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7 평범한 아기곰입니다
나를 바라보며 걸어오는 한유진의 눈빛은 전에 없이 차가웠다.
고미를 치료해 줄 때는 세상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것 좋아하는 평범한 여자아이 같더니, 이렇게 분위기가 확확 바뀌는 사람은 처음이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요.”
나는 일단 시치미를 뗐다.
이 정도는 위기도 아니다.
제르보나가 이상한 소리를 한 시점부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까.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죠. 성한 오빠한테는 분명히 F급 테이밍 능력자라고 들었는데, 고작 1, 2주 만에 B급에 가까운 수준이 되어 있다는 게 말이 돼요?”
“힘숨찐 컨셉으로 사는 게 죄는 아니죠. 게다가 제가 한유진 씨에게 특별히 피해를 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나의 대답에 한유진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굳어갔다.
으, 좀 쫄리네······. 그래도 상대는 S급인데,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당신이 자기 보호를 위해 스킬과 능력치를 속이는 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죠. 하지만 고미는 얘기가 달라요.”
“어차피 내 곰이에요. 그리고 넘겨짚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내가 스킬을 속인 게 어떻게 고미가 평범한 곰이 아니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거죠?”
논리정연한 반박에 한유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입술을 짓씹었다.
“그건······. 제르보나가 고미에게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을 느꼈다고 해서 물어본 거예요.”
역시, 그랬겠지. 내가 생각보다 강한 것에 놀랄 수는 있지만, 고미가 평범하지 않다는 소리가 나올 장면은 아니었으니까.
“그게 다예요?”
“이봐요, 드래곤은 특별해요. 다른 펫이나 단순히 이능을 각성했을 뿐인 헌터들과는 다르다고요. 제르보나는 더 그렇고요.”
“드래곤이 특별한 게 그런 질문을 할 이유는 못 되죠.”
또다시 정적.
그래도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굴지 않는 걸 보니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네.
“김수하 씨. 이게 다 당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 그 곰이 제르보나가 생각하는 그런 존재라면, 당신은 하루라도 빨리 그 곰과 떨어져야 해요.”
[ 수하! 더이상 참을 수 없다! 감히 이 몸과 가족들의 사이를 이간질하려 하다니! 당장 저 계집과 그 도마뱀 놈들의 버릇을 고쳐주겠다! ]
대화를 듣고 있던 고미가 나의 어깨에서 폴짝 뛰어내려 한유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안 돼, 고미!”
나는 황급히 고슴도치처럼 온몸의 털을 곤두세운 채 한유진을 공격하려는 고미의 앞을 막아섰다.
“제르보나의 판단이 절대로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어요?”
“그, 그건 아니지만, 제르보나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곰은······.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예요.”
“그럼 어쩌실 건데요.”
“어쩔 수는 없어요. 하지만······.”
뭐야 이건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쩔 수는 없으면 왜 말을 꺼낸 건데.
“하, 좋아요. 어쨌든, 내가 고미가 평범한 곰이라는 걸 증명하면 귀찮게 안 구는 거죠?”
“그걸 어떻게 증명할 건데요?”
나는 곧바로 시스템 창을 불러 ‘꿀태창’을 뒤집어 ‘구라창’으로 바꿨다.
유비무환이라고 했던가, 제르보나가 이상한 말을 했을 때부터 준비해두길 잘했군.
“가시 모드.”
그리고는 반투명한 상태창을 그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자. 봐요.”
< 이름 : 김수하 (C) >
< 보유 칭호 >
평범한 사육사 (F)
■ ■ ■ ■ ■
< 보유 스킬 >
테이밍 (F) :
- 능력치 총합이 사용자의 70% 이하인 생물을 펫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현재 보유 펫 1)
■ ■ ■ ■ ■
■ ■ ■ ■ ■
< 능력치 >
힘 : ■ 민첩 : ■ 체력 : ■ 마력 : ■
“자, 이제 됐어요?”
상태창은 절대로 조작할 수 없다는 건 절대적인 법칙이니, 드래곤이 아니라 드래곤 할아버지가 와도 의심할 수 없는 완벽한 증거다.
사실 구라 상태창을 가지고 있으니 전체를 다 보여줘도 상관은 없지만, 굳이 그런 짓을 할 필요는 없다.
힘숨찐 컨셉으로 살고 있다면서 다 보여주는 게 되려 이상한 일이지.
“어어······.”
아니나 다를까, 의심으로 가득했던 한유진의 눈이 갈피를 못 잡고 어지럽게 흔들렸다.
“왜요, 이걸로는 모자라요? 펫 정보도 보여줘요?”
< 보유 펫 일람 >
< 고미 (F) >
- 평범하고 귀여운 아기곰이다.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정도로 영리하다. 달콤한 것을 좋아한다. 잘 키우면 제법 강해질지도?
< 보유 스킬 >
- 빨리 먹기
- 이족 보행
- 꼬리 돌리기
이어서 상태창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한유진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몇 번이나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됐어요.”
“아니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음, 사실 사과할 사람은 나인데. 쪼끔 찔리네.
그래도 드래곤하고 고미는 최대한 마주치지 않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으니 할 수 없다.
대웅전에서 봤던 ‘드래곤 슬레이어’ 고미의 조각상(?)이 도저히 머리에서 잊히지 않거든.
“괜찮아요. 사과 그만하고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가죠. 그리고 제 능력치랑 스킬은 비밀이에요. 이건 진짜 기본적인 상도덕인 거 알죠?”
“아, 네. 제가 살게요! 제가 진짜 맛있는 디저트 집 알아요!”
디저트라, 난 그런 거 관심 없는데.
그래도 고미가 좋아할 테니 데리고 가볼까? 게다가 김춘식 문제에 대해서도 물어볼 게 있으니까.
[ 흥, 수하! 어째서 저 계집과 함께 다니는 것이냐? 설마 저 살쾡이 같은 계집에게 반하기라도 한 것은 아니겠지? ]
고미가 잔뜩 뾰로통한 목소리로 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흔들며 말했다.
[ 그런 거 아니야. 오늘 좀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그리고 우리가 한유진 씨 속였잖아. ]
[ 흥, 이 여자를 속인 것이 아니라 못된 도마뱀 놈들을 속인 것이다! 그 구두쇠 같은 도마뱀 놈들이 이 몸처럼 관대하고 훌륭한 인품을 가졌다면 처음부터 속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
[ 알겠어, 그러니까 너무 화내지 마. 대신 저 여자가 맛있는 거 사준대. ]
[ 싫다! 저 여자가 바치는 것은 먹지 않을 것이다! ]
음, 얻어먹는 게 아니라 ‘바친다’고 표현하다니, 역시 고미다운 표현법이군.
내가 상태창에 글을 써서 고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신이 난 한유진은 벌써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었다.
“얼른 와요! 고미가 드래곤들 싫다고 해서 오늘은 차 타고 왔어요!”
정말 태세 전환이 빠른 여자네.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몰아세우더니, 금방 또 애처럼 웃는다.
[ 그래도 네가 드래곤 싫다고 하니까 직접 운전해서 왔다고 하잖아. 조금만 봐주라. ]
[ 흥······. 알겠다. 대신 오늘 저녁은 맛있는 것을 잔뜩잔뜩 먹을 것이다. 허수아비가 아니라 네가 직접 이 몸의 입맛에 맞는 것을 사주어야 한다. 초코바도 거의 다 떨어져 간단 말이다. ]
‘음, 초코바를 수십 개는 사준 거 같은데, 벌써 다 먹었단 말이야?’
한유진의 뒤를 따라가자, 도로 위에 새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람보르기니······? 차는 잘 모르지만, 저거 엄청 비싼 거 아닌가.
[ 역시 살쾡이다운 계집답게 버스도 좀스러운 것을 타는구나! ]
하지만 고미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하긴, 이 녀석의 기준에서는 무조건 큰 차가 좋은 차겠지.
“차 좋은 거 타시네요.”
“사실 평소에는 드래곤 타고 다녀서 자주 타지는 않아요. 괜히 비싼 차 샀나 싶어요.”
한유진은 그렇게 재잘거리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드래곤들은 어쩌게요? 근처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카톡 보내놨어요. 고미가 무서워하니까, 오늘은 멀리서 경호할 거예요.”
[ 수하! 당장 도마뱀들을 부르라고 하거라! 이 몸이 그깟 도마뱀들을 무서워하다니! ]
음, 아무리 봐도 한유진 씨와 고미는 궁합이 안 좋은 것 같다.
사주기로 한 디저트가 부디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만한 것이길 바라는 수밖에.
* * *
한유진 씨가 우리를 데리고 간 것은 이태원 인근의 수제 디저트 카페였다.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있는 5층짜리 빌딩 안쪽에는 커플이나 여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디저트와 마실 것을 파는 곳 치고는 지나치게 호사스러운 건물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뭐, 서민은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무언가겠지.
[ 흐음, 그래도 살쾡이 계집치고는 제법 그럴싸한 곳을 알고 있구나. ]
그래도 건물 외형은 일단 고미 입맛에 맞으니 다행이네.
근데 이런 곳에 고미를 데리고 들어가도 되는 건가?
안으로 들어가자, 나의 앞을 막아서려던 직원이 한유진의 얼굴을 보고는 공손히 인사하며 곧바로 뒤로 물러났다.
“여기는 펫 들어가도 되는 곳인가 봐요?”
“아, 이 가게 제 거에요.”
한유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전에 사장님이 해주신 디저트를 먹었는데, 너무너무 맛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스카웃해서 건물 올리고 가게 하나 차려 드렸어요. 테이머스 회원들이나 펫 키우는 헌터들 출입 가능한 가게로.”
으아, 재력이나 돈 쓰는 방식은 이 신종 호구가 원조 호구보다 더 굉장한 것 같다.
“주문하면 펫용 디저트도 따로 나오니까······.”
“아, 아니에요. 고미는 사람 음식 좋아해요.”
“정말요?”
한유진이 신기하다는 듯 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신기하네요. 사람 음식 좋아하는 펫은 그렇게 많지 않은데.”
“그런가요?”
“네, 보통 사람 음식 좋아하는 펫은 외형도 사람이랑 비슷하거든요.”
이후 우리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룸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큰 곳을 셋이서 써요?”
방의 넓이는 셋이 아니라 서른이 들어가도 될 정도.
사람 둘에 곰 하나인데, 지나친 공간 낭비가 아닌가 싶다.
[ 오오! 수하! 이렇게 넓은 곳에서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이냐!? ]
하지만 고미는 이곳이 제법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일단 크면 클수록 좋아하는 게 이 녀석이니까.
“뭐 드실 거예요? 여기 맛있는 거 진짜 많아요.”
“저는 그냥 커피면 돼요. 단 거 안 먹거든요.”
“여기 안 달고 맛있는 디저트도 많아요.”
“그럼 아무거나 주세요.”
“고미는 뭐 좋아해요?”
“음, 대충 단 거? 초코바랑 꿀, 뭐 이런 거 좋아해요. 마실 건 스무디 시켜주시면 돼요.”
나의 대답을 들은 한유진은 곧바로 주문을 시작했다.
“시그니처 커피 둘에 오레오 스무디, 통카넛 쇼콜라, 스트로베리 샬로트, 까눌레, 치즈 타르트, 티라미수 크레이프. 초코 에클레어, 스페셜 슈.”
뭐, 뭘 이렇게 많이 시켜. 다 먹을 수는 있는 거냐.
“네,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점원이 물러나자, 한유진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사랑에 빠진 것 같은 표정으로 고미를 바라봤다.
“어쩜 이렇게 이쁘게 생겼을까? 제르보나나 알틴도 너처럼 예쁜 털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
드래곤과 자신을 비교하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고미는 한껏 거만해진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 후훗, 그래도 보는 눈은 있는 계집이구나. ]
아까 살쾡이 어쩌고 하면서 싫어하지 않았냐······.
좋은데 데리고 와서 맛있는 것 좀 주고 칭찬 몇 마디 해줬다고 금세 풀어지지 말란 말이야.
[ 이렇게 웅장한 곳이라면 틀림없이 음식도 아주 맛있는 것이 나오겠지? 제법 기대가 되는구나. ]
게다가 꼬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눈을 빛내는 게 이미 반쯤은 넘어간 모양새다.
그럼 고미 기분은 좀 풀어진 것 같으니, 나는 내 일을 좀 해볼까?
“그런데, 아까 하신 말이 무슨 의미죠? 고미가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셨잖아요. 제르보나는 저한테 텔레파시까지 보내서 경고를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