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8화
제268장 펄럭이는 깃 旚旗
“으갸갸갸! 언제부터 알았냐?”
오랜 시간 누워 있어 찌뿌둥했는지 기지개를 켜고, 상체를 이리저리 비틀면서 몸을 푼 주윤문이 물었다.
마치 푹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상쾌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주윤문의 모습에 나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저 망할 놈 때문에 누구는 발에 땀나게 뛰어다니고, 여자 친구한테 등짝도 맞고 했는데, 원인 제공자인 저놈은 세상 편안해 보이니 괜히 심술이 났던 것이다.
그에 나는 불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숨소리 자체가 다른데 왜 모르겠냐?”
방문을 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주윤문이 의식을 차렸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나의 말에 심술이 난 것을 느꼈는지 상체 비트는 것을 멈춘 주윤문이 나를 보더니 이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삐졌냐?”
“꺼져.”
“크크.”
나의 대답에 주윤문이 소리 내 웃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한 번 살짝 가로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계속 의식 없는 척한 거야? 아스나 공주 보고 싶지 않았어?”
“그녀가 속삭이는 사랑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역시.
수상하다 했더니 역시나였다.
장난스레 대답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주윤문의 모습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에 주윤문이 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맙다.”
“뭘.”
“그냥, 전부 다.”
진심 어린 녀석의 감사 인사.
그 말속에 담겨 있는 깊은 감정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은 다음 입을 열었다.
“시끄러, 새X야.”
오글거려 죽겠네.
“어허, 무엄하다.”
“무늬만 황제 주제에.”
욕설 어린 나의 대답에 주윤문이 짐짓 위엄 어린 모습을 보이며 말했고, 나는 피식 웃으며 맞받아쳤다.
그런 나의 장난스러운 맞받아침에 주윤문은 진심으로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야, 그 말은 진짜라서 상처인데…….”
“그럼 상처 안 받도록 빨리 움직여.”
과장된 행동을 하며 특유의 장난기를 선보이는 주윤문을 보며 한숨을 내쉰 나는 다시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서 일어나 움직이라고, 무늬만 황제가 아닌, 전과 같은 군주가 되라고 말이다.
그런 나의 말에 주윤문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나의 쪽으로 돌린 후 편안한 자세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황군이 움직인다고?”
“귀도 좋다.”
“밖에서 푸하하! 거리면서 다 떠벌리고 다니던데? 덕분에 꽤 많은 정보를 얻었어.”
누군지 짐작이 갔다.
푸하하라는 웃음소리에 반사적으로 불곰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을 구양적의 모습을 떠올린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공도 훌륭하고, 말도 잘 듣는 훌륭한 수하지만 솔직히…… 조금 부끄러웠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젓는 나의 모습에 진한 미소를 지은 주윤문. 그가 입을 열었다.
“괜찮은 수하인 거 같아.”
“난 누구랑 다르게 사람 보는 눈이 있거든.”
“그렇게 아픈 곳을 찔러야 속이 시원하냐?”
나의 대답에 주윤문이 나를 살짝 째려보며 말했다.
그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뭐, 여자 보는 눈은 있더라?”
“우리 아스나, 예쁘지?”
“은설이 더 예뻐.”
주윤문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아니야, 아스나의 정열적이고 활동적인 붉은 눈과 머리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
“밤하늘과 같은 은설의 검은 머리칼과 푸른 호수를 담은 듯한 아름다운 푸른 두 눈이 얼마나 예쁜데?”
“얼씨구?”
“절씨구다.”
피식.
서로의 연인을 자랑하기를 잠시.
뭐 같은 말장난에 약속이라도 한 듯 주윤문과 내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나 참, 어떻게 보면 우리도 참 인연이다.”
“갑자기?”
웃음기 어린 주윤문의 말.
그 말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주윤문이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마음도 잘 맞고, 여자 보는 눈도 똑같잖아. 이 정도면 너랑 나랑 운명인가.”
“꺼져라.”
징그럽기 그지없는 주윤문의 말에 나는 정색했다.
같은 양의 기운을 지닌 사내끼리 운명 이러고 있으니, 어찌 정색을 안 할 수 있겠는가?
그런 나의 정색에 주윤문이 다식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내가 정리할게.”
“그럴래?”
주윤문의 입에서 나온 말.
그 말에 나는 주윤문의 두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그에 주윤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자해지 結者解之. 이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남자도 아니지.”
“도와줄게.”
“이미 충분해.”
도와주겠다는 나의 말에 주윤문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냐? 자존심 버리고 형님한테 도움받아.”
“네가 왜 내 형님이냐?”
“꼬우면, 싸워서 이기시든가.”
“제길, 분하다.”
장난스러운 나의 말에 역시나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주윤문.
그런 우리 둘은 다시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역시, 마음이 맞는 벗이라면 이렇게 술 없이 나누는 시답잖은 대화도 즐거웠다.
* * *
“황군은 할 일도 없답니까? 국경에서 주어진 사명대로 나라나 지킬 것이지, 무슨 국경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 산동성까지 기어들어 온답니까?”
산동악가의 외원.
정문 너머 외부의 모습이 훤하게 보이는 높은 전각에 서서 전방을 살펴보던 야율민이 불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중얼거림이라 하더라도 짜증이 실렸기 때문일까? 야율민의 목소리는 제법 컸기에 옆에 함께 있던 사마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게, 네 말대로 진짜 할 일 없나 보다.”
“그렇죠? 하여튼, 이래서 녹봉 祿俸 먹는 놈들이 안 돼요.”
“크크.”
호들갑 어린 야율민의 비난.
그 비난에 가만히 서류를 읽고 있던 왕일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웃기 시작했다.
그에 야율민이 고개를 돌려 왕일을 바라보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요? 녹봉 먹는 만큼 훌륭하게 일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동지를 만난 듯 환한 미소를 지은 야율민.
그의 물음에 언제 웃었냐는 듯 왕일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잘 나가다가 갑자기 삐딱선을 타는 왕일의 대답에 환한 미소를 지었던 야율민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러고는 허리춤에서 두 개의 단창을 뽑아 왕일에게 겨누었다.
“너 솔직히 말해, 황궁의 첩자지?”
“민, 장난이라도 무기는 꺼내지 마.”
단창을 꺼내 든 야율민의 행동에 움찔한 왕일.
그런 둘의 모습에 사마천이 나서서 야율민을 말렸다.
어린 시절부터 야율민을 보아 왔으며, 같은 환경에서 자란 사마천은 그가 장난으로 응수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야율민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추구하는 사상도 다른 왕일의 입장에서는 야율민의 행동은 과하고, 과격할 뿐.
그런 사마천의 경고에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과했다는 것을 깨달은 야율민이 황급히 창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진지한 어조로 왕일을 향해 말했다.
“미안하다, 맨날 얼음이랑 곰탱이랑 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선을 넘은 것 같다.”
“장난으로 무기를 꺼내 드는 게 당연한 건가요?”
“아니.”
야율민의 사과에 왕일이 어이가 없다는 어조로 물었다.
그런 왕일의 물음에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은 야율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휘두르는 게 당연하다. 거동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의 작은 상처 또한 어느 정도 용납이 되지. 그저 장난일 뿐이니까.”
“…….”
“요즘 자주 붙어 다니다 보니 네가 걷는 길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깜빡했다.”
진심으로 미안하듯, 진지하게 말을 하는 야율민의 모습에 왕일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야율민의 행동은 그에게 있어서 당연한 것이었고, 사파인 자신에게 있어서는 무례한 것이었다.
아마, 정파의 입장에서는 시비가 아닐까?
아무튼, 서로 걸어가는 길이 다르다 보니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렇기에 사소한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이런 사소한 오해가 쌓이고 쌓여 서로를 배척하고 구분하는 지금의 무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왕일은 씁쓸함을 느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다름을 인지하고 이해해 주고, 야율민처럼 담백하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납득한다면 지금의 무림과 같은 상황도 없었을 것이다.
‘아쉽다.’
모든 무림이 상대의 길 道을 인정하고 존중하였다면, 황군이 무림을 멸하려는 지금의 상황에도 보다 쉽게 뭉칠 수 있을 텐데,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것도 잠시.
“신원 미상의 사람들이 다수 보입니다!”
두 귀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왕일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였다.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키며 소리치는 중년 사내, 광마대주가 말이다.
그런 광마대주의 외침에 사방 四坊을 경계하던 사마천, 구양적, 단진이 모여들었고, 곧
광마대주가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의 끝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저 너머의 끝에는.
“벌써?!”
사람으로 판단이 되는 검은 인영들이 전방을 가득 메워져 있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사마천이 소리쳤고, 왕일이 황급히 몸을 돌리더니 이내, 구석에 구비된 종을 향해 달려 긴 줄을 잡고 강하게 흔들었다.
땡땡!
그런 왕일의 행동으로 인해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산동악가를 울렸고, 그에 화들짝 놀란 모든 무인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어 전투태세를 취하며 서로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켰다.
“어서 교주…….”
그렇게 무인들이 전투태세를 취하는 동안 사마천은 황급히 입을 열어 위극신을 찾았지만.
“사마 형.”
익숙하고 차가운 음성이 그의 말을 막아섰다.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차가운 목소리.
그 목소리에 저절로 입이 다물린 사마천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의 주인, 단진을 바라보았다.
“적이 아니야.”
사마천과 두 눈이 마주치자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한 단진.
그에 사마천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푸하하! 맞다, 적이 아니다!”
단진의 옆에서 전방을 살펴보던 구양적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확신 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에 사마천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모든 내공을 끌어 올려 안력에 집중했고, 잠시 후.
“아……?”
희미하게 보이는 거대한 깃, 그리고 그 깃에 적힌 글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펄럭!
펄럭!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만들어진 검은 인영 떼.
그 인영들 사이로.
창천 蒼天
이라는 글귀가 적힌 깃과.
무당 巫堂
이라 적힌 깃.
그리고 뒤이어 화산 華山, 곤륜 崑崙, 사천 四川, 무림맹 武林盟 이라는 깃이 있었고, 또 다른 오른편에는.
백호 白虎, 흑룡 黑龍, 흑풍 黑風 이라 적힌 깃이 걸려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사황성 邪皇城 이라는 글귀가 적힌 거대한 깃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럴 수가…….”
산동악가를 향해 자랑스레 스스로의 깃을 내세우며 걸음을 옮기고 있는 각 무림의 세력들.
서로가 공존할 수 없을 것이라 여기었던 정파와 사파의 무인들이 함께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에 사마천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아…….”
긴장 어린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하던 모든 무인들이 감동 어린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