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0 최후의 싸움(8) : 황금의 군주.
지금 만수왕의 주위와 사방에 깔린 몬스터들의 시체 사이에서는 섬뜩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의 정체가 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게 무엇이든, 무려 만수왕을 미끼로 던져주고 만든 함정이라는 것.
고미의 힘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황금의 군주와 악몽이 판 함정이 그렇게 허술할 리는 만무했다.
- 우웅, 우우웅······.
아니나 다를까, 만수왕의 머리에 올라탄 채 계속해서 꿀밤을 먹이던 고미의 동글동글한 귀가 쫑긋하고 일어섰다.
“우, 우웃!?”
“이,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드래곤 놈이!”
그리고 꿀 주먹에 취해 의식을 잃어가던 호랑이의 눈동자에는 벌겋게 핏발이 섰다.
공포와 분노.
저 붉은 빛이 초월자인 만수왕을 죽일만큼 강하다는 의미였다.
- 파직, 파지직······.
“황금! 이 개자식! 나를 미끼로 쓴 것이냐!”
처절한 외침이 울려 퍼지는 순간, 아기곰 삼형제의 머리 위에 떠 있던 뇌운에서 다시금 전광이 흘렀다.
그리고는 바닥에 흐르던 불그스름한 기운들이 뒤엉키며 피처럼 붉은빛을 띤 기둥으로 변했다.
[ 수하! 작은 살쾡이와 함께 달아나라! ]
그 모습을 본 초콜릿색 솜뭉치는 황급히 손을 휘둘렀고,
“고, 고미!”
무형의 기운이 붉은 진의 경계에 서 있던 백천과 나를 밀쳐냈다.
“아웅이, 다웅이! 어서 이 몸에게 오거라!”
- 콰릉! 콰릉!
우리를 진 밖으로 밀어낸 원조 아기곰은 곧장 자신의 형제들을 향해 날아갔다.
아웅이와 다웅이 역시 만수왕을 두들겨 패느라 이미 진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니까.
도저히 탈출시킬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 순간, 하늘과 땅을 잇는 붉은 기둥들이 거대한 쇠창살처럼 변해 아기곰 삼형제를 가두었다.
“너희들도 모두 결계를 펼쳐라! 힘을 합쳐 이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다!”
“아, 아우우웅!”
큰 곰돌이의 지시에 따라 새카만 흑곰덫 위로 거대한 얼음벽이 뒤덮였고,
“다웅!”
그 위로 다시 단단한 대나무가 뒤엉키며 삼중의 방어막이 완성됐다.
- 콰릉!
방어막이 완성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붉은 기운과 융합된 번개들이 연달아 폭발을 일으키며 화산이 터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를 뿜어냈다.
“아, 안돼!”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지만, 백천이 온 힘을 다해 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사숙조!”
“이거 놔!”
“지금 저 근처로 다가가시면 틀림없이 죽습니다!”
“하, 하지만 고미가!”
그간 제법 많은 초월자들의 싸움을 지켜봤지만, 이런 위력을 가진 공격은 처음이었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 저 공격은 고미의 ‘진, 만천화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 대체 이건 뭐냐고!’
- 쿠릉, 쿠르르릉!
섬뜩한 빛을 뿜어내는 벼락들이 한점으로 응집되자, 다웅이의 대나무 결계에 삽시간에 균열이 일어났다.
바로 그때······.
[ 수하님! ]
용귀의 입에서 검은색과 금색이 뒤섞인 빛줄기 하나가 뛰쳐나왔다.
[ 도, 동이님! 저, 저게 대체 뭐죠? ]
[ 용족의 금술입니다! 설마 저런 저주받은 술법을 사용할 줄은······. 어서 검은빛이 나오는 곳으로 가서 땅속에 묻혀 있는 붉은 돌을 찾아 부수십시오! ]
본래 모습으로 변한 동이님이 용귀 주변을 날아다니던 황금의 군주의 수하들을 날려버리며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순간, 전장 곳곳에 검은 빛기둥이 생겨났다.
동이님의 마력으로 만든 표식이었다.
[ 백천, 움직일 수 있겠어? ]
[ 걱정 마십시오, 사숙조! ]
나와 백천은 곧바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검은 기둥을 향해 달려갔다.
[ 김수하! 너 있는 쪽으로 사랑이들하고 케르베로스 보냈다! ]
이어서 거대한 사자의 환영에 둘러싸인 봉식이가 수십 명의 헌터를 이끌고 다른 기둥을 향해 돌격했고,
[ 나와 인국은 다른 인간들을 지키고 있겠다! 부상자는 이쪽으로 보내라! ]
[ 저와 신 팀장, 문경준은 저쪽으로 가겠습니다! ]
[ 저랑 알틴도 갈게요! ]
용귀 근처의 헌터들을 지휘하고 있는 흑암 콤비와 공중전을 지휘하고 있는 이유찬 씨, 제르보나를 제외한 숲속 친구들 모두가 가장 가까운 표식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 크르르릉!
표식 근처에는 이미 수백에 달하는 몬스터 무리가 대기하고 있었다.
[ 백천! 조심해! ]
[ 걱정 마십시오! ]
하지만 나도, 백천도, 멈출 마음은 없었다.
- 쾅! 꽈르릉!
머리 위에서는 수시로 뇌성이 울렸다.
표식 근처로 다가갈수록 몬스터들은 더욱 미쳐 날뛰었다.
발밑에서는 예고도 없이 불기둥이 폭발했다.
번개가 떨어지고 불기둥이 터지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방에서 쉴 새 없이 울리는 폭음과 비명이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이······.’
함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아군까지 제물로 삼아 우리를 죽이려 들 줄은 몰랐다.
사상자는 몇이나 될까?
가슴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몬스터를 베어나갔다.
앙다문 입술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굉음에 귀가 먹먹해졌다.
정신없이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첫 번째 붉은 돌을 발견한 순간, 십여 명의 헌터들과 사랑이, 케르베로스가 몬스터 무리를 뚫고 나타났다.
케르베로스의 등에는 토생원이 타고 있었다.
[ 무신님! 어서 이리로! ]
사랑이와 케로베로스의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고, 녀석들과 함께 달려온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상자가 몇이나 되는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 김수하! 하나 부쉈다! 다음으로 간다! ]
[ 수하 씨, 하나 부쉈습니다! 저희도 다음으로 가겠습니다! ]
[ 이쪽도 하나 부쉈어! ]
빠르게 하나의 보석을 부순 나는 곧바로 토생원의 도움을 받아 부상을 치료한 백천과 두 조로 갈라져 다음 돌을 부수러 달려갔다.
[ 고미! 무사한 거야!? ]
웅톡방으로 고미에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삼중 결계 중 두 개가 부서지고, 흑곰 덫에도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겨나 있었다.
‘아, 안돼. 시간이······.’
[ 김수하! 하나 남았다! 그게 마지막이야! ]
그때, 봉식이의 목소리가 또다시 머릿속에 울렸다.
- 콰지직!
나는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마지막 붉은 돌을 부쉈다.
하지만 마지막 돌을 부쉈음에도, 곰돌이 삼형제를 가두고 있는 붉은 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번개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이 이전보다 조금 더 약해졌을 뿐이었다.
‘어, 어째서······!’
당황한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동이님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검은 반점에 뒤덮인 황금색 드래곤이 전력을 다해 붉은 감옥으로 달려드는 것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 쾅!
“우오오오!”
서, 설마······. 저 번개를 몸으로 뚫으려 하시는 건가.
처음부터 이 돌들을 부숴도 저 번개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거야.
- 콰릉! 콰릉!
동이님이 몸을 던져 붉은 번개를 약화시키자, 또 다른 뇌운 하나가 나타나 벼락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이님은 그 벼락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동이님의 거대한 몸 곳곳에서는 선혈이 낭자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고미님! 지금입니다!”
오랜 친구의 목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운 뇌성을 뚫고 울려 퍼지는 순간,
“우오오오오오!”
우렁찬 함성과 함께 흑곰 덫이 부서지며 황금색 솜뭉치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 콰앙!
금색 유성처럼 하늘을 가르고 날아간 아기곰의 주먹에, 하늘을 뒤덮고 있던 거대한 뇌운이 빠른 속도로 흩어졌다.
“헉, 헉······.”
그러나 방금 전 동생들을 지켜내기 위해 상당히 많은 힘을 쓴 것인지, 전에 없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순간, 저 멀리 하늘 위에서 태양처럼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며 낮은 목소리 하나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참으로 추하구나. 하등 종족과 손을 잡는 것으로도 모자라, 저런 하찮은 놈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냐?”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눈부신 빛이 잦아들자, 전장 곳곳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나 역시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작은 흠집 하나 없는 완벽한 금빛의 몸뚱이.
하나하나 신이 직접 빚어낸 것 같은 매끈하고 단단한 비늘.
우아하면서도 위엄이 넘치는 뿔과 발톱, 그리고 날개까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완벽한 예술품도, 감히 눈앞의 이 생명체와 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잔인하고 오만한 성품과 대비되는 아름다운 모습에, 나는 스스로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참으로 역겹구나. 하등 종족들과 손을 잡고 고향을 침략하다니.”
“나는 드라고니아를 침략한 것이 아니라, 해방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저 냄새나는 작은 짐승과 말이냐?”
고미를 바라보는 황금의 군주의 시선에는 바퀴벌레를 보는 사람의 그것처럼 경멸이 가득 묻어났다.
“뭐, 뭣이!? 이, 이, 사악한 악당 놈이! 위대한 이 몸은 언제나 깨끗하게 몸을 씻고 있다! 냄새 따위는 나지 않는단 말이다!”
고미······. 아니야, 그런 의미가 아니야······.
“아, 아웅!”
“다웅!”
이어서 ‘외출 후에는 반드시 손발을 씻는다’는 규칙을 아주 잘 지키고 있는 아웅이와 다웅이도 흥분해서 솜방망이를 휘둘러댔다.
······.
모르겠다, 모르겠어.
얘들이 어디까지 진심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거짓말은 못 하는 착한 곰돌이들이니, 진심이기야 하겠지만······.
대체 어디부터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건지 설명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추할 뿐 아니라, 아둔하기까지 하군. 어째서 우리 일족이 아니라, 저런 멍청한 짐승이 대균열의 수호자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지?”
황금의 군주는 역겹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의무를 저버린 일족, 이제와서 그런 이야기를 할 자격 따위는 없을 텐데?”
“그럴 리가, 나는 저 냄새나는 녀석을 죽이고 다시 대균열의 수호자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대균열을 통해 모든 차원을 지배할 것이다.”
황금의 군주의 말을 듣는 순간,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확실히 고미와 관리자의 설명에 따르면, 대균열은 모든 차원과 통하는 교차로와도 같은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수호자가 되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차원을 자신들의 땅으로 삼겠다니······.
‘미, 미쳤어.’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그 야망을 위해 일족의 금술까지 사용해가며 고미님을 죽이려 했던 것이냐?”
동이님의 질문에 황금의 입가에는 가소롭다는 듯한 미소가 어렸다.
“하, 야망이 아니라 섭리다. 우주에서 가장 우월한 종족인 우리가, 제 앞가림도 못하는 하등한 종족들에게 질서를 주는 것이다.”
“그 질서에 누가 동의했더냐?”
“동의는 필요하지 않다. 내가 모든 차원을 지배하게 되면, 그 누구도 나의 허락없이는 다른 차원을 침략하지 못할 테고, 그때가 되면 모두가 내가 옳았음을 알게 될 테니 말이다.”
“그 과정에서 적을 만나면, 지금처럼 힘없는 자들을 제물로 금술을 사용해가면서 말이냐?”
동이님은 그렇게 말하며 황금의 군주에 벼락에 맞아 죽은 몬스터들을 가리켰다.
“금술을 완성하기 위해 일부러 저 녀석들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더냐?”
“쯧, 역시 너의 발상은 나약하기 짝이 없구나. 한낱 먼지만도 못한 놈들을 질서를 위한 초석으로 삼아주었으니, 오히려 나에게 감사해야지.”
정말로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지금 황금의 군주가 하는 말이 변명이나 그럴싸한 거짓말이 아니라 완벽한 ‘진심’이라는 점이었다.
“네, 네 이놈!”
바로 그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원조 아기곰이 씩씩거리며 버럭 호통을 쳤다.
“위대한 이 몸을 당하지 못하겠으니, 비겁한 수를 쓴 것 뿐이 아니더냐!”
그리고 황금의 군주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거, 거짓말! 거짓말이다! 이, 이 교활한 도마뱀 놈아! 거짓말하지 말거라!”
어딘가에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