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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88화 (88/225)

너의 코드가 보여 (88)

유적지의 입구는 굉장히 작은 편이었다. 별다른 장식이 돼 있는 것도 아니고, 가디언을 제외하곤 딱히 보안장치랄 만한 것도 없어 보였다. 그마저 멀리서 보면 단순한 바윗덩어리라 생각할 정도니, 여태까지 이곳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도 납득이 갔다.

다가오긴 지형이 너무 험하고, 멀리서 보면 그냥 동굴처럼 보였겠지.

아무튼, 그런 평범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입구와는 다르게 내부는 밖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상식적으론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차이다.

“안은 생각보다 깨끗한데?”

“……그런 게 먼저 눈에 들어와요?”

입구에 비해 몇십 배는 커 보이는 실내를 앞에 놓고?

“그럼 뭐가 들어와야 하는데?”

“크기요. 누가 봐도 명백하게 안이 밖보다 훨씬 크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

라이놀이 주위를 한 번 훑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뭐, 고대 유적지니까. 별로 신기할 것도 없지 않나.”

“…….”

나름 이 세계에 적응을 꽤 했다고 생각하는데, 가끔가다 이렇게 관점 차이가 유달리 크게 나타나는 부분들이 있다.

머릿속으로야 나도 그런 고대 마법이 관여되어 있다는 건 아는데…… 직접 보면 감상이 다르지 않나?

이해는 안 가지만, 굳이 납득까지 필요한 문제는 아니라 신경 껐다.

그 대신 나는 라이놀에게 복면을 건네고, 배낭에서 타른헬름을 꺼내 착용했다.

징.

약간 진동하는 소음과 함께 투구의 감촉이 사라진다.

옆에서 보고 있던 라이놀이 나지막이 감탄을 터뜨렸다.

“그게 전에 말했던 그 모습을 바꿔 준다는 유물이야?”

“네. 지금 저 어때요?”

“굉장히 싸가지 없고 꼰대 같은 아저씨로 보여.”

“완벽하네요.”

흡족하게 웃으며 계속해서 걸었다.

곧이어 돌벽이 아닌, 매끄러운 재질로 이루어진 내벽이 나왔다.

굳이 따지자면 콘크리트 비슷해 보이긴 하는데…… 그보다 중요한 건 그 주위에 새겨진 파괴의 흔적이다.

“여기서 또 전투했었나 본데.”

“전투라기보다는…… 함정을 그냥 깨부수고 갔나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해?”

나는 홀의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가장 크게 새겨진 자국을 문지르며 말했다.

“전투가 일어났다면 보통 벽 쪽에 새겨진 상처가 많아야 하는데, 여기 있는 흔적은 대부분 바닥에 집중되어 있잖아요. 아마 밑에서 창이 솟구친다거나 하는 함정이었을 거예요.”

“……너, 혹시 나랑 만나기 전에 유적 탐험가도 했었어?”

“저는 왜 사도도 됐다가 예언자도 됐다가 유적 탐험가도 됐다가 하는 거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보다, 어디로 갈지부터 정해야겠는데요.”

이곳은 둥근 원형으로 된 구조물에 총 4개의 통로가 나 있었다. 그 각각의 앞에 검, 도끼, 메이스, 지팡이를 든 동상이 하나씩 서 있다.

이번에도 수수께끼 같은 건가. 살짝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때 위를 보고 있던 라이놀이 나를 불렀다.

“리안, 여기 와 봐.”

“뭐 찾았어요?”

“응. 저기 천장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확실히, 뭔가 써 있다.

[여기 기사, 전사, 성기사, 마법사가 있다.]

[이들 4명 중 1명은 거짓말쟁이다.]

[4개의 통로 중 거짓말쟁이가 서 있는 통로만이 진실된 출입구이다.]

[나머지 3개의 통로에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럼 여기서 거짓말쟁이는 누구인가?]

[기사: 전사 혹은 성기사가 거짓말쟁이다.]

[전사: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성기사: 기사는 거짓말쟁이다.]

[마법사: 기사 또는 전사가 거짓말쟁이다.]

“…….”

라이놀이 고개를 한참 치켜들고 있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퀴즈 문제네. 이건 부숴서 해결할 수도 없는데, 어떡하지?”

별로 고민할 것도 없다.

“첫 번째로 가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라이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사 쪽? 설마 벌써 푼 거야?”

“아뇨. 그냥 사람들이 거기로 간 거 같아서요.”

나는 동상 뒤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PT-T][PT-F][PT-F][PT-F]

전사, 성기사, 마법사의 뒤에 위치한 통로에는 거짓을 뜻하는 False가 떠 있는 반면, 오직 기사의 뒤에만 진실을 뜻하는 TRUE 코드가 떠올라 있었다.

“……그 사람들 들어간 지 한참 됐을 텐데.”

“저 이러는 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만 가죠.”

툭 내뱉고 걸어가자 라이놀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따라온다. 그렇게 10분쯤 갔을까. 우리는 아무 방해 없이 다음 방에 매끄럽게 도착했다.

“…….”

그리고 그 이후로 라이놀은 아무런 군말 없이 내 말에 따랐다.

* * *

“오늘따라 그런 말이 떠오르네.”

“무슨 말이요?”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한다는 말.”

반대 아니던가?

아무튼, 우리는 아까와 비슷한 방 10여 개를 더 건너 큰 공동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안에는 먼저 도착한 칼페온의 일행과 실베스터 용병단이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오면서 지들끼리 동료의식이라도 생겼는지 소속 상관없이 막 뒤섞여 있다.

아니, 그냥 그런 거 따질 기력도 없는 건가?

하나같이 얼굴이 죽기 직전이다.

우리는 일단 벽 뒤에 숨어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뭐? 경력 20년의 유적 탐험꾼? 유물사냥꾼이라는 칭호가 아깝구나. 용병 질이나 하고 있는 버러지가 결국 그렇겠다만.”

“아 거, 대가리 뽀사질 거 같으니까 제발 아가리 좀 닥치쇼. 이러니저러니 해도 계속 아닌 척 따라왔으면서 무슨 양심으로 지껄이는 소린지…….”

“중간에 두 개는 내가 풀었잖느냐. 따라온 건 네놈 아닌가?”

“그거야 마법 관련된 문제였으니 어쩔 수 없는 거고, 그 전에 내가 푼 10개는 기억에서 묻어 버렸소?”

……저거 친해진 건지 사이가 나빠진 건지 모르겠네. 궁금해서 고개를 살짝 내빼 봤는데, 표정들이 전부 험악하다. 맥 빠진 모습도 벗어던지고 슬금슬금 자기들끼리 뭉치기 시작한다.

대화 수준이 초등학생 수준까지 내려가길래 혹시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했네.

“그 열 번 중에 틀린 적은 또 몇 번이나 있었는지 아나? 그것 때문에 우리 쪽 병력이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지…….”

“얼씨구, 이쪽은 그런 적 없는 줄 아는갑네. 그리고, 우리 따라온 적 없다고 하지 않았남? 왜 지들이 죽을 뻔한 걸 나한테 책임을 돌리제?”

“……닥쳐라, 버러지야. 네놈 사실 유물 사냥꾼 실베스터 아니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헤맬 리가 없다.”

“거, 수수께끼형 유적지는 여태 여기 말고 한 곳밖에 없었다니까. 예전에 아르곤에서 국보 지정됐던 타이탄 '오리진' 나온 유적. 나는 거기 들어가 본 적도 없어야. 그나마 그런 종류도 있구나 해서 미리 익혀 뒀으니 이 정도인 거지, 아니었으면 댁들은 아직 입구도 통과 못 했제.”

“찔리는 게 있긴 있나 보군. 아가리가 길어지는 걸 보니.”

“뭐가 어쩌고 어째?”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기 시작했다.

……더 보고 있기 괴롭다. 나는 거기서 시선을 떼고 라이놀에게 돌렸다.

“아직 유물은 못 찾은 거 같으니 일단 더 두고 보죠.”

“……그러자.”

라이놀도 저들의 대화에 기가 찼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의 신경전은 진작 끝이 나고, 전부 자리에 앉아 말없이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실베스터도 온갖 인상을 다 찌푸리고 있었고.

어제는 그 멀리서도 금방 눈치채더니, 지금은 그럴 기미조차 없다.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피곤해서 그럴 여력도 없는 거다.

덕분에 나와 라이놀도 맘 편히 벽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광장에서 움직임의 기척이 느껴졌다.

“야들아, 그만 움직여 보자.”

실베스터가 기재개를 쭉 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페온의 기사와 마법사가 그걸 보고 눈을 빛냈다.

“어디로 갈 거지?”

“가긴 어덜 가. 거참 웃기는 양반들이네, 갈 곳 하나밖에 없는 거 안 뵈쇼?”

실베스터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거의 배 한 대는 지나다닐 수 있을 만한 거대한 크기의 문이 있었다.

“눈이 삔 건지, 머리가 빈 건지. 암튼, 잘들 해 보쇼. 나는 먼저 가 볼텡께.”

“멈춰라.”

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떻게 봐도 저기가 유물이 있는 곳임이 틀림없을 터. 그런 곳을 어째서 네놈이 먼저 들어가겠단 거지?”

“아이구, 그리 의욕이 넘치실지 몰랐네 그려. 그럼 내 양보할 테니 댁이 먼저 들어가 보쇼.”

“…….”

기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마 여태까지 걸려 왔던 함정들을 생각하는 거겠지. 저기도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먼저 들어가는 놈이 그걸 직빵으로 맞아야 하는 거다.

마법사가 기사를 한심하게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들어가면 들어가는 대로, 늦게 들어가면 들어가는 대로 장단점이 명확하지. 그러니 차라리 동시에 들어가는 게 어떤가?”

일견 공정해 보였지만, 실베스터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댁 둘이 동시에 날 확 칠 줄 어케 알고? 나는 그런 짓 안 혀.”

“네놈이 기사의 자긍심을 물로 보는 것이냐?”

“세상에 마법사 똥꼬나 빠는 자긍심이 다 있군 그려.”

기사가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검을 빼어 들려 했다. 그걸 본 마법사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손을 들어 제지했다. 챙. 군말 없이 검이 회수된다. 실베스터가 코웃음을 쳤다.

“울컥하지나 말든가. 아주 똥꼬를 빠는 데 진심이군.”

“더 이상 도발하지 마라. 우리 쪽 기사와 네놈 둘이 같이 입장하는 조건이면 되겠지?”

“어유, 마법사님은 안전한 데로 빠지고 싶은갑제?”

“내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다. 마법사가 후방에 위치하는 건 상식이지. 그것도 모르나?”

“근디 꼭 그 소리를 본인이 당당히 지껄여서 재수 없게 굴드라고 마법사들은.”

실베스터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래도 그 정도 조건이면 괜찮디. 나도 좋수다.”

타협은 극적 타결을 이뤄 신속히 진행됐다.

실베스터와 기사가 문으로 다가가더니 온힘을 다해 밀기 시작했다. 마력을 전신에 둘렀는지, 엄청난 크기의 문이 끼긱 소리를 내며 조금씩 열려 간다.

옆에서 라이놀이 걱정스런 기색으로 말했다.

“우리도 슬슬 나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저기 들어가자마자 유물 있으면 어쩌게?”

“괜찮아요. 어차피 스키드블라드니르는 저 안에 없으니까.”

내가 태연히 말하자, 라이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다른 곳으로 향하는 문은 저기뿐인데, 그럼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저기요.”

나는 공동 위에 텅 비어 있는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라이놀이 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아무것도 없잖아. 하늘을 나는 배래도 결국 배 아니야? 저런 데 있을 만한 사이즈가 아닐 텐데.”

“좀 작은 배거든요. 지금은.”

“……지금은?”

라이놀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이건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지금도 내 눈엔 스키드블라드니르를 뜻하는 코드가 매우 선명히 보이고 있었다.

[AF-3]

허공에 날아다니는 동전 크기의 형체. 나는 그걸 힐끗거리며 씨익 웃었다.

저 배의 또 다른 기능 중 하나는, 그 크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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