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9 최후의 싸움(7) : 호랑이 기운은 무슨.
“크하하하하하!”
고미가 무언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천마의 입에서 더할 나위 없이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미련한 놈, 전장에 나서는 무인이 죽음을 두려워하겠느냐? 이 위가, 비굴하게 연명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죽이거라!”
자신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표정과 말투.
실로 호방한 그 태도에, 오히려 천마를 인질로 잡았던 장본인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 이 미친놈이!”
만수왕의 날카로운 발톱이 천마의 몸을 옥죄었으나,
“으하하하! 발악을 하는구나! 수많은 아수라장을 헤쳐온 내가 고작 괭이의 발톱에 비명이라도 지를 줄 알았느냐?”
칼날 같은 발톱이 몸을 파고드는 데도 백천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광소를 터뜨렸다.
“우, 우웃······. 자, 작은 살쾡이!”
하지만 친구라면 죽는 시늉이 아니라 진짜로 제 목숨도 내줄 수도 있는 의리파 아기곰은 그대로 자리에 멈춘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우하하! 참으로 우습구나, 고미! 홀로 이 만수왕의 군대를 짓밟았던 네놈이, 친구가 생기니 오히려 더 약해졌단 말이냐!”
만수왕의 말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저 자식이······.’
이제야 겨우 친구들이 생겨서 행복해진 고미에게 감히 저딴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달려들어서 뚝배기를 깨버리고 싶다.
하지만 지금 나는······.
< 체질 변환이 완료되었습니다. >
< 환곰탈태로 인해 체력과 기력이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
바로 그때, 꿀태창이 빛나며 온몸에서 힘이 솟는 것이 느껴졌다.
심지어 벼락에 맞기 전보다도 컨디션이 좋았다.
발은 깃털처럼 가볍고, 전신의 진기가 대하처럼 막힘없이 흐르는 것이, 정말로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좋아, 관리자. 처음으로 마음이 맞는구나.’
너도 내가 저 비겁한 악당 놈을 혼내주길 바라는 거지?
하지만 몸이 회복되는 순간, 여태 나를 보지 못했던 S급의 몬스터들이 하나둘 발길을 멈추었다.
‘응?’
살곰살곰은 여전히 활성화된 상태.
그런데 갑자기 나의 기척을 알아차렸다는 건······.
‘기가 회복되서 그런 건가?’
이에 나는 시험 삼아 기의 운행을 최대한 늦춰보았다.
거의 죽은 사람처럼 기의 흐름을 느리게 만드는 것 정도는 지금의 나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 크륵?
- 크릉?
그러자, 놀랍게도 몬스터들이 다시 나를 그냥 지나쳐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거구나······.’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진정한 살곰살곰은, 단순히 기척을 죽이는 게 아니라 기의 흐름까지 조절해 상대의 오감은 물론이고 육감, 기감까지 속이는 것임을.
<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
< 살곰살곰의 등급이 대폭 상승합니다. C -> S >
“웅 노사!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진정 이 위가를 위하신다면, 제가 죽고 나서 이놈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어 복수해 주십시오!”
그때, 천마의 목소리가 또 한 번 전장에 울려 퍼졌다.
‘무, 무서워.’
멋있긴 한데, 말하는 게 너무 무섭다.
“저로 인해 웅 노사와 다른 노사들의 손속이 어지러워진다면, 살아남는다 한들 그 치욕을 어찌 견디란 말입니까? 이 위가에게 천마다운 죽음을 선물해 주십시오!”
안 되겠다, 이대로 두면 만수왕이 뭘 하기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기세야.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면 모를까, 멀쩡한 상태에서 손가락만 빨고 구경할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 백천은 날 지키려다 저렇게 된 거니까.
게다가 만수왕도, 황금의 군주도, 다른 몬스터들도, 온통 고미에게 신경이 쏠려 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이걸 잘 이용하면, 반드시 백천을 구할 수 있을 거다.
[ 백천, 잠깐만 기다려. ]
[ 우, 우웅?! ]
[ 다, 다웅!? ]
[ 아웅!? ]
[ 사, 사숙조? ]
[ 수하씨!? ]
[ 김수하! ]
짤막한 한마디에, 웅톡방이 발칵 뒤집혔다.
[ 수, 수하! 살아 있었느냐!? ]
고미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 고미, 내 위치, 느껴지지? ]
하지만 나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감동적인 재회(?) 같은 걸 하고 있을 타이밍이 아니니까.
그러다가는 작은 살쾡이가 죽어버린다고.
[ 느, 느껴진다! 너, 너의 살곰살곰이 더욱 훌륭해졌구나! ]
지금 나의 위치는 고미의 뒤쪽.
단, 살곰살곰으로 인해 고미 외에는 누구도 나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백천을 구하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 만수왕이 눈치채지 못하게 친구들에게 내 위치를 알려줘. ]
작전을 전달한 나는 곧바로 웅톡방을 통해 봉식이에게 ‘마음에 걸리는’ 것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 민봉식, 고미가 내 위치를 알려주면, 여기와서 가짜 고미를 지키고 있어. 지금 상태로는 반항도 못 하겠지만, 만약 반항한다고 해도 지금의 너라면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거야. ]
말을 마친 나는 곧바로 바닥에 죽은 것처럼 누워있는 가짜 고미의 몸에 손을 얹었다.
아직 숨은 쉬지만, 몸에서 느껴지는 기는 지극히 미약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지금 낼 수 있는 힘은 잘해야 A급 몬스터 수준일 거다.
[ 무, 무엇이!? 그 가짜 녀석을? ]
[ 수하 씨,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
예상했던 대로, 숲속 친구들의 반응은 상당히 격렬했다.
[ 저한테 생각이 있어요. 아무 말 하지 말고, 절 믿어주세요. ]
[ 우, 우웅······. 하, 하지만······. ]
[ 고미, 날 믿어줘. ]
[ 흐, 흐음······. 아, 알겠느니라. ]
그러나 나의 단호한 태도에, 누구 하나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근거도 이유도 없이 괜한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건 이번도 마찬가지고, 숲속 친구들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 그럼 나머지도 동의한 걸로 알게요. ]
말을 마친 나는 곧바로 웅기조식을 활용해 가짜 고미의 숨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치했다.
지금 나의 머릿속에는 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 고북 대왕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재생되고 있었다.
「 그리고 조부님께서는, 최후의 싸움에서 수하님이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일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
이유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선택의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선대 고북은 나에게 그때가 오면 오직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아무리 적이라도, 고미와 똑닮은 이 녀석이 이렇게 비참하고 외롭게 죽어가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 녀석의 언행도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고.
그러니까, 일단 살리고 이야기를 들어볼 거다.
이게 내 마음이 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고미가 행복하기를, 그리고 숲속 친구들이 앞으로도 쭉, 지금까지처럼 고미와 함께 해주기를······.
‘이 녀석을 살리는 게 어떻게 그런 걸 가능하게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관리자도 안전하다고 승인을 해주었고, 이렇게 약해진 녀석이 무언가 위험한 일을 벌일 수는 없겠지.
[ 알았다. 그런데, 그 가짜가 어디있는데. ]
가짜 고미의 호흡이 안정되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봉식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 고미, 봉식이한테 내 위치를 알려줘. ]
[ 우, 우웃! 알겠다! 봉식이! 위대한 이 몸의 꼬리를 보거라! ]
말을 마친 고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선 채 토실토실한 궁둥이를 씰룩거려 짤막한 꼬리로 열심히 내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풋······.’
< 허곰답보(S)가 활성화됩니다. >
그 귀여운 모습에 적잖이 긴장이 풀어져 버린 나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리며 빠르게 만수왕의 시선을 피해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 백천, 조금만 참아. 가능하면 시선을 끌어줄 수 있겠어? ]
[ 알겠습니다. ]
답을 마치기 무섭게, 갑자기 만수왕의 손에 잡힌 천마가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자, 어서 죽여 보아라! 이 위가! 꼬리를 말고 도망친 개에게 사내다운 죽음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아니······.
얘는 왜 이렇게 무서운 게 없는 거야.
시선을 끌라고 했다고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
“이, 이놈이!”
“으아아아악!”
그 순간, 천마의 입에서 처음으로 처참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 비명이 연기라고 확신했다.
백천의 성격상 죽으면 죽었지, 저렇게 비명을 지를 리가 없으니까.
“고, 고미! 다가오지 마라! 봐라, 이 녀석이 이렇게 비명을 지르고 있질 않느냐!”
천마의 명연기(?)에 걸려든 만수왕의 시선이 백천과 고미의 얼굴 위를 바쁘게 오가는 사이, 주위의 풍경이 빠르게 변하며 은회색의 털로 뒤덮인 거대한 호랑이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에 나는 망설임 없이 살곰살곰을 활성화한 채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웅혼참!’
그리고는 머릿속으로 이강혁 씨가 사용하던 초식을 떠올리며 있는 힘껏 검을 내리쳤다.
영웅검법은 선제 공격에는 적합하지 않으니까.
“이, 이런!”
그제야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만수왕은 황급히 몸을 돌려 백천을 나에게 들이밀었다.
‘이 개자식이!’
백천을 방패로 삼는 그 모습에,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 아웅아, 얼음 마법! ]
그 순간, 아웅이의 솜방망잉에서 새하얀 냉기가 뿜어져 나오며 만수왕의 팔에 살얼음이 끼었다.
“이, 이익!”
Ex급 (추정) 얼음 마법에, 만수왕의 움직임이 잠시나마 느려졌다.
- 챙!
이윽고 얼음이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다웅이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죽창으로 만수왕의 옆구리를 공격했고,
“이노옴!”
고미의 솜방망이가 만수왕의 팔뚝을 내리치며 백천이 풀려났다.
- 탓!
그와 동시에 나는 백천을 안고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아아, 안돼!”
인질을 빼앗긴 만수왕은 미친 듯이 발악을 하며 나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 쾅!
몸을 돌리기 무섭게 꿀주먹이 녀석의 안면을 향해 날아들었다.
“네 이놈!”
“아웅!”
“다웅!”
지금 녀석의 정면과 좌우에는 전에 없이 분노한 아기곰 삼형제가 서 있었다.
저 공포의 아기곰 삼형제에게 둘러싸인 이상, 녀석의 운명은 정해진 거나 다름이 없지.
“아우웅······!”
“다우웅······!”
“네 이놈!”
“비, 빌어먹을! 대체 이 작은 곰새끼 두 마리는 뭐냐!”
겁에 질린 만수왕은 미친 듯이 발악하며 앞발을 휘둘렀다.
실로 만수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빠르고 강력한 공격.
단순한 빠르기만 놓고 따지자면 황금 곰으로 변하기 전의 원조 아기곰에 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 쐐애애액!
거대한 발톱이 바람을 찢어발기는 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본능적인 공포를 자아냈다.
“다웅!”
“아웅!”
심지어 다웅이와 아웅이가 양쪽에서 공격을 가하는 데도 민첩하게 그것을 피하고 막아가며 반격까지 해내고 있다.
‘괜히 만수왕이 아니군.’
다만, 만수왕의 움직임에는 한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체계가 없어.’
만수왕의 움직임은 야성과 본능의 집합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더 예측하기 어렵고, 저 정도 속도와 힘이라면 저런 본능적인 움직임이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저 녀석의 강함이 타고난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욱 화나게 했다.
저놈은 자신을 제대로 단련한 적이 없는게 분명했다.
그저 상상을 초월하는 피지컬과 타고난 강함을 바탕으로 주위 사람들을 짓밟고 괴롭혀왔을 뿐이다.
그런 놈이 아기곰 삼형제의 협공을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지.
“감사합니다, 사숙조. 저는 괜찮으니 이제 전장으로 돌아가시지요.”
“아니야, 조금만 더 치료해줄게.”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백천을 치료하며 그 전투를 지켜보았다.
내상은 웅기조식으로 어떻게든 해줄 수 있지만, 이 정도 심각한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역시 수다르 님이 필요하니까.
- 콰드드득!
바로 그때, 아기곰의 꿀주먹이 만수왕의 앞발을 뚫고 녀석의 안면에 적중했다.
“끄아아악! 이, 이 빌어먹을 곰새끼가!”
녀석의 입에서는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웅!”
- 퍽!
원조 아기곰이 빈틈을 만들자, 이번에는 다웅이의 죽창이 놈의 엉덩이를 강타했다.
- 빡!
죽창 다음으로는 아웅이가 달려들어 만수왕의 머리통에 커다란 얼음 덩어리를 내리꽂았다.
“아악!”
- 퍼벅!
일단 한 번 공격이 성공하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거의 일방적인 매타작이 이어졌다.
“네 이놈!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
- 퍽!
만수왕 역시 칼날 같은 발톱과 이빨로 계속해서 반격을 가했으나,
- 퍼버벅!
그때마다 돌아온 것은 그 몇 배나 되는 꿀주먹 연타였다.
“네 이놈! 감히 이 몸의 친구를!”
분노한 아기곰은 아예 만수왕의 머리에 타고 올라 녀석의 머리채를 붙잡은 채 계속해서 꿀주먹을 날려댔다.
“이놈! 이놈!”
“으, 으으으······.”
그렇게 저항할 힘마저 잃은 듯 무너져 내리는 만수왕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후련함과 동시에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상해······.’
만수왕이 초주검이 되고, 숲속 친구들을 필두로 한 인간들이 빠르게 전선을 밀어붙이고 있다.
요새화된 용귀와 딱총 새우 부대의 지원사격, 드라고니아 반란군에 의해 제공권마저 점점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다.
이대로 두면 우리의 승리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왜 악몽의 군주와 황금의 군주는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지?’
이상한 건 그뿐이 아니었다.
황금의 군주의 뇌운은 여전히 아기곰 삼형제의 머리 위에 떠 있었지만, 번개는커녕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때, 무언가 섬뜩한 것이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 이거였어!’
이 개자식들, 만수왕까지 미끼로 던져준 거야!
“고미, 아웅아, 다웅아! 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