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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87화 (87/225)

너의 코드가 보여 (87)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야?”

“죄송해요. 중간에 잠깐 다른 데로 샐 일이 생겨서.”

라이놀의 물음에 대답하며 냄비 근처에 앉았다.

안에 들은 스튜가 거의 졸은 데다 식어 있기까지 하다. 아마 나 올 때까지 계속 끓이다가 너무 늦으니 할 수 없이 끈 모양인데…… 결국 내 잘못인 걸 불평할 수도 없었다. 남겨 준 것만으로 감지덕지하며 그릇에 옮겨 담았다.

“다른 데로 샐 일? 설마 혼자 유적지 입구라도 다녀온 거야?”

“네.”

스튜를 한 입 떠먹으며 대답하자 라이놀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알아서 할 거라 믿기는 했지만, 그게 무모하게 행동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닌데…….”

“걱정 안 해도 돼요. 무모한 일 아니라 생각해서 갔다 온 거니까.”

“……혼자 거기까지 다녀오는 게?”

“네.”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는 듯 라이놀이 입술을 달싹였지만, 서율의 말이 치고 나오는 게 더 빨랐다.

“입구까지 다녀왔으면 거기 모여 있는 사람들도 봤겠네요? 어땠어요? 설마 절정, 3급 수준의 기사도 있는 건 아니죠?”

“있던데요. 3급 둘, 그와 동급인 6성급 마법사도 하나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서율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나 많이요? 그 정도면 저희 전력보다도 위잖아요.”

“괜찮아요. 걔네가 전부 같은 편인 것도 아니니까. 3급 하나는 다른 둘과 적대 관계에요. 굳이 따지자면 우리 편이라 볼 수도 있겠죠. 적의 적은 친구라고도 하잖아요. 이이제이라고 하던가.”

“……혹시 사냥을 끝낸 사냥개는 잡아먹는다는 말도 아세요? 토사구팽이라고 하는데.”

일이 끝난 후 다른 하나가 우릴 공격하지 않을 거란 법이 있냐는 뜻이다.

충분히 할 만한 생각이긴 하다. 저렇게 죽상을 하고 물으니 웃겨서 문제지.

나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만에 하나 그런다 해도 별문제 없죠. 설마 미르 경이 동급한테 질 거라 생각해요?”

“음…… 확실히 사형이 실력 하나는 믿을 만하긴 하죠.”

서율이 미르를 힐끗거렸다.

“다른 쪽으로 믿음이 안 가서 그렇지.”

“다른 쪽도 대부분 내 말대로 됐어. 사매만 못 믿은 거지.”

“말이 맞으면 뭐 해요? 평소부터 신뢰가 가게 행동을 해야죠.”

“그건 또 그래.”

미르가 망설임도 없이 동의했다.

아니, 본인이 인정하면 안 되지 않나.

나는 빈 스튜 그릇을 바닥에 놓았다.

“아무튼, 그 사람들은 내일 오전 중에 유적지로 들어갈 거 같아요. 좀 떨어져서 하는 얘기 들었거든요.”

“그럼 저희도 오전 중에 들어가나요?”

서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그럴 리가 있나.

“저희는 푹 쉬고 저녁때쯤 들어가죠.”

“네? 그렇게 늦게요?”

“딱히 서두른다고 유물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다 들어갔던 사람들이 먼저 유물을 얻으면요?”

그렇지는 않을 거다. 설정상 스키드블라드니르 쟁탈전은 끝날 때까지 며칠은 걸리니까. 하지만 이런 거까지 굳이 밝힐 필요는 없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유물을 먼저 얻었다고 그 사람 소유가 됐다는 건 아니잖아요.”

“와, 인성…….”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은 건지 서율이 감탄을 터뜨렸다. 하지만 큰 거부감은 없어 보인다.

하긴, 서율도 결국 동대륙 인간이었지. 서쪽도 현대에 비하면 도덕 관념이 꽤 다르긴 한데, 동쪽에 비하면 거의 선녀다. 지금 그쪽은 거의 개판 5분 전이니까.

서율은 잠깐 생각하더니, 다시 한 번 물어왔다.

“그런데 어차피 그럴 거면 그냥 입구에서 기다리는 편이 더 낫지 않아요? 괜히 귀찮게 고생할 것도 없고.”

“안에 있는 게 하늘을 나는 배라고 했잖아요. 밖에서 그거 타고 도망치면 잡을 방법 없어요.”

“아직도 그 소리야?”

미르가 황당하단 듯 끼어들었다.

다른 사람 거 갈취하자는 소리엔 담담하더니, 갑자기 저러는 건 또 어떤가 싶기는 한데.

“스키드블라드니르에 대해 못 믿는다 쳐도, 밖으로 나오면 도망칠 확률 높아지는 건 사실이잖아요. 미르 경은 3급 기사랑 6성급 마법사가 달아나면 무조건 잡을 수 있다 장담할 수 있어요?”

“스키드…… 뭐? 거, 배 이름도 무지 외우기 힘드네.”

미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기사는 놓치지 않을 자신 있지만…… 마법사는 모르겠다. 만나 본 적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해서라도요.”

일행들은 전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직 얘기 다 안 끝났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뭐, 말은 이렇게 했지만, 서율 경과 미르 경은 들어오지 말고 입구만 지켜 주시면 돼요. 괜한 떨거지들 못 들어오게.”

“네? 왜요?”

서율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여태 싸울 것처럼 지껄여 놓고 무슨 소린가 싶을 거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둘을 스키드블라드니르 쟁탈전에 직접적으로 참여시킬 생각이 없었다.

“아까 얘기했던 기사와 마법사가 사실 칼페온 왕국 소속이거든요. 국가 분쟁 생길 만한 일 있으면 연관되지 않게 해 주겠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자, 잠깐, 잠깐만요.”

서율이 당황한 기색으로 손사래를 쳤다.

“네. 왜요?”

“어……, 이건 진짜 몰라서 여쭤보는 건데.”

꿀꺽.

“……혹시 서쪽에선 겨우 소속 무인 몇 죽인 것도 국가적 분쟁으로 치나요?”

“…….”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동대륙 상황이 더 막장인가 본데.

일단 나는 서율과 미르에게 상황부터 제대로 파악시켰다.

“어…… 그러니까, 상대가 유물을 가지고 나오면 죽이고 뺏자는 뜻이 아니었다고요?”

이건 내 이미지의 문제일까 동대륙의 현실이 문제일까.

“뺏자는 건 맞는데, 굳이 죽일 생각까진 없었는데요.”

“그러다가 후환이라도 생기면요? 살인멸구가 제일 확실하지 않아요?”

“……여기 복면이요. 그냥 얼굴만 가리면 충분해요.”

서율이 놀라 소리쳤다.

“와, 농담이 아니라 진짜 성자시네요. 이렇게 자비로울 줄이야.”

“…….”

이젠 내 인식이 잘못된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슬쩍 라이놀의 얼굴을 살펴봤다.

저쪽도 황당한 표정인 거 보니, 이상한 건 동대륙이군.

“아무튼, 두 분은 입구만 좀 지켜 주세요. 일단은 타국과 관련된 일이니…….”

“이 정도는 도와드려도 괜찮은데. 별일도 아닌 걸요 뭘.”

여기선 별일이라고.

“진짜 그냥 입구만 지키셔도 돼요. 정 도움 필요하면 제가 먼저 얘기할게요.”

“음……. 정 그리 부담스러우시면 알겠어요, 그럼.”

“……고마워요.”

이건 진심이다. 얘네가 안에 들어가면 뭔 짓을 저지를지 짐작도 안 가는 상황이니까 지금.

나는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낭에 들어갔다.

이제야 알아챈 거지만, 벌써 하늘엔 해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다.

조금 있으면 실베스터 용병단과 칼페온 애들도 진입하겠네. 생각보다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 시간을 꽤나 지체해 버렸다.

“일단 저녁까지 좀 자 두죠. 몸이 피곤하면 될 것도 안 되니까.”

“그렇네요. 그럼 편안한 아침 되세요.”

서율이 방긋거리며 농담하곤 침낭에 들어갔다. 미르와 라이놀도 크게 하품하더니 각자의 자리를 찾아간다. 그들 모두가 눈을 감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도 같이 잠에 들었다.

* * *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깼다. 이렇게 푹 잔 건 오랜만인데. 오히려 저택에서보다 편안했던 거 같기도 하다. 의외로 야영 체질인가.

하지만 일어나서 보인 풍경은 그닥 평화롭지 못했다.

“아, 깨셨어요?”

“……혹시 죽인 건 아니죠?”

나는 사방에 쓰러져 있는 용병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직은요. 근데 고민 중이에요. 저희를 노예상에 파니 뭐니 하더라고요.”

하여간 용병새끼들. 제대로 되먹은 놈을 본 적이 손에 꼽는다니까.

평상시대로라면 그냥 근처 경비대에 넘겼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나는 녀석들 다리를 하나씩 자근자근 밟아 줬다. 악 거리는 비명과 함께 우지끈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진다.

“이거면 충분할 거예요. 신관 치료 못 받으면 평생 개처럼 기어 다녀야 할 텐데, 저것들이 그거 고칠 돈이 있을 리가 없거든요.”

“으음…….”

“보통 경비대에 넘기면 손목 한 개는 자를 텐데, 아침부터 피 보면 기분 더럽잖아요. 저걸로 부족해요?”

“아, 아뇨. 제가 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거 같아서.”

여기서 잘못 생각할 게 뭐가 있지?

내가 묻기도 전에 먼저 말이 나왔다.

“저는 리안 경이 그냥 보내 주자고 할 줄 알았거든요. 어제 사람 안 죽인다는 거 보고.”

“그럴 이유가 없으니 안 할 뿐이에요. 제가 뭐 호구 병신이라서가 아니라.”

“……그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서율이 살짝 웃었다.

“그래도 제가 생각한 게 아니라 다행이네요. 동대륙에선 그렇게 심약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죽거든요. 안 그래도 여기가 좀 물렁물렁한 편인 거 같은데, 그런 데서까지 성자 소리 듣는 분이니 조금 걱정했죠.”

“……서쪽을 물렁물렁하다 표현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적어도 지금 당장 동족들끼리 전쟁을 벌이고 그러고 있진 않잖아요. 동대륙에선 그게 일상인데.”

그건 그렇다. 게임에 동대륙을 표현한 적은 그리 많지 않지만, 내 머릿속에는 어떤 상황일지 항상 뇌리에 박혀 있었으니까.

지금 그곳은 전 대륙이 9년 전 이곳의 대전쟁 때와 비슷할 거다. 끊이지 않는 전투, 계속되는 굶주림……. 나라마다 레이튼을 덕지덕지 붙여 놨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나는 그런 사실들을 들먹이며 위로하는 대신, 그냥 살짝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더 볼일 없으면 그만 가 볼까요? 저 양반들 자는 척도 슬슬 눈으로 봐주기 힘들 지경인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침낭 속에 있던 두 어깨가 움찔거린다. 서율은 그걸 보고 피식 웃으며 배낭을 걸쳤다.

“얼른 가 보죠. 저도 그 하늘을 나는 배가 진짜 있는지 궁금하니까.”

주변을 정리하고 유적지까지 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산세가 험하다고 하나, 여기 있는 모두가 4급 이상의 기사들. 겨우 지형 정도에 영향받을 수준은 아니라는 소리다.

내 ‘무영보’가 조금 걸리긴 했지만…… 그것도 이제 단순한 달리기로는 무리 없을 만큼 익숙해졌다.

“화려하게 해치웠네.”

입구를 본 미르가 피식 웃으며 내뱉었다.

그 말대로, 유적을 지키던 가디언은 그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반파된 상태였다.

굳이 저럴 것까진 없었을 텐데. 아침에 또 한 번 그 마법사가 실베스터 탓에 열 좀 받았나 보다.

“그럼 둘은 바로 들어갈 거야?”

“네. 서율 경과 미르 경은 입구 좀 부탁드려요. 굳이 나가는 놈들까지 붙잡을 건 없고요. 어차피 그런 건 제가 일부러 놓아준 걸 테니까.”

미르가 피식 웃었다.

“자신감이 대단한데. 뭐, 나야 귀찮을 일 없고 좋지.”

“잘 다녀오세요. 필요하면 밖에다 크게 소리치시고요.”

그리곤 둘이 바로 근처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아마 입구 바로 옆보다는 좀 떨어진 데 앉아 경계 범위를 넓히려는 생각인 듯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어차피 그들 실력이면 입구까지의 거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나는 그 둘을 일별하고 라이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저희도 그만 들어가 볼까요?”

“그래.”

그렇게 1분쯤 걸었을까.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문제가 터졌다.

쿠구구궁.

반파되어 있던 가디언을 향해 주변의 돌멩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행들이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저거 자동수복 기능 있는 거였나? 귀찮게…….

무시하고 들어갈까 했지만, 녀석이 원래 몸으로 돌아오는 게 더 빨랐다.

속도가 굉장한데. 과연 고대의 가디언이란 건가.

스핑크스를 닮은 가디언의 눈이 파랗게 빛나더니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물을 노리고 던전에 들어가려는 자, 본인이 내는 수수께끼를 맞추지 못한다면 평생을 안에 입장할 수 없을 것이다.

파랗게 빛나던 눈이 빨간색으로 변한다.

―그럼 문제를 내지. 항상 오래됐지만 때로는 새로우며, 슬퍼하는 법이 없되 때로는 우울하고, 비어 있는 법이 없되 때로는 차오르며, 미는 법이 없되 항상 당기는 것은 무엇이냐?

라이놀이 당황한 얼굴로 내 쪽을 바라봤다.

“저거 정답이 뭔지 알겠어? 나는 영 뭔지…… 리안?”

목소리가 의아한 기색을 띤다. 내가 검을 뽑아 들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일 거다.

“……뭐 하는 거야?”

“저딴 걸 왜 풀고 있어요. 머리 아프게.”

탓, 땅을 박차고 날아가 놈을 횡으로 베어 냈다.

쿵!

가디언의 큰 몸체가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아까보다 손상 정도가 훨씬 크다. 이 정도면 수복 못 하겠지.

나는 태연히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만 가죠.”

“……그래.”

라이놀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안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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