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7 갓-고미님의 고오급 선물.
“저곳이 바로 너희들이 살 새로운 집을 지을 곳이냐!?”
의자에서 뛰어내린 아기곰은 꼬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흑암이 집을 만들겠다며 터를 닦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저러지? 설마 선물로 집 짓는 걸 도와주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불안하다.
마음은 알겠지만, 그건 선물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까.
흔히들 ‘마음만 받겠다’고 하는데, 이건 정말 마음만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선물이다.
안 그러면 잠든 사이에 천장이 무너져서 지나치게 채광이 좋은 집이 되거나, 벽이 무너져서 통풍이 지나치게 좋은 집이 될지도 모르니까.
“고미류 소환술…….”
하지만 고미의 보드라운 젤리가 땅바닥에 닿는 순간, 나는 녀석이 선물이라는 이름의 테러를 감행하려는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대웅전(大熊殿)!”
- 드드드득!
우렁찬 소리와 함께 땅이 울리고, 널따란 공터 위에 거대한 목조 건물 하나가 솟아났다.
“와아!”
“삐이!”
“허허, 이것이 바로 대웅전이군요.”
절에서 볼 수 있는 대웅전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목조 건물의 모습에 알틴과 한유진 씨, 수다르님의 입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후후, 어떠하냐? 이 몸이 준비한 선물이! 아주 멋지지 않느냐?”
얼핏 보기에도 100평은 넘는 웅장한 저택이 갑자기 솟아나자, 흑암과 노인국 씨, 토생원도 반쯤 넋을 놓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수다르 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고미님, 이것은 본래 고미님의 거처가 아니옵니까.”
“이 몸에게는 이미 새집이 생기지 않았느냐. 이제 이 몸은 가족들과 함께 살 것이니, 너희를 위해 위대한 이 몸의 숨결이 곳곳에 묻어있는 이 대웅전을 하사하도록 하마.”
“허나 고미님, 대웅전은 동이님이 선물한 것인데, 저희에게 주어도 될런지……. ”
“괜찮다, 이 몸이 너희를 위해 자신이 만들어준 집을 선물해줬다는 것을 알면 녀석도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다. 동이는 이 몸이 언제나 친구들에게 멋진 선물을 주고 싶어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니 말이다.”
내 생각 역시 고미와 같았다.
상식적으로, 자신이 준 선물을 누군가에게 넘겨주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하지만 언젠가 친구와 가족이 생길 것에 대비해 마법의 꿀스카프를 만들어 놓을 정도로 고미를 생각하는 것이 동이님이다.
그러니, 그 소중한 친구들을 위해 자신의 선물이 쓰였다는 걸 알면 화를 내기는커녕 진심으로 기뻐해 주겠지.
동이님 역시 고미만큼이나 외로웠던 존재라,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때, 말을 마친 고미가 자신의 젤리와 똑 닮은 문고리를 잡아당겨 대웅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 이 정도면 너희 모두가 함께 살기에도 충분하지 않겠느냐? 게다가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갔을 때 대웅전을 소환하면 이 안에 있는 너희의 물건도 그대로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언제 어디서든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먹고, 이 안에서 편히 잘 수 있지 않겠느냐?”
음……. 말하자면 이동식 호텔이나 다름이 없는 건가.
‘확실히 편리하긴 하겠네.’
어째서 노는 쪽으로는 나도 생각하지 못한 멋진 계획을 척척 내놓는 걸까.
이게 바로 수천 년간 놀 궁리만 해온 아기곰의 내공이라는 건가.
하지만 기쁨도 잠깐…….
대웅전을 둘러보던 숲속 친구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들의 시선은 벽에 그려진 ‘웅장한’ 벽화와 ‘웅혼한 기상이 담긴’ 조각상에 고정되어 있었다.
“허허허, 이렇게 멋진 벽화까지 그려져 있다니, 이 그림으로 인해 이 저택이 한층 더 멋스럽게 느껴지는군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자, 고미의 충신 1호이자, SSS급 사회생활 스킬의 보유자, 수다르 님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후훗, 수다르, 역시 너는 보는 눈이 있구나. 가족들과 친구들이 생기며 이 몸의 예술 세계가 한층 더 깊어졌지만, 이것 역시 제법 쓸만한 걸작이지.”
…….
그렇구나, 깊이가 생기셨구나.
심지어 깊이가 생기기 전에도 거장, 아니, 거웅이었고 말이야.
“허허, 본래 거장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기부터 완성된 시기까지의 변화를 살펴보아야 하지요. 경우에 따라서는 초기작이 더욱 가치가 있기도 하니, 참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선물을 받은 것 같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수다르님…….
고미의 작품이 정말 ‘아기곰 특별전’을 열만큼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후훗, 그렇다. 이 벽화와 조각상도 대웅전과 함께 선물하도록 하마. 매일 매일 진정한 곰의 위대한 여정이 담긴 작품과 함께 눈을 뜬다면, 언젠가 너희들도 이 몸처럼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작은 거장의 말에, 흑암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흐, 흐흠……. 그, 그렇군. 나는 인간들의 예술은 잘 모르지만, 무언가 굉장한 힘이 느껴진다.”
음, 이 분도 의외로 거짓말을 못하는 구나.
음모는 잘 꾸미지만, 이런 종류의 거짓말에는 약한 모양이다.
그래도 어설프나마 고미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해주다니, 정말 새 두더지가 됐군.
이 정도면 정식으로 숲속 친구가 되었다고 인정해줄 수 있겠다.
“후훗! 흑암, 이 몸의 작품 안에 담긴 웅혼한 기상을 읽어낼 수 있다니, 너도 점점 더 위대한 존재가 되어가는 모양이구나!”
내 눈에는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그 어설픈 거짓말에 깜빡 속아 넘어간 아기곰은 잔뜩 신이 나서 꼬리를 빙글빙글 돌려대며 눈을 반짝였다.
‘정말이지, 어떤 의미에서는 강철 같은 멘탈이군.’
그렇게 고미의 놀라운 정신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 시스템 창에 어딘가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 내 눈에 곰깍지(Gomi) 스킬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3/5) >
곰깍지 스킬의 발동 조건은 최소한의 인원이 고미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효과는 그 안에 담긴 고미의 감정을 감상자가 느낄 수 있는 것…….
그런데, 이거 예전에 만들어둔 거에도 적용되는 거였냐…….
‘세 명이면 나, 한유진 씨, 수다르 님, 이렇게 셋인가?’
이 작은 거장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심미안과 추리력, 눈치를 갖추고 있어야 하니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이 셋이 가장 유력하지.
아니, 애초에 이 셋 밖에 알아볼 사람이 없구나.
바로 그때,
< 내 눈에 곰깍지(Gomi) 스킬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4/5) >
‘뭐야, 한 명이 더 늘었어? 누군데?’
이 심원(深遠)한 예술 세계를 한눈에 알아볼 정도의 감식안, 아니, 추리력을 가진 사람이 또 있다고?
“허허, 가게 앞에 있던 조각상도 고미 선생 작품이었지? 우리 고미 선생이 그림이랑 조각을 참 좋아하는구만. 우리 딸애도 어릴 때는 그림을 참 많이 그렸는데 말이야.”
대사로 보나, 표정으로 보나, 네 번째는 New인국 씨인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설마……. 딸을 키운 경험으로 영유아의 예술과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신 건가!?
‘게다가 눈치도 상당히 빠르신 편이지…….’
내가 처음부터 이 굉장한(?) 그림과 조각을 알아볼 수 있었던 건, 고미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동을 대상으로 그림 검사나 놀이치료 같은 걸 해 본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아이를 키워 본 적이 있는 노인국 씨 역시 그 경험과 특유의 눈치를 바탕으로 고미의 그림을 대충이나마 알아볼 수 있는 거겠지.
‘설마 이렇게 가까운 곳에 용사가 숨어있었을 줄이야.’
그렇게 이번에도 무사히(?) 넘어가나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흐음…….”
불안한 침음이 나의 귀를 자극했다.
고개를 돌려보자, 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손주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말로 이걸 알아봐서 이러는 건가?’, ‘그냥 웅 노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아첨하는 거 아니고?’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으으, 천마들이 아첨하는 걸 싫어했던가?’
불안하다. 참을 수 없이 불안하다.
나는 물론이고, 고미 앞에서도 할 말 다 하는 사람이 바로 이 손주분이니까.
“사숙조.”
말 걸지 마, 말 걸지 마.
제발 나한테 ‘정말 저분들이 웅노사의 그림을 알아보고 있는 것입니까?’라고 물어볼 것 같은 눈빛을 보내지마.
‘어째서 이 녀석의 예술 세계가 펼쳐질 때마다 위기가 오는 거냐고!’
고미는 지금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벽화와 조각상은 수천 년에 걸친 외로운 투쟁의 역사가 담긴, 그야말로 혼이 담긴 걸작이다.
그런 작품이 천마의 날카로운 눈에 의해 난도질을 당한다면, 이 아기곰은 절망에 빠질 게 뻔하고.
심지어 이 손주분은 걸러 말하는 법을 거의 모르는 분이니까.
‘웅 노사께서는 손재주가 없으니, 차라리 다른 일에 힘을 쏟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같은, 꿈도 희망도 없는 어마어마한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도 남을 캐릭터지.
‘으으, 제발 한 명만 더 이 그림을 알아봐 줘!’
그렇게 이 그림을 알아봐 줄 마지막 용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때,
“수하님, 배신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천사 같은 음성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제르보나 씨!’
그래, 이것보다 훨씬 더 난해한 작품도 알아봤으니까, 이 정도는 틀림없이 알아봐 주겠지!
“흠, 흠흠! 여러분, 일단 이 일부터 처리하죠.”
나는 일단 대화의 흐름을 끊은 뒤 제르보나 씨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나와 눈이 마주친 눈치 빠른 레드 드래곤은 곧장 벽화와 조각상을 한번 훑어보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시간 내에 해석해 내겠습니다.’
그녀의 눈은 틀림없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좋다, 그럼 저 악당들에게 벌을 주자꾸나! 친구를 배신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짓이니 말이다!”
그렇게 구조신호를 접수한 제르보나 씨가 빠르게 작품 해석에 돌입한 사이, 숲속 대장님의 명에 따라 세 명의 배신자에 대한 판결이 시작됐다.
“세 분 다 자기가 잘못한 건 인정하시죠?”
나의 질문에 대웅전에 끌려온 세 사람은 감히 혐의를 부인할 생각조차 못한 채 온몸을 오들오들 떨며 입을 열었다.
“제,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저, 저는 문경준에게 협박을 당했을 뿐입니다!”
첫 번째는 진심, 두 번째는 거짓말, 세 번째도 거짓말.
살려달라는 말이 진심인 거야 당연하고…….
정말이지, 용서할 마음이 털끝만큼도 들지 않는 캐릭터들이네.
“흑암님, 부탁 드릴게요.”
‘흑암’이라는 두 글자에,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의 얼굴이 시체처럼 새파랗게 변했다.
공포에 압도당한 탓에, 이 작은 두더지가 바로 그 흑마술의 대가라는 사실에 놀랄 틈조차 없는 듯한 반응.
흑암의 지배자의 특기 중 하나가 ‘저주’라는 것은 헌터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알겠다.”
말을 마친 흑암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불길한 기운을 가득 머금은 검은 색의 안개가 그들의 몸을 뒤덮었다.
“크억!”
“아, 안돼!”
“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세 사람은 사색이 되어 계속해서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약속한 대로 목숨은 거두지 않았다. 대신 헌터로서의 능력은 거의 사라졌다고 보면 된다.”
안개가 배신자들의 몸 안으로 흡수되자, 흑암은 그들에게 1년 정도 효과가 지속되는 저주를 걸었다고 말했다.
저주의 내용은 간단했다.
스킬을 사용하면 즉시 모든 능력치가 절반 이하로 감소하고, 사용한 스킬이 1년간 봉인, 그리고 일주일간 시력을 잃게 된다고.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한 벌이 됐겠지?”
처벌을 마친 흑암은 숲속 친구들을 둘러보며 자신이 내린 벌이 적합한지를 물었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적당한 것 같아요.”
사실 조금 너무한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여기서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웅왕 정도로 큰 조직에는 그에 걸맞은 규율이 필요한 거니까.
최소한 1년 동안은 헌터 일을 할 수 없고, 어떤 음모도 꾸밀 수 없다.
그리고 1년 뒤에는 다시 그들을 불러 저주를 걸지 말지를 결정한다.
이 정도면 충분히 본보기가 되겠지.
‘앞으로도 길드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이런 방식으로 처리하면 되겠지?’
이 정도면 굳이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초거대 길드로 급부상한 웅왕의 규율을 다잡을 수 있을 거다.
그렇게 흑암을 감사위원으로 정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 축하합니다. 새로운 퀘스트 발생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
< 메인 퀘스트 : 불러봐요, 웅비어천가 (2) >
아직 첫 번째 퀘스트를 완료하지도 못했건만, 연결된 세 개의 퀘스트 중 두 번째 퀘스트가 개방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퀘스트의 내용은 -내 생각과는 다르게- 첫 번째 퀘스트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잠깐……. 설마 세 번째 퀘스트도 이런 식인가?’
나를 더욱 의아하게 만든 것은, 내용 뿐만 아니라, 퀘스트의 수행 방식 역시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