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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31화 (31/225)

너의 코드가 보여 (31)

0101011101…….

마법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보이던 무수한 숫자. 그것이 지금 라이놀의 손 위에 떠다니고 있었다.

“……마력이 보인다고?”

“네.”

솔직히 저게 마력인지는 모르겠다.

여태까지는 보인 적 없으니까. 하지만 추측은 가능했다. 마법을 형성하는 건 마나. 마력의 원류도 마나. 그럼 저건 마나. 귀납적 추론이다.

“눈에 먼지 들어갔어?”

“아니요.”

내가 그리 실없어 보이나?

“어디에 뭐가 보이는 건데?”

“라이놀 손에, 마력이요.”

“……마력이 보인다는 게 뭐야?”

“그냥 보여요.”

“어떻게 생겼는데?”

숫자가 보인다고 할 수는 없고, 뭐라 설명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하다 갑자기 아리나가 떠올랐다.

즉, 그냥 되는대로 말하기로 했다.

“마력처럼 생겼어요.”

“…….”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는 라이놀을 마주 봤다.

나는 당당하다.

“음…… 손에 마력을 모으긴 했는데…….”

라이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손에 있던 숫자가 머리 쪽으로 옮겨 가는 것이 보였다.

“머리.”

“뭐?”

“지금 머리에 마력 모았죠?”

“…….”

라이놀은 잠시 침묵하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지금은?”

“다리.”

“지…….”

“복부.”

라이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진짜 보인다고?”

“그렇다니까요.”

“말도 안 돼.”

멍한 얼굴로 라이놀이 나를 바라봤다.

“마력이 보인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 없어.”

나도 그런 설정 넣은 적 없다. 마력은 감각으로 느끼는 거지, 보거나 만지는 것이 아니니까.

“그냥 보이는데요.”

“……마법 형성 전에 보인다고 할 때 다린이 이런 기분이었나.”

라이놀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눈을 감고 한참을 침묵했다.

아마 내 능력에 대해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아? 나야말로 누구한테든 묻고 싶은 심정이다. 마력이 보인다는 것도 지금에야 알았으니까.

“으음…… 굉장하긴 하지만…….”

라이놀이 한숨 쉬었다.

“보는 것과 느끼는 건 별개니까 기간이 단축되진…….”

“지금 생각난 건데요.”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저, 마력을 느낀 적이 있어요.”

내 말에 라이놀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언제?”

“마탑에서 마력 패스 측정할 때요.”

그때는 심란해서 대충 넘겼지만, 확실히 느꼈었다. 차가우면서 뜨거운, 인간의 느낌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그런 감각.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마력 아니었을까?

숫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길에 숫자들이 흩어진다. 그리고 그때와 같은, 기분 좋은 감각. 확실하다.

“느껴져요, 마력.”

자각하지 못했을 뿐, 나는 이미 마력을 알고 있었다.

* * *

‘아무리 키탄의 사도라도 심하지 않나?’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쳐 나온 진심. 라이놀이 거실에 앉아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나도 재능 있는 줄 알았는데…….’

내심 자신까지 있었다.

심법을 배우기 전에도, 배운 후에도. 그보다 이른 나이에 B급을 단 사람을 보지 못했고, 3일 만에 마력을 느꼈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자만이 아닌 자신.

그는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다른 사람을 볼 때마다 ‘이걸 대체 왜 못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근데 리안을 보니 그런 기분이 든다.

‘쟤도 나 볼 때 그런 생각을 할까?’

그 정도로 리안의 재능은 압도적이었다.

마력을 바로 느끼는 건 ‘해방 왕 전기’에나 나오는 얘긴데.

진정한 천재를 보았을 때 생겨나는 열등감.

라이놀은 평생 처음으로 그런 감정이 들었다.

‘의지하라고 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라이놀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래서야 나 같아도 그럴 생각 안 들겠다.

끼이익.

그때 방문이 열리며 안에서 다린이 걸어 나왔다.

“왜 혼자 궁상이야?”

“……다린.”

“뭐, 뭔데? 왜 그러는데?”

다린은 당황했다. 반박하라고 한 말인데 반박이 없다. 왜 진짜 궁상이지? 그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뭔가 다른 느낌인데.

“난 재능이 없는 건가?”

“……뭐라는 거야? 오빠가 재능 없는 거면 다른 사람들은 당장 목매달고 죽어야지.”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게 라이놀이다.

어른들이 말하길, ‘해방 왕’ 이후 최고의 재능이라던가? 결국 가문을 등지고 나왔으니 별 의미는 없지만.

“리안 말이야…….”

“리안? 리안이 왜?”

“……이미 마력을 느끼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역시. 그럴 거 같았어.”

“뭐?”

라이놀이 놀라서 다린을 쳐다봤다.

알고 있었다고? 언제부터?

“아무리 사도라도 마력 없이 그렇게 강할 리 없잖아? 당연히 숨긴 거겠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어.”

“…….”

그쪽이었나. 맥 빠진 라이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얘기가 아니야.”

“그럼 무슨 소린데?”

“몇 번 말했지만, 리안은 마력 없어. 그래서 내가 수련을 도우려 했고.”

“근데?”

“가르쳐 주기 전부터 마력을 느끼고 있었어.”

“그게 그 말 아니야?”

리안을 만난 지 한 달이 채 안 됐다.

다린은 마력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걸 느끼는 데 보통 반년의 세월이 걸린다는 건 안다.

“우리 만난 이후의 얘기야.”

“……뭐?”

다린은 순간 저게 무슨 뜻인지 고민했다.

언제부터 나 모르게 둘이서 마력 수련을 한 거지? 아니, 가르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마력이란 게 혼자 깨닫는 게 가능한 거였나? 아니, 다 둘째 치고 기간은?

“얼마나 수련한 건데? 2주? 3주? 확실히 빠르긴…….”

“한 적 없어.”

“무슨 소리야?”

“수련한 적 없다고.”

“……수련 없이 마력을 어떻게 느껴?”

몇 주 만에 마력을 느끼는 거?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옆에 3일 만에 느낀 인간도 있으니까. 괴물 같은 재능인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일단 수련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마력 패스 검사받을 때, 마력 사용하는 거 알지?”

“그거야 당연하지. 몸에 마력을 주입하고 패스를 통과하는 동안의 압력, 시간 등등을…….”

“아니, 그건 됐고.”

라이놀이 한숨 쉬었다.

마법 이론 얘기만 나오면 신나서 떠들어대는데, 정작 그는 별 관심 없었다. 마력이 사용된다, 이 정도만 알면 됐지.

“그 검사 도중에 마력을 느꼈대.”

“……뭐?”

“수련 없이, 그거 한 번으로.”

“……뭐?”

뜻을 이해하지 못한 마냥 다린이 같은 말만 반복했다.

저 짧은 문장을 해석하지 못할 만큼 멍청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상식선에서 말도 안 되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검사 도중 마력을 느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다.

‘해방 왕 전기’에 쓰여 있어도 개연성 말아먹었네, 욕했을 내용이다.

“……사도라는 건 원래 다 그래?”

“나도 모르지. 그런데 사도가 전부 저 수준이면 신전이 대륙을 지배했을걸.”

“그치?”

신전이 지배하는 질서.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린다.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다린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리안보고 놀랄 때 호들갑 떨지 말라 했었지?

“이제야 내 심정이 좀 이해가 가?”

“그래.”

“어……?”

“되도 않는 재능 믿고 너무 자만했어. 나 정도는 쌔고 쌨는데.”

“어……?”

……이게 아닌데.

그냥 조금 놀릴 생각이었지, 이런 분위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다린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 그…… 리안이 이상한 거지 오빠도 재능은…….”

“결심했다.”

“뭐, 뭘?”

“재능이 안 되면 그만큼 노력하면 되지.”

라이놀이 검을 들며 일어났다.

“의지해 달라고 했으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할 거 아냐.”

생에 처음 느껴 본 열등감이지만, 그는 그것마저 발판 삼고 나아갈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 * *

눈을 감고, 감각을 집중한다. 사방에 퍼진 마나가 느껴진다.

부족하다.

군데군데 비어 있다.

여기뿐 아니라, 이 세계 전체의 문제다. 적어도 ‘해방 왕’ 시절에는 이것보다 많았겠지.

듬성듬성한 마나가 대륙의 운명을 대변하는 것 같아 마음이 심란했다.

마나가 충분하다면, 멸망을 막을 수 있을까?

마나가 없었더라면, 멸망이 오지 않을까?

모르겠다.

마나를 노린 이계의 침략을 제외하더라도 엿 같은 세계니까. 지들끼리 자멸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지구도 툭하면 핵전쟁으로 멸망하는 영화가 나오곤 한다. 거긴 나라에서 관리라도 하지, 여긴 핵이 지들끼리 굴러다닌다.

“후우…….”

눈을 뜨며 잡생각을 털어 냈다.

지금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그보단 생산적인 일에 집중해야지.

심법을 배우는 건 조금 미뤄졌다.

라이놀이 말하길, 본인이 아직 가르칠 실력이 안 된다고.

확실히 심법 얻은 지 얼마 안 되긴 했다.

그냥 책 보고 익힐까 하다가 시간을 조금만 달라기에 기다리는 중이다.

“지루한데…….”

그냥 독학이라도 할 걸 그랬나.

운동도 끝냈고, 마나도 느껴 봤고, 심사도 아직 남았고. 남은 일이…….

“아.”

생각났다.

시르케 찾으러 가기 전날 밤, 부적으로 얼버무리면 된다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에 바로 타냐 깨워서 ‘증표’를 강요…… 아니, 부탁했었다.

대충 설명하긴 했는데, ‘증표’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보통 술사들은 배우자한테도 잘 안 준다.

언제 깨질지 모르니까.

헤어짐부터 준비하는 데서 21세기의 향취가 느껴지지만, 그만큼 중요시한다는 얘기다.

그러니 충분히 고민하고 답하라 했는데, 냅다 좋다더라.

다시 확인해 보러 가야지. 어차피 이제 후회해도 못 바꾸니까.

심심하기도 하고.

마음을 정하고 타냐 방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똑똑, 노크했는데 반응이 없다.

어디 나갔나? 아니, 얘 갈 곳 없는데.

혹시나 싶어 몇 번 더 두드리니 그제야 반응이 온다.

“누구야?”

“나, 리안.”

“……리안?”

끼이익.

바로 방문이 열리더니, 타냐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야?”

“뭐 하는데 노크 소리도 못 들어?”

“부적 쓰고 있었어.”

말하는데 눈이 퀭하다. 대체 언제부터 저러고 있던 거지?

“몇 장이나 썼는데?”

“10장.”

“……10장?”

처음에 12장을 쓰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계치다.

사람을 극한으로 모는 방법.

말년에 하는 유격 훈련에 비할 수 있겠지.

……생각해 보니 그건 좀 과하고, 그만큼 힘들단 소리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잘하는 일 생긴 건 좋은데, 적당히 해. 몸 상한다.”

“……응, 고마워.”

고개 끄덕이는 모습을 바라봤다.

갈 때 다섯 장만 가져가야지.

“근데 뭐 할 얘기 있어……?”

“전에 줬던 증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나 보려고.”

“증표?”

타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얘기해 줬잖아.”

“그렇긴 한데, 너무 쉽게 대답해서. 제대로 이해한 거 맞지?”

“……쉽게 대답한 건 아닌데.”

대답까지 10초도 안 걸렸으면서.

그리 생각하는데, 타냐가 고개를 떨궜다.

“……처음이었어.”

“뭐가?”

“내가 뭔가 할 수 있다는 거.”

“…….”

확실히, 지나칠 정도로 아무것도 못 하긴 했지. 황녀래도 커버 치기 힘든 수준. 부적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 다행이지, 그것도 못 했으면 그냥 잉여 인간이다.

그때, 타냐가 고개 들며 입을 열었다.

“황궁에서 도망치고, 숨어 다니면서 많이 느꼈어. 난 진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이젠 있지도 않은 나라 황녀라는 신분 빼면 나는 정말 보잘것없는 인간이구나…….”

타냐가 자조적으로 웃는다.

“그냥 죽을까 하는 생각도 몇 번 했어. 아니, 솔직히 죽을 생각이었어. 리안, 너랑 만나기 전만 해도.”

“…….”

생각한 적 없는 내용이다.

타냐는 본편에 등장하지도 않으니까. 단순히 설정상으로만 등장하는 인물. 16세. 바이론에게 죽다.

단 한 줄의 서술이 전부.

말문이 막혀 있는데, 타냐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 같은 것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준 건 리안, 너야.”

단호한 표정으로, 타냐는 말을 이었다.

“나한테 삶의 이유를 준 건 너란 말이야.”

“…….”

“그러니까, 증표 같은 건 몇 개든 줄 수 있어.”

“음…….”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왜 이런 분위기가 됐지? 어쩐지 무안했다. 대충 둘러대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타냐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미안한 것도 있고.”

“미안한 거?”

쟤가 나한테 미안할 게 뭐 있나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많았다. 몇 가지 떠오르는 기억을 정리하다, 그냥 물어봤다.

“뭔데?”

타냐는 한참을 망설이며 우물쭈물하더니, 곧이어 굳게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전에 네 마음…….”

“개소린 말고.”

“……미안.”

고개 숙이는 녀석을 바라보며 한숨 쉬다 자리를 떠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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