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_가족을 건드려(1)
유신의 행동에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가 놀랐지만, 가장 놀란 건 레이지였다.
10년간 자신의 이름을 밝혀왔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오빠인 라이언 쉐도우의 이름이 나온 적은 없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사람의 입에서 오빠의 이름이 나왔다.
‘라이어 쉐도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제…오빠를…아세요…?”
“네.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 살아 있나요?”
레이지는 이 말을 하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부정적인 답변이 들려오면, 지금까지 참아왔던 것들이 허무하게 끝날 것 같았다.
“아주 멀쩡히 살아있고, 지금까지 계속 동생을 찾아다녔습니다.”
유신의 말이 끝나자, 레이지는 지금까지 슬픔을 참아온 걸 무색하게 울음을 터트렸다.
희선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울고 있는 레이지를 안아주며, 유신을 노려봤다.
“아들 혹시 모솔이야? 어떻게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모르니?”
유신은 오해하고 있는 희선에게 간단히 사정을 설명했다.
사정을 들은 희선은 레이지를 더욱 꼬옥 안아줬고, 레이지는 울다 지쳐서 희선의 품에서 잠들었다.
***
“하아~ 여기서 만날 줄이야.”
너무나 손쉽게 라이언 선배의 동생인 레이지를 찾았다는 것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최실장이 음료와 다과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간단한 후식을 준비했습니다.”
“마침 부르려고 했는데, 앉으세요.”
“알겠습니다.”
다과를 내려놓은 최실장이 맞은편에 앉자, 입을 열었다.
“최실장님. 보안 등급이 어떻게 되세요?”
다짜고짜 보안 등급부터 물었지만, 최실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답했다.
“최고등급입니다.”
“그럼 얼만큼 아시는 거죠?”
“하유신님이 칼 제라니라는 것. 그리고, 13기동 타격대가 일루시안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그들이 누구인지 전부 알고 있습니다.”
“마리 선배가 제게 귀중한 인재를 보내 주셨네요. 좋습니다. 그럼 레이지 양에 대한 것은 보고가 올라갔나요?”
“아직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같이 보고하죠.”
“알겠습니다.”
아공간을 열어 교황청에서 지급해준 위성전화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곧바로 마리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린 후, 전화를 받았다.
-새벽부터 무슨 일이야?
마리는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지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특유의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죄송해요. 좋은 일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뭔데 그래?
“라이언 선배의 동생인 레이지 쉐도우를 찾았습니다.”
-뭐? 레이지를??
“네.”
-레이지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
***
국경 없는 의사회.
1971년 개설된 단체로 현재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는 비정부기구 의료단체다.
레이지는 라이언에게 말했던 대로 의사가 되었다.
정확히는 의대를 졸업한 후에 국경 없는 의사회에 몸을 담았다.
“레이지. 진료 보느라 피곤할 텐데, 여기 우물에 정화 좀 걸어줄 수 있겠어?”
“괜찮아. 그 정도는 끄떡없어.”
“고마워.”
레이지는 동료 의사의 요청에 따라서 우물 앞으로 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물에서는 꼬릿한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잠깐 인상을 찡그린 레이지가 우물을 향해 양손을 내밀었다.
“정화.”
손바닥에서 새하얀 빛이 쏟아졌다.
빛은 우물에 닿더니, 자연스럽게 우물 물에 녹아들었다.
“다 됐어?”
동료 의사의 물음에 레이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정화.”
레이지가 다시 한번 우물에 정화를 사용했다.
두 번째로 정화를 사용하고 나서야, 꼬릿한 냄새는 사라졌지만, 레이지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이 물을 떠서 조사 좀 해 줄 수 있어?”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그냥 불안해서.”
“괜찮은 것 같은데?”
하지만, 동료 의사는 레이지의 의견을 수렴했다.
지금까지 레이지의 예감은 대부분 적중했었다.
그래서 물을 뜨기 위해 우물로 향하려고 할 때였다.
“더는 다가가지 마.”
“네?”
봉사활동을 도와주기 위해서 교황청에서 온 인물이 우물로 다가가는 걸 막았다.
“조사해도 나오는 건 없을 거야?”
“네?”
“이 우물은 현재 마기가 섞여 있거든.”
“마기요?”
“그레이트 힐!”
교황청에서 온 인물. 마리는 우물을 향해 신성력을 발사했다.
“끼에에에엑!!”
신성력이 닿은 우물에서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이내 우물을 통해서 머리에 뿔이 달린 지네가 나타났다.
마수의 출현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할 때였다.
마리가 주먹에 신성력을 가득 담아서는 마수의 머리를 내리쳤다.
콰직!
머리를 잃은 마수는 발버둥을 치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우물 밖에 빠져나와 있는 마수의 몸을 잡은 마리가 그대로 지네를 건져 올리며 말했다.
“마비독과 환각독을 내뿜는 녀석이야.”
“그럼 우물은 사용하지 못하나요?”
“웬만한 능력자가 해독하지 않고서는 사용하지 못할 거야.”
“이 우물은 여기 마을 사람들의 유일한 식수인데…”
의사의 말에 마리는 자신의 신성력을 조금 더 사용해서 우물을 해독하려고 했다.
하지만, 레이지가 조금 더 빨랐다.
“정화. 정화. 정화. 정화….”
쉼 없이 우물에 정화를 사용하는 거였다.
“그만해. 일반적인 정화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어.”
“전 보통 정화 능력자보다 더 강해요. 그리고, 우리 오빠가 그랬어요. 제 정화 능력은 지구 최고라고. 정화!”
레이지는 탈진할 때까지 정화를 사용하고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헤~ 이제 괜찮을 거예요.”
마리는 깨끗하게 변한 물을 보며 어이없는 시선으로 레이지를 바라봤다.
“일반적으로 마기가 섞인 물이 자연 정화하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아니?”
“한 달 정도요?”
“아니. 최소 삼십 년이야. 그런데, 넌 오늘 그 삼십 년을 앞당겼어.”
“그래요? 그럼 물이 깨끗해졌다는 소리네요. 다행이네요.”
능력을 한계치까지 사용한 후, 탈진해서는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레이지를 보며 마리가 입을 열었다.
“이름을 알 수 있을까?”
“레이지. 레이지 쉐도우요. 언니는요?”
“나는 ******”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타이밍에서 마리는 잠에서 깨어났다.
요 몇 년 동안 레이지에 대한 꿈을 꾸지 않았는데, 오늘 다시 꾸게 되었다.
‘그때 강제로라도 레이지를 데리고, 교황청으로 왔어야 했는데…’
마리가 과거를 후회하며 머리를 감싸 안을 때였다.
띠띠띠
위성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유신이었다.
-새벽부터 무슨 일이야?
***
마리 선배는 게이트를 통해서 한국으로 곧장 들어온다고 말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그런 선배를 데리러 기동대 훈련장으로 곧바로 움직였다.
챙그랑
게이트 특유의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마리 선배가 나타났다.
“레이지 어디 있어?”
다짜고짜 레이지부터 찾는 마리 선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지금 집에서 쉬고 있습니다.”
“집? 왜 여기로 데리고 오지 않았어?”
“그게 울다가 잠이 들었거든요.”
“울어? 레이지가?”
순간 마리선배에게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네. 라이언 선배 이야기를 해주자마자 눈물을 흘리더니, 지금은 피곤한지 곤히 자고 있습니다.”
“뭐해? 빨리 안내해.”
“아. 네.”
마리 선배가 이렇게 서두르는 모습을 처음 봤다.
일단은 선배와 함께 미리 불러둔 콜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최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최실장님이네? 네. 최실장님. 지금 가고 있습니다.”
-유신님. 습격입니다.
“네. 습격이요?”
-수십의 능력자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지금 사모님과 레이지 양을 벙커로 대피시켰지만, 언제 뚫릴지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와주십시오.
최실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리 선배가 택시 지붕을 뚫고는 자신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쏘아졌다.
나는 서둘러 명함 하나를 택시 기사에게 건넸다.
“나중에 이곳으로 전화를 주시면 피해 보상해드리겠습니다.”
택시에서 내린 후, 하늘을 날다시피 앞으로 나아가는 마리 선배를 바라봤다.
벌써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자리를 박찼다.
콰앙
서 있던 자리에 작은 크레이터가 생겨나며 빠르게 이동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하고 속도를 내도 마리 선배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선배가 아무 생각 없이 서둘러 움직이듯, 자신도 다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집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가족들이 있었다.
‘제발…제발 모두 무사하기를…’
집으로 향하면서 가족들이 무사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지금 이 순간이 1초가 1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렇게 도착한 집은 반파되어 있었다.
“엄마!!”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지하에 위치한 벙커의 입구가 뜯겨 있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드득
순간적으로 적들을 향해 분노가 치솟았고, 앞이 붉게 변했다.
그때, 가슴에서 땅의 축복이 황금빛을 뿜어냈다.
그러자, 시야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황금빛이 사라졌을 때였다.
벙커에서 환한 빛과 함께 마리 선배가 가족들과 레이지, 그리고 최실장과 함께 위로 올라왔다.
“엄마!!!”
희선을 보자마자 달려가서는 꽉 껴안았다.
“몸은? 몸은 괜찮아?”
“엄마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가슴에 남아있던 불안감의 씨앗까지 모두 날아갈 때였다.
검은 암행복을 입은 사람들이 흉흉한 무기를 들고는 주위를 포위했다.
“마리 선배. 죄송한데, 가족들을 데리고 잠깐 벙커 안에 들어가 계실 수 있으세요?”
“…알았어.”
마리 선배의 몸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와서 주위 사람들을 덮쳤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대로 저항하기 전에 벙커에 빨려들 듯이 사라졌다.
“알지? 정보를 캐야 하니까. 몇 놈은 남겨놔.”
“알겠습니다.”
채앵
아공간에서 칠성검을 꺼냈다.
오늘 따라 칠성검은 더욱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을 때였다.
스아아악
재빨리 움직여서 적들 앞으로 다가간 후, 그 상태에서 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둘렀다.
후두두둑
핏물과 함께 암행복을 입고 있는 다섯 명의 상하체가 나누어졌다.
그걸 시작으로 바쁘게 움직이며 공격을 시작했다.
촤아아아악
솨아아아악
콰아아아앙
아무리 화가 났어도, 마리 선배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
처음 다섯의 목숨을 잃게 한 이후에는 단 한 명도 목숨을 빼앗지 않았다.
단지, 최소 팔 하나, 다리 하나가 몸에서 떨어졌다.
오십에 가까운 적들을 정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5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걸 정리했다고 생각할 때였다.
“애들한테 맡겼을 뿐인데, 이거 손해가 막심하군.”
언제 다가왔는지 양손에 클로를 낀 남성이 와 있었다.
다시 칠성검을 꽉 쥐고는 남성에게 검을 겨눴다.
“워워~ 진정하라고.”
“이 모든 걸 당신이 꾸몄습니까?”
“내가 꾸민 것은 아니지만, 우리 애들을 여기로 보낸 건 내가 맞기는 하지.”
“당신이 원흉이었군요.”
“원흉? 아냐. 나도 의뢰를 받은 거뿐이야.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지 말고, 어둠의 성녀만 나한테 넘겨, 그럼 나도 손해를 감수하고 그냥 돌아갈게. 어때?”
장난하듯 하는 말에 신뢰가 가지 않았다.
신뢰가 간다고 해도 레이지를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몰래 끌어모은 포스로 탄검기를 날렸다.
촤아아악
베었다고 느꼈지만, 곧 상대의 형상이 흐릿해지더니, 헛깨비가 되어 사라졌다.
섬뜩함을 느끼고는 뒤로 몸을 피했다.
콰직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에 클로가 박혔다.
“이야~ 감이 좋은데? 그런데 말이야.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치켜세워주니까. 네가 정말 영웅인 것 같아? 좋게 말하면 넌 루키일 뿐이고, 다르게 말하면 겉멋만 든 애송이일 뿐이야.”
촤아악
언제 다가왔는지 상대의 클로가 심장을 노렸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가슴을 길게 베이고 말았다.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며 상대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애송아. 이제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