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216화 (216/300)

EP.216 화해, 그리고 선물

만발한 약초와 풀, 형형색색의 꽃들.

화원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양봉장과 과일 밭······.

그 사이로 보이는 원두막.

여기까지는 내가 알던 화원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나무로 만들어져 있던 원두막은 어느새 고미가 좋아하는 꿀색으로 도장이 되어있었다.

‘언제 색칠을 하셨대······.’

변화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원두막 근처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창고가 세워져 있었고, 화원의 중앙에는 커다란 원형 테이블과 고오급 쿠션이 깔린 원목 의자, 그리고 커다란 그네와 미끄럼틀까지 놓여있었다.

심지어 화원 곳곳에는 다양한 형태의 벤치까지 놓여있었다.

‘이게 화원이야 야외 카페야······.’

설마 야채 가게 ‘토 사장’님이 신개념 유기농 카페를 개업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 화원에서 직접 기른 과일로 생과일 주스나 스무디도 만들고, 커피도 만들고······.’

지금 모습으로 봐서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다.

이 정도면 이미 화원이 아니라 화원을 배경으로 한 야외 카페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그것도 키즈 카페.

그나저나, 이걸 다 누가 만든 걸까? 흑암? 토생원?

“오, 오오! 수하! 토생원의 화원이 아주 멋들어지게 변했구나!”

마치 창업 준비중인 야외 카페처럼 변한 화원의 모습에 잔뜩 신이 난 아기곰은 토실토실한 궁둥이를 흔들며 열심히 그네를 향해 달려갔다.

“삐이! 삐이이!”

뒤이어 알틴 역시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날개를 파닥이며 고미의 뒤를 따라 날아갔다.

“자, 작은 금동이! 어서 그 멋진 그네에 앉아 보거라! 이 몸이 너를 위해 그네를 밀어주마!”

이전에 내가 그네를 밀어준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배려심 깊은 아기곰은 자기가 먼저 그네를 타지 않고 기꺼이 알틴을 위해 자리를 양보(?)했다.

“삐이!”

하지만 훈훈함도 잠시, 나의 마음을 불안에 휩싸이게 만드 멘트가 이어졌으니······.

“후훗, 조심하거라! 꽉 잡지 않으면 하늘로 날아갈지도 모르니 말이다!”

······.

부, 불안하다. 불안해. 설마 그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있는 힘껏 미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알틴이라면 다칠 일 없이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겠지만, 모처럼 야채 가게 패밀리 – 수다르, 토생원, 흑암, 사랑이들과 작은 삼돌이 –가 만든 그네가 부서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고, 고미!”

불안한 마음에 살살 밀라고 주의를 주려는 찰나,

“이야아아압!”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그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휴······.’

그러나 우렁찬 목소리나 효과음과는 상반되게 그네는 지극히 안정적인 속도로 진자 운동을 반복했고,

“삐이이!”

부드럽게 흔들리는 그네에 올라탄 알틴은 해맑게 웃으며 특유의 귀여운 울음을 내뱉었다.

‘으음, 그래도 꽤 정상적으로 놀아주네.’

그런데, 기합소리는 왜 내는 걸까.

멘트로 보나 기합으로 보나 거의 우주 끝까지 그네를 날려 보낼 기세였는데 말이지.

“자, 그럼 저는 곶감 버섯을 심을 곳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한편, 흐뭇하게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토생원은 곶감 버섯을 들고 널따란 화원의 한쪽으로 총총 걸음을 옮겼고,

“허허, 그럼 저도 수다르와 함께 밭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수다르님 역시 그 뒤를 따라 밭으로 걸어가셨다.

‘그런데, 흑암은 어디 있지?’

커다란 귀를 흔들며 밭으로 걸어가는 야채 가게 토사장님과 그 뒤를 따라가는 수다르 님을 지켜보던 나는, 그제야 흑암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하네, 여기 말고 갈 곳도 없는 양반이······.’

바로 그때, 오른쪽 지면에서 발을 타고 미미한 전동이 전해졌다.

‘설마, 아직도 만들 게 남은 건가······.’

일정한 리듬으로 땅이 울리는 것이, 십중팔구는 또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려고 땅을 파고 있는 모양이었다.

“흑암님!”

진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흑암을 부르자,

“오, 왔군. 미안하다, 지금 공사가 한창이라 말이지.”

이내 부드럽게 뒤집어진 흙더미 속으로 조그마한 두더지 하나가 쏙, 하고 머리를 내밀었다.

“무슨 공사를 하시는 거예요?”

“집이다. 토생원과 수다르는 물론이고 케르베로스와 토생원의 늑대들까지 같이 지내야 하니까 말이야. 전에 토생원이 살던 굴은 너무 작아서 함께 살 수가 없으니, 다 같이 살 수 있는 집을 만드는 중이지.”

지면 위로 기어올라온 흑암이 온몸에 묻은 흙을 가볍게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음, 창업이 목표는 아니었구나.’

그렇게 토 사장님이 사업을 더 이상 확장하려는 마음은 없나보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저 인간은 누구지? 새 친구인가?”

나의 뒤에 서있는 천마를 발견한 흑암이 경계심이 어린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아마도 한눈에 천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대가 흑암이군.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자신을 알아본 듯한 천마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흑암은 이내 놀란 듯 콩알만한 두 눈을 크게 치켜뜨며 뒷걸음질을 쳤다.

“서, 설마······. 무신인가?”

음, 직접 만난 적은 없어도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네.

“이젠 아니다. 웅 노사에게 패했으니, 무신이라는 호칭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지. 그냥 천마라고 부르면 된다.”

“너도 고미에게 패한 것이냐?”

꿀주먹 체험단에 새로운 멤버가 들어왔다는 말에, 흑암의 입가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어렸다.

“너도 웅 노사에게 패배해서 이곳에 있는 것이냐? 하지만 네 목적은 인간들을 멸망시키는 것이었을 텐데.”

“이제 그런 것은 포기했다. 나는 그저 속죄를 위해 노력하는 한낱 두더지에 불과하다.”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해 보이는 흑암의 표정에, 천마는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말 재미있군. 인간에게 꽤 원한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인간들의 속담에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한은 강물에 흘려보내라는 말이 있더군. 웃기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와서 보니 꽤 설득력이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나 새 사람, 아니, 새 두더지가 된 흑암의 말에 까닭 모를 흐뭇함을 느끼고 있을 때······.

“수하 씨! 나 왔네!”

꽃무늬 셔츠를 입은 아저씨 하나가 손을 흔들며 화원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검은색 봉투와 함께 휴대용 버너, 불판은 물론이고, 쌈야채까지 들려 있었다.

‘가게에서 빌려오신 모양이네······.’

정말이지, 넉살도 좋으시다.

노인국 씨가 나타나자, 흑암은 온몸을 덜덜 떨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두 눈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온몸에서 비 오듯 식은땀을 흘리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딱하다는 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올 정도였다.

심지어 고미에게 막 얻어터지고 난 직후보다 더 공포에 질린 모습.

그리고 노인국 씨를 만난 흑암이 처음 취한 행동은······. 자리에 있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미, 미안하다······.”

녀석은 그 한마디와 함께 곧바로 노인국 씨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곁에는 어느새 나타난 케르베로스가 함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노인국 씨를 만나면 이렇게 하리라고 아주 오래 전부터 정해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 내가 잘못했다······. 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으마. 주, 죽으라면 죽을 것이고, 영원히 이곳에서 나오지 말라고 하면 그리 하겠다······. 용서해달라고도 하지 않겠다······.”

흑암의 콩알만한 눈동자에서는 어느새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 신나게 그네를 밀어주며 놀고 있던 고미와 알틴은 조용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겼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던 수다르 님과 토생원도 발걸음을 멈춘 채 멀찍이서 말없이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국 씨가 아무런 말이 없자, 흑암과 케르베로스는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을 망부석처럼 굳어 있었다.

쉽게 용서해 줄 것처럼 이야기 해놓고, 막상 자신을 괴롭혔던 당사자를 눈앞에 두니 마음처럼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다시 벌이라도 주고 싶어진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무거운 정적이 이어지기를 한참······.

“일어나게.”

마침내 노인국 씨가 입을 열었다.

그의 주름진 손은 어느새 토목 작업을 하느라 흙투성이가 되어있던 흑암의 작은 손을 붙잡고 있었다.

“대충 사연은 들었지만, 그래도 자네 입으로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네. 말해줄 수 있겠나? 자네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 맛있는 것도 좀 사왔거든.”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노인국 씨의 목소리에, 흑암은 또 한 번 굵은 눈물을 떨구며 보일락 말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암과 케르베로스가 몸을 일으키자, 노인국 씨는 천천히 테이블로 걸어가 휴대용 버너에 불을 붙였다.

“삼겹살은 먹어봤나?”

“아직······.”

말꼬리를 흐리는 흑암의 모습에, New인국 씨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하하, 현세에 왔으면 삼겹살은 꼭 먹어봐야지. 이게 비싼 음식은 아닌데, 소주 한잔 걸치면서 진솔한 얘기를 나누기에는 또 이만한 음식이 없거든.”

- 치이익······.

불판 위에 고기가 올라가자, 맛깔난 소리와 함께 노릇한 냄새가 화원 안에 퍼져나갔다.

“고미 선생! 얼른 이리 오게! 우리 고미 선생도 먹을 거 좋아하지 않나!”

이어서 노인국 씨는 멀리서 눈치를 살피고 있던 숲속 친구들을 테이블로 불렀고,

“괜찮겠지?”

흑암은 또다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노인국 씨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고기를 구우며 자신을 지옥에서 꺼내준 동시에 오랫동안 괴롭혀 온, 은인이자 원수의 사연을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흑암의 이야기는, 이전에 들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이전처럼 악에 받친 모습은 아니었다.

마치 복수심과 원한으로 덮어놓았던 슬픔을 이제야 온전히 느끼는 것처럼, 한없이 슬픈 목소리였다.

“그때는 복수에 눈이 멀었었다······. 다른 길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

그리고 노인국 씨는,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때로는 흑암의 눈을 바라보며 차분히 그 긴 사연을 들어주었다.

마침내 흑암의 이야기가 끝나자, 노인국 씨는 잘 익은 삼겹살을 손수 잘라 흑암에게 내밀었다.

“자, 먹게.”

이에 흑암은 깊은 회한에 잠긴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로 잘린 작은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맛있지? 내가 고기는 또 잘 굽거든. 우리 마누라가 삼겹살을 좋아해서.”

이어서 노인국 씨는 소주 한잔을 시원하게 입안에 털어 넣고는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덕이야. 우리 마누라 살아난 거.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었지만, 우리 집 사람 건강하게 살아있고, 딸 아이도 잘 컸지.”

“그건······.”

“사람이 살다 보면 정말 눈 뒤집히는 일이 많거든. 자네와 내가 다른 건, 나한테는 힘든 일이 있어도 여전히 나를 믿고 의지하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줬다는 거고, 자네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지. 나도 누가 우리 가족이나 친구들한테 그런 짓 했으면, 당장 죽이겠다고 칼 들고 쫓아갔을지도 몰라.”

말을 마친 노인국 씨는 소주잔에 눈곱만큼 술을 따라 흑암에게 건네주었다.

“술은 좀 하나? 몸집이 작으니 술을 많이 마시면 안되겠지?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작구먼 그래. 고미 선생보다도 작을 줄은 몰랐어. 이렇게 작은 몸으로 친구들, 가족들 복수하겠다고 오랫동안 혼자 애썼네.”

자신을 괴롭힌 흑암을 책망하기는커녕 그를 위로하는 노인국 씨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뭉클했다.

“미안하다······.”

흑암은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노인국 씨가 건넨 소주를 들이켰고,

“와하하! 뭘 자꾸 미안하다고 하나. 정말로 미안하다면, 미안하다는 말은 그만하고 첫사랑 꿈이라도 꾸게 해줘!”

New 인국 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참으로 그다운 방식으로 상대를 위로하려 했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나?”

흑암이 조심스레 농으로 받아치자,

“하하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New 인국 씨는 더욱 소리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짤막한 농을 주고받은 두 사람의 입가에는, 참으로 복잡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술 한잔으로 털어버리기에는 복잡한 사연이지만, 그래서 술 한잔으로 털어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후훗, 그렇다면 이제 너희도 친구가 된 것이냐!?”

사이 좋게 술잔을 나누는 노인국 씨와 흑암의 모습에, 줄곧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고미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이제 친구지, 아닌가?”

노인국 씨의 질문에 흑암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다면, 친구지. 수백 년 만에 만난······.”

말꼬리를 흐리는 흑암의 입가에, 처음으로 행복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흑암을 만난 이래 처음 보는, 정말로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동안은 늘 웃어도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냄새가 풀풀 풍기는, 어두운 두더지였으니까.

잠시 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숲속 친구들의 대장님이 싸우고 화해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선생님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훗, 훌륭하다! 참으로 훌륭해! 그렇다면 이 몸이 너희들을 위해 화해의 선물을 주마!”

응? 선물······? 또 먹을 건가?

‘나도 준비한 게 있는데······. 이런 면에서는 참 생각이 잘 통한단 말이지.’

그렇게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삼겹살을 집어먹던 아기곰이 테이블 아래로 훌쩍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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