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_빌리지 디펜스(6)
오랜만에 몸속 포스가 텅텅 비었다.
이대로는 먼지구름 안에 살아있는 오크 전사를 막을 수 없다.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을 수 없기에 주위를 둘러보며 싸울 무기를 찾아봤다.
그때 먼지구름 속 생명 반응이 사라졌다.
몬스터든 사람이든 죽게 되면 생명 반응이 서서히 약해지다 사라진다.
그런데, 먼지구름 속 생명체는 갑자기 사라졌다.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죽창을 들고선 긴장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을 때 리진수가 내 옆으로 조심히 다가왔다.
“고조 괜찮슴네까?”
나는 리진수에게 고개를 끄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 서서히 먼지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내가 죽창으로 폭격했던 곳에는 오크의 핏자국과 부서져 버린 할버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후우~”
오크 전사가 죽었다는 확신 때문일까? 아니면 급박한 전투가 끝나서 긴장감이 풀려서일까?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무너져 버렸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손은 수전증이 있는 것처럼 쉴 새 없이 떨렸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전투였지만, 지금은 이 승리를 만끽하고 싶었다.
나는 목책을 짚고 일어나 오른손을 높게 쳐들며 외쳤다.
“와아우!!”
내 승리의 함성이 마을 사람들에게 방아쇠가 됐는지 누군가는 풀썩 주저앉고, 어떤 이들은 서로 껴안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 살아났슴네까?”
“사···살아남았슴네다!”
“흑~ 오마니 보고싶슴네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네 번의 몬스터 침공이 있었고, 세 번의 전투가 진행됐으며,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전투가 끝났다.
나는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을 바라보며, 승리를 만끽하고 있을 때 리수진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뭣들 합네까?! 해가 지고 있슴네다!!”
고양감에 취해있는 마을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목책 밖으로 뛰어나가 아까처럼 시체를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승리의 여운을 만끽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닦달하는 리수진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막 전투가 끝났어. 사람들도 휴식이 필요해.”
내 말에 리수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지금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 들면 안 되는데, 석양 때문에 그런가? 리수진이 조오금 더 예뻐 보였다.
나는 쓸데없는 상념을 고갤 흔들어 털어내고 있을 때 리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조금 피곤한 게 낫지. 괴생물의 사체가 살아나면 어찌 될지 장담 못합네다.”
“휴~ 하지만···”
“근데 동무 갑자기 왜 반말입네까?”
“내가? 아니 제가 그랬나요?”
리수진은 유신을 흘겨보고는 다시 말을 잇는다.
“동무한테 도와 달라고 안 할 테니 쉬시라요.”
“괜찮아··· 아니 괜찮아요.”
유신도 한 손을 거들기 위해 목책을 벗어나려고 할 때 리수진이 유신의 앞을 막았다.
“동무는··· 아닙네다. 동무는 쉬시라요.”
“한 명이라도 도와야 빨리 끝나지.”
“그 몸으로 뭘 하겠다는 겁네까?”
리수진이 유신의 팔목을 붙잡고는 자신에게 당겼다.
누가 봐도 한계에 다다른 유신이 리수진에게 끌려와야 하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신은 평소에 13기동 타격대에서 언제나 한계까지 수련하곤 했다. 그렇기에 아직 조금의 여력은 남아 있었다.
반대로 유신의 팔목을 당겼던 리수진이 반동으로 유신에게 안겼다.
삼자가 보면 유신의 품으로 리수진이 뛰어든 형국이 된 것이다.
아주 잠깐 유신의 품에 안겨있던 리수진은 재빠르게 유신의 품에 벗어나며 따귀를 올려 쳤다.
유신은 리수진의 손이 자신의 뺨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왜? 리수진은 내 뺨을 공격하는 거지? 이걸 맞아줘야 하나? 아니면 그냥 피해야 하나?’
유신은 뭔지 모르겠지만, 그냥 맞아주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리수진의 손을 피했다.
“뭐···뭐하는 겁네까?!”
“그러는 리수진씨는 뭐 하시는 거예요?”
“······”
“그런데 제가 뭘 잘못했나요?”
“일 없슴네다.”
리수진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유신은 그런 리수진을 보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목책 밖으로 향했다.
***
“타닥 타닥”
땅거미가 진 평야에 유신과 마을 사람들이 불타고 있는 몬스터의 사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래 불안함네다.”
“고조 빨리 불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슴네다.”
“고만 돌아들 가자우.”
사람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마을로 돌아가려고 할 때, 불타는 몬스터들의 사체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크어어억~”
마을 사람들에게 정말 다행인 건, 밤에 기운과 마기의 영향으로 일어난 언데드들은 대부분이 하급이었다.
그리고 늦지 않게 몬스터 사체를 태우고 있어서 대부분의 언데드들이 괴성을 지르며 호기롭게 일어났다가 불에 타며 다시 쓰러졌다.
하지만, 오늘 하루 죽은 몬스터의 숫자가 어마어마했기에 멀쩡한 언데드들의 숫자도 꽤 많았다.
“크어어억!”
언데드는 생령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었고, 사기를 뿜어내며 다가왔다.
“고조 뭣들합네까! 날래날래 준비하라우~”
리수진이 얼빠져 있는 마을 사람들을 재촉해서 급하게 마을로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이 겁에 질려 마을로 돌아갈 때, 유신이 어디서 구했는지 이가 다 빠진 검을 들고 홀로 언데드 무리에 뛰어들었다.
유신은 좀비가 처음이지만, 다리우스 선배 덕분에 언데드는 이골이 났다.
그러니까 유신은 고블린 열 마리를 퇴치하는 것보다, 언데드 백 마리와 싸우는 게 마음 편하고 쉽다 느꼈다.
“오랜만이야!”
오크와의 전투에서 모든 포스를 소진한 유신이지만, 포스는 따로 명상이나 일주천을 할 필요 없이 천천히 회복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잠을 자거나, 운동만 해도 포스는 저절로 회복된다. 하지만, 포스는 빠르게 회복하지 못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유신은 검에 옅은 포스를 일으켜 사선으로 휘두르자, 고블린 좀비와 오크 좀비의 머리가 한 번에 날아갔다.
서걱!
좀비는 시독을 뿜어내서 일반 해골보다 더 강한 공격력을 자랑하지만, 썩어가는 몸으로 인하여 움직이는 속도가 현저히 느렸다.
그리고 이렇게 느려터진 좀비들에게 달려든 유신은 물 만난 고기가 돼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검을 휘둘렀다.
“이얍!”
유신은 힘찬 기합과 함께 좀비들의 약점인 머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공격하는 와중에도 아까 오크들과의 전투처럼 포위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비명을 지르는 근육을 애써 무시하며, 계속 자리를 바꿔나갔다.
“날래날래 태우라우~”
뒤늦게 횃불을 가져온 마을 사람들은 유신이 베어 넘긴 좀비들을 불태웠다.
그렇게 유신이 앞장서서 좀비들을 없애거나, 전투 불능으로 만들고, 마을 사람이 뒤처리하며 좀비들의 수를 줄여나갔다.
“하악~ 하악~ 하악~”
유신은 지쳐서 거친 호흡을 뱉어내면서 검을 휘두르는데, 희열에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유신의 검에 포스가 피어나자, 고블린 좀비가 갈라졌다.
“살아 있는 몬스터보다 너희 같은···”
피어오른 포스가 흔들리자, 코볼트 좀비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언데드들이 더 편해!”
검에 맺혀있던 포스가 날아가며 오크 좀비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대부분의 언데드들이 유신의 검에 머리가 날아갔다.
이제 남은 언데드는 단 세 마리뿐이고, 그들은 이성이 없기에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유신에게 다가왔다.
“크어어억~”
언데드의 무서운 점이 바로 이거다.
동료가 쓰러지고, 자신의 팔다리가 날아가도 생령에 대한 적의만 남고, 겁이 없다는 거다.
나는 비명을 질러대는 몸을 이끌고 좀비들에게 걸어갔다.
검에서 더는 포스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좀비가 손톱으로 내 얼굴을 할퀴기 위해 공격했다.
나는 검을 휘둘러 좀비의 손과 얼굴을 한 번에 베어냈다.
서걱~
퍼억!
이가 빠진 낡은 검은 언데드 좀비의 손을 베어내고, 얼굴에 틀어박힌 다음에 수명을 다하고 검신 중간부위가 부러졌다.
예전이었으면 검이 부러지면 당황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차분하게 옆에서 달려드는 언데드 좀비에게 부러진 검을 쑤셔 박았다.
푸욱!
맨손이 된 나는 마지막 남은 오크 좀비를 바라봤다.
뇌가 썩어서 분명 겁이 없다고 알려진 좀비가 잠깐 멈칫하는 것 같다.
좀비가 겁을 먹는다? 당연히 말도 안 된다.
나는 마지막 남은 오크 좀비에게 달려들며 주먹으로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퍽~ 퍽~ 퍽퍽퍽!!
포스를 다 사용해 아무런 기운도 맺혀있지 않는 유신의 주먹은 오크 좀비의 얼굴과 머리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오크 좀비는 손을 휘저어보기도 하고, 물려고도 했지만, 그런 저항들이 더욱 유신의 주먹을 매섭게 할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크 좀비는 머리가 곤죽이 되어, 손을 파르르 떨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하악~ 하악~”
유신이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뱉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렁이는 횃불에 비치는 유신은 오크 좀비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고, 입가에 미소가 맺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언뜻 보기에는 귀기가 서려 있는 유신의 모습에 언데드들을 불태우는 것도 잊었다.
“크아아아악!!!”
유신은 전투로 인해 몸에 밴 살기를 괴성과 함께 발산했다.
한껏 소리를 지르고 난 유신의 입가에 맺혀있던 귀기 서린 미소가 사라졌고, 매서워 보이던 눈빛은 다시 순둥순둥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쉽게 유신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을 헤치고 리수진이 유신에게 접근했다.
“괴생물 부르려고 그렇게 울음소리를 냅니까?”
“아 미안.”
“할 말이 있슴네다. 따라오시라요.”
“어··· 알았어.”
리수진이 몸을 돌려 마을로 돌아가고, 유신이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아이코!”
“···동무 방금까지 살아난 시체를 학살한 사람이 맞습네까?”
“헤헤~ 사실은 나도 지쳤거든. 앞도 잘 안 보이고, 당장이라도 누워서 자고 싶어.”
“에휴~ 잡으시라요.”
리수진이 유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신은 그런 리수진의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자신의 손을 거부할지 몰랐던 리수진은 무안한지 고개를 홱 돌리며 마을로 먼저 걸어갔다.
리수진이 떠나자 유신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은 수전증인 것처럼 쉼 없이 떨리고 있었다.
“날래 오시라요.”
저 멀리 리수진의 외침에 유신은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발을 움직였다.
“같이 가~”
마을 사람들은 언데드들을 불태우며 리수진과 유신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우리 수진이 시집 보내야겠슴네다.”
“그런 말하지말라우. 수진이가 경을 칠 겁네다.”
“동무들 피곤하지 않슴네까? 날래 끝내자우.”
마을 사람들을 뒤로하고, 리수진과 유신은 마을에 도착했다.
리수진은 유신을 데리고 마을에서 가장 큰 집으로 안내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리수진을 향해 유신이 얼굴을 붉히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동무 날래 안 들어오고 뭐합네까?”
“아니 저기···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그리고 지금 씻지 못해서 더럽기도 하고···”
유신의 말과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리수진은 뒤늦게 뜻을 파악하고는 얼굴을 붉히며 버럭 화를 냈다.
“남정네들의 머릿속은··· 거기서 얼어 죽으시라요!!”
쾅!
리수진이 문을 강하게 닫으며 들어갔고, 유신은 마당에 홀로 남아 머리를 긁적였다.
“농담이 너무 지나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