 들어 발록에게 겨눈다. 아직도 납득하기 힘든지 놀란 얼굴들이긴 하지만, 두려움의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본인들의 실력을 믿는단 뜻이겠지.
나쁜 반응은 아니다. 나도 피식 웃으며 3급 발록들이 많은 곳으로 몸을 향했다.
누군지 모를 기사가 가장 먼저 발을 박차고…….
―그르아아아아!
싸움이 시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