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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32화 (32/225)

너의 코드가 보여 (32)

그 후로 며칠이 지났을까.

다린이 부르는 소리에 나가 보니 응접실에 아리나가 앉아 있었다. 전에 아무나 막 들이지 말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냥 말을 말자.

“심문관 도착했어?”

“와, 인사도 없이 용건 꺼내는 건 너무 정 없지 않아요? 돈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정 타령이야?”

그리 답했지만, 확실히 예의 없긴 했다. 지킬 건 지켜야지.

대충 사과하려는데, 옆에 있던 다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신관님?”

“네, 무슨 일이세요?”

“그…… 그게, ……리안을 너무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는 게…….”

“……네?”

아리나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개 뜬금없네. 또 뭔 헛소리지?

다린이 황급히 손사래 쳤다.

“혀, 협박 같은 게 아니고 나는 단지, 리안의 진짜 신분을 생각해서…….”

“음.”

아리나가 황당한 눈으로 내 쪽을 바라봤다.

“혹시 교주님의 숨겨 둔 자식, 뭐 그런 거예요?”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 저었다.

교주는 자식이 없다. 그놈의 설정. 하도 틀려서 영 믿음이 안 가긴 하지만, 생김새도 전혀 안 닮았다.

교주 아들이라기엔 내가 너무 잘생겼어.

“그럼 주교님의…….”

“아니야.”

후우…….

한숨 쉬며 다린을 쳐다봤다.

신전과 연관될 때마다 저러는 거나, 내가 한 말들. 종합해 보니 이제 대충 알겠다. 아무래도 나를 키탄의 사도라 생각하나 본데, 놈은 엔딩까지 사도를 내리지 않는다.

그쪽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다린, 할 일 없어요?”

“어, 어? 있긴 한데…….”

“그럼 가서 할 거 하세요.”

“……네.”

나가는 다린을 보며 생각했다.

쪽팔리니까 다음부터 누구 올 땐 숨겨 놔야지.

아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블레스랑 관계 있는 것도 그렇고…… 진짜 뭐 없어요? 그냥 저러진 않을 거 아니에요.”

“아니. 다린은 그냥…… 조금 아파서 저래.”

“네? 멀쩡해 보였는데, 어디 가요?”

“여기.”

톡톡. 머리를 가리키자 이해했다는 듯 아리나가 ‘아’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쪽은 주교님급은 나서야 치료 가능한데…… 부탁해 보지 그래요?”

“됐어. 불치병이거든.”

“저런…….”

아리나가 안타깝다는 듯 문을 쳐다보다,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진짜 어디 뒷배 없어요? 집도 좋은 데 부모님이 좀 산다든가.”

“내 집 아니고, 난 고아야.”

“음…… 그래요?”

아리나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고아는 얘깃거리도 안 되는 세계긴 하다.

애초에 저 녀석도 부모 모르는 상태 아닌가.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자기 종족도 모르지 참.

“그런데 왜 자꾸 호구조사야?”

“음…… 비빌 곳 없으면 마음의 준비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왜?”

아리나가 크게 한숨 쉬었다.

“심문관님 도착했는데, 기분이 엄청 나빠 보이거든요? 자칫하면 맞을지도 몰라요.”

“설마 그러려고.”

웬 애새끼가 제 조사 틀렸다니 기분 나쁠 수야 있다. 엘리트 인재고, 그만큼 자존심도 강하니까. 하지만 유능하다는 건 자기관리도 철저하다는 소리다.

하물며 상대는 심문관.

감정통제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아무리 바이론의 능력에 당했다 해도, 다져 놓은 게 있는데 기본은 지키겠지.

그보다 의아한 건 아리나의 반응이다.

전에 본 모습을 보면 이타심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쓸 것 같진 않았는데.

“근데 나 맞을 걱정을 네가 왜 해?”

“합의금은 저희 신전에서 줘야 한단 말이에요.”

“아.”

굉장히 현실적이고 납득이 되는 이유였다.

“……맞아도 돈 달라고 안 할 테니 걱정 마라.”

“그럼 됐고요.”

아리나가 안심한 표정을 짓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고 괜히 도발하진 마요. 주교님이 달래고 있긴 한데…….”

“내가 그런 짓을 왜 해?”

“할 거 같으니 그렇죠. 전에 시르케님 도발하는 거 보니 솜씨가 예술이시던데.”

“…….”

듣고 보니 확실히 장담하긴 힘들었다.

엿 같은 새끼는 엿 같이 대해야 엿 같이 굴지 않는다.

살면서 깨달은 지혜다.

“……정도만 지키면 나도 상대할 생각 없어.”

좀 투덜대는 거야 이해할 수 있다.

거기서 끝나느냐가 문제지.

사람에겐 침범해선 안 될 선이 있는데, 그 기준은 제각기 다르다. 내 경우엔 직접적인 해를 입기 직전까지.

이유는 간단하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달리 말하면 이미 선빵을 처맞은 꼴이다.

싸움은 선빵필승.

밟히기 전에 밟는다.

시비 좀 거는 건 참을 수 있지만, 행동으로 옮긴다면 못 참는단 소리다.

아리나가 나를 보며 다시 한숨 쉬었다.

“……주교님이 잘 달래 놨길 비는 수밖에 없겠네요.”

* * *

그른 것 같은데.

싸늘하게 노려보는 눈빛을 가볍게 피했다.

아직 공격받진 않았지만, 당장 칼 꺼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다.

아니, 조금 뽑은 거 같기도 하고.

저걸 공격 신호로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 흑색 로브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로서는 주교님을 더 이해하기 힘듭니다.”

한 교구를 담당하는, 그것도 쇠퇴했다지만 전 제국 수도 레이튼 주교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건방지기까지 한 어투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만나는 부류가 저런 놈들이죠.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멍청한 자들은 본인이 멍청하다는 사실조차 모르니까요.”

“…….”

괜찮다. 상정 범위 내다.

나 같아도 일 끝냈는데 웬 고삐리가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이 지랄 떨면 줘 패 버릴지도 모른다.

저 정도야 참을 수 있지.

게다가 자기 고백까지 하지 않는가. ‘멍청한 자들은 본인이 멍청하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좋은 말이다.

내 앞에 그런 새끼 하나 딱 보이거든.

“하지만 주교님께서 그런 버러지의 말에 현혹되었다는 건…… 믿고 싶지 않군요. 쓰레기들의 도시에 너무 오래 머무신 게 아닌지 걱정이 듭니다.”

“…….”

버러지가 추가됐다.

거기에 선도 살살 넘으려 하는데, 저건 봐줘야지. 나한테 넘은 건 아니니까. 주교가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대신 열 내 줄 정도는 아니다.

근데 저 새낀 노인 공경도 모르나?

아무리 심문관의 위세가 높다지만, 본인보다 나이도, 지위도 더 높은 사람한테 저 지랄이라니.

힐끗 주교를 보니, 역시 사람 좋다지만 저런 모욕까지 참기는 힘들었나 보다. 표정이 굳어 있다.

옆에 있는 아리나도 마찬가지.

말 한마디로 차기 성녀 눈에까지 들다니, 생각보다 거물인데.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이해하오만, 저 소년은 멍청하지 않을뿐더러, 버러지도 아니오.”

“레이튼의 고아지요.”

그러더니 놈이 나를 품평하듯 훑어봤다.

“나이는…… 10대 중후반. 전쟁 이후 8년이 지났으니, 최소한 그 전부터는 여기 살았다는 뜻입니다. 전쟁 이후 레이튼에 아이를 데리고 이주하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 옷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 옷. 나름 깔끔하게 관리했지만, 저건 빈민가에서만 구할 수 있습니다. 굳이 거기까지 가서 옷을 구할 이유가 없으니 그쪽 출신이란 소리가 되죠.”

“…….”

‘왕도’에서도 그렇고, 저 녀석도 그렇고. 중세 놈들 드레스 코드는 왜 이리 따지는지 모르겠다.

지금 입고 있는 건 처음 빙의했을 때의 옷이다. 당연히 돈이 없어서는 아니고, 그냥 눈에 안 띄길래 입고 있다.

애초에 레이튼 인구 대부분은 빈민이다.

여기선 이게 보통이란 말이다. 더러워서 새 옷 사든가 해야지.

“레이튼 출신 고아는 버러지와 다를 게 없습니다. 교육받지 못한 것은 물론, 보고 배운 건 살인, 강도 같은 범죄밖에 없으니까요.”

저 새끼 견해야 어쨌든, 놈이 아직 설명하지 못한 게 있었다.

“고아라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요?”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 아리나가 물었다.

놈이 나를 힐끗 보더니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냥, 그렇게 생겼다.”

“…….”

진짜 죽여 버리고 싶네.

“거기까지 하시오. 모욕이 정도를 넘고 있군.”

“모욕을 당한 건 제 쪽입니다, 주교님.”

남자가 다시 나를 가리켰다.

“저런 버러지의 말에 넘어가 심문관의 조사를 의심하다니……. 세상에 이런 모욕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단 저 소년의 주장을 들어 보는 게…….”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는 싸늘한 눈으로 다시 나를 노려봤다.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이의 제기 들어왔을 때부터 어이없었는데……. 가서 주교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다는 것도 같이 고해야겠군요.”

“…….”

감정 통제에 이골 났다는 말 취소해야겠다.

그래도 심문관이면 좀 버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바이론 영향을 많이 받은 모양이다. 아니면 주교 상대로 저렇게까지 폭언을 날릴 리 없다.

저놈이 부족해서인지, 바이론이 예상보다 뛰어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전자겠지. 생각보다 멍청하게 생겼으니까.

“일단 제출된 신패부터 보여 주시죠.”

“입을 열지 마라. 버러지.”

“자신 없으십니까?”

“뭐?”

녀석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과민반응할 이유가 없지요.”

“……이 버러지가.”

놈이 분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널 죽이지 않는 건 단지 주교님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 버러지 같은 삶이나마 연명하고 싶다면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전혀 존중이 보이지 않으니 하는 말입니다.”

놈을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재수 없어 보이게. 썩소라고도 한다.

“저는 미친 개 한 마리가 혼자 짖어대는 모습밖에 안 보였거든요.”

“……정말 죽고 싶은가 보군.”

스르륵.

놈이 기어코 검을 꺼내 들었다.

“그만두시오! 여기가 신전이라는 것을 잊었소?”

“주교님이야말로 잊으신 것 같군요. 저는 신전 내부에서도 즉결 처분의 권한이 있습니다.”

“내 앞에서는 아니오.”

주교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장 그 검 집어넣는 게 좋을 거요.”

“……제 권한은 주교님도 제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 심문관의 권한은 나도 제지할 수 없지. 하지만 정신 나간 심문관을 심판할 수는 있소.”

그러더니 주교가 신성력을 끌어 올렸다.

눈으로 선명히 보일 정도의 신성. 그에 압도당한 듯, 놈이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하지만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다.

주교 때문은 아니다.

제국 몰락 전부터 레이튼 신전의 정점에 서 있던 자. 지금이야 한직이지만, 주교급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던 사람이다. 당연히 저 정도는 돼야지.

문제는 ‘신성’ 그 자체.

마법사의 마나에도, 검사의 마력에도 보이던 코드가…… 신성에는 보이지 않는다.

왜지?

오직 신성만 예외라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혹시 내가 이 세계에 온 것에 신들이 연루되어 있나?

여기의 신들에겐 그럴 능력이 없었기에 배제하고 있던 가능성이지만…….

그 설정.

이미 몇 번씩이나 틀리지 않았던가.

“어떡할 거예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타이밍이 너무 절묘해서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나 싶은 착각이 들었다.

그럴 리 없지만.

“……뭐가?”

“그냥 사과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

아리나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한 건 없죠. 근데 원래 세상이란 게 잘못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쪽에서 숙이는 식으로 돌아가거든요.”

“…….”

설정상 갓난아기 때부터 신전에서 생활했을 텐데, 이것도 틀렸나?

거기서 저리 자라기도 힘들 거 같은데.

“지금은 주교님이 말리지만, 혹시 알아요? 저거 또라이 같은데 뒷골목에서 뒤통수라도 후려갈길지?”

“……이젠 부정 못 하겠네.”

저 새낀 그러고도 남을 거 같다.

“그러니까, 대충 사과하고 끝내죠.”

“그렇겐 못 하겠는데.”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요. 심문관이면 무력도 5급 기사 수준은……. 어디 가요?”

당황해 부르는 아리나를 뒤로했다.

솔직히 고개 좀 숙이는 건 별 상관없는데, 저런 놈 상대로는 아니지. 이런 일까지 지고 들어가면 여기 있는 평생 대가리 박고 살아야 할 거다.

아직까지 주교와 대치 중인 놈에게 다가갔다.

녀석의 시선이 내 쪽으로 옮겨오고, 다시 표정이 굳었다.

주교한테 쫄았다가 날 보니 다시 분노가 차오르는 모양인데, 내가 대체 뭘 했다고 저 지랄인지 모르겠네.

어쨌든 놈에게 다가간 후,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저랑 내기 하나 하실래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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