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2 고미가 아파요
“야, 진짜 고미랑 둘이 가려고?”
문을 나서려 하자, 봉식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후후, 봉식이. 걱정 말거라. 이 몸이 있는 한 수하는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고미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오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그렇지만······. 힘숨찐 컨셉 깨질까봐 그렇지.”
“힘숨찐? 그것이 무엇이냐?”
고미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이 녀석이 이런 신조어를 알리가 없지.
“아, 그게, 힘을 숨긴······.”
“됐어. 애한테 이상한 말 가르치지 마. 애들은 나쁜 말 금방 배운다. 그리고 너랑 가든 이강혁 씨랑 가든, 드래곤이 달려들면 결과는 마찬가지 아니겠냐?”
“그건 그렇네, 알았어. 잘 하고 와라.”
그렇게 신발을 신고 문밖을 나서려던 찰나, 문득 한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아, 혹시 용 만났을 때랑 고미랑 있을 때랑 어느 쪽이 더 부담스러웠냐?”
봉식이의 체질이라면 일종의 전투력 측정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던진 질문이었다.
“드래곤이 회전목마면, 고미는 벨트 없는 자이로 스윙이다. 이 정도면 이해 가냐?”
봉식이의 탁월한 비유에 둘 사이의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 단박에 이해가 갔다. 이 자식도 은근히 멘트가 찰지단 말이야.
“말해놓고 보니 괜한 걱정 했다 싶네. 그럼 조용히 잘 해결하고 와. 한국 최고 길드장을 둘이나 때려눕히면 네가 좋아하는 조용하고 소박한 인생은 쫑 아니겠냐?”
“걱정 마라, 재밌는 생각이 있으니까. 이따 저녁 메뉴나 고민하면서 기다리고 있어.”
“그래. 일찍 와라, 고미 데리고 집에서 영화나 보자. 치킨 시켜 놓을게.”
* * *
이후 고미와 나는 이강혁을 만나 태양초의 열매를 건네받았다.
“정말 두분이서 가도 되겠습니까? 곰 선생님이라면 상대가 드래곤이라 해도 걱정이 없지만······. 정체가 드러나면 곤란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 역시 봉식이와 똑같은 걱정을 했지만, 그렇다고 저스티스 길드장을 끌고 가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냐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태양초의 열매는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파인애플 껍데기를 가진 복분자 같은 생김새라고 해야 하나.
동그랗고 자그마한 알갱이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이대로 먹으면 바로 틀니 껴야 할 것 같다.
‘열매 주제에 왜 이렇게 강하게 생겼냐.’
이름만 들어서는 고추처럼 생겼을 줄 알았는데.
고추장을 담그면 굉장한 맛이 난다던가······.
나는 그것을 더블백에 담은 뒤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산신령의 보물에 넣어둬도 되지만, 액세사리형 인벤토리는 내부공간 작은 것도 몇천은 하니, 등급도 낮은 헌터가 그런 데서 슥슥 열매 꺼내면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나.
* * *
위치는 오늘 알았지만, 한유진의 집에 관한 일화는 거의 전 국민이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명하다.
무려 드래곤이 나오는 던전을 클리어하고 그 위에 지은 집이니까.
한유진의 집 앞에 도착한 것은 대략 11시 45분 경이었다.
웬만하면 딱 맞춰 도착하려고 했는데, 교통상황이 너무 원활해서 예정보다 일찍 도착해 버렸다.
“우와······.”
[ 오오······. ]
한유진의 대저택을 보는 순간, 고미와 내 입에서 동시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게 대체 몇 평이냐. 이 정도면 어지간한 중고등학교 운동장 크기잖아······. 게다가 3층.
이런 집은 꿈도 못 꿔봤다. 내 드림 하우스라고 해봐야 우리 다섯 가족 모여 살 아파트 정도가 고작인데.
[ 흥! 이래서 내가 도마뱀을 싫어하는 것이다! 이놈들은 언제나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한다! ]
음, 그러는 자기도 이 집보다 몇 배는 큰 헌터 협회 건물을 자기 거처로 삼겠다고 했었으면서······.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대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봉식이 못지않게 살벌한 인상의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덩치로 따지자면 그 인간 흉기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눈에 시선을 강탈하는 강렬한 ‘포인트 메이크업’을 한 덕에 상당히 흉악한 분위기를 자랑했다.
‘으아, 진짜 저런 사람이 있구나.’
대략 40살 언저리로 보이는 사내의 얼굴에는 이마부터 왼쪽 눈을 지나 턱끝까지 이어진 기다란 칼자국이 나 있었다.
‘저런 거 조폭 영화에나 나오는 거 아니었냐.’
혹시나 눈이 마주칠까 잽싸게 고개를 돌렸지만, 무언가 낌새가 이상하다.
뒤통수가 따끔따끔한 것이······.
‘쳐다보지 말아 주세요······.’
나는 저런 사람들하고 별로 궁합이 안 맞는다.
이에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어이.”
나의 노력이 무색하게, 뒤쪽에서 하루에 담배를 한 보루는 필 것 같은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꼬맹이.”
미쳐버리겠네. 왜 초등학교 때 중학생 형들한테 삥 뜯기던 기억이 머리를 스치는 걸까.
“네?”
“너, 헌터냐?”
으, 기죽는다. 무서워. 이 사람 뭐야.
“존나게 귀여운 걸 데리고 다니네. 이 곰돌이는 어디서 났냐? 한 마리 주워다 키우고 싶게 생겼네. 이거 팔면 돈 좀 되겠는데.”
뭐?
아저씨의 험악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머리에 열이 올랐다.
거기다, 뭘 팔아?
“하, 이 새끼 눈깔에 힘들어 가는 거 보소. 귀엽다고 해도 지랄이네.”
이 양아치 같은 새끼가.
[ 푸흡. 수하, 이런 애송이를 상대로 왜 열을 내느냐? 가볍게 손을 봐주거라. ]
그때, 내 품 안에 안긴 고미가 내 가슴팍에 살짝 손을 얹으며 전음을 보냈다.
[ 고미님의 가호가 깃듭니다. ]
“꼽냐고······.”
그리고, 시스템 창에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아저씨, 아니, 양아치 새끼가 나의 어깨를 툭 밀쳤다.
“응?”
하지만 밀려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놈이었다.
“뭐야 너.”
“넌 뭔데요.”
그렇게 말하며 성큼 다가서자, 줄곧 사람 잡을 것처럼 노려보던 양아치가 뒷걸음질을 쳤다.
“넌 뭐냐고요.”
평소 같으면 똥 밟았구나 하고 지나갈 거다.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 새끼 저 새끼 하는 걸로도 모자라 고미한테 험한 말을 해대니 나도 모르게 열이 뻗쳤다.
게다가 내가 자기보다 강한 것 같으니 – 고미의 기를 받은 덕분이기는 했지만 – 곧바로 꼬리를 마는 것까지······.
평화를 사랑하는 나지만, 이런 새끼까지 사랑할만큼 인류애가 넘치지는 않는다.
“뭐, 뭐야 이새끼가.”
내가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자, 그 ‘양아치’는 당황함과 분노가 반씩 섞인 표정으로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바로 그때,
“언제부터 우리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손을 댈 정도로 간이 커진 겁니까?”
등 뒤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아니 그게······.”
“벌레 같은 놈이.”
고개를 돌려보니 유달리 새카만 머리칼을 가진 차가운 인상의 젊은 남자 하나가 대문 앞에 꼿꼿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꺼져.”
젊은 남자가 가볍게 손을 들자,
“끄으윽······.”
양아치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무언가에 목이 졸린 듯 목을 감싸쥔 채 끅끅거리는 소리를 냈다.
쾅!
그리고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담벼락 앞에 서 있던 검은 승용차에 내리꽂히며 보닛이 움푹 찌그러졌다.
“죄송합니다. 김수하 씨 되시죠? 들어오십시오.”
흑발의 사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불쾌한 일을 겪게 만든 점,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어,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죠?”
나의 질문에 남자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가 생각하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패왕 길드의 전령입니다.”
와······. 소문대로 양아치 길드구나.
왜 다른 길드들이랑 사이가 좋지 않은지 알겠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4대 길드의 전령을 저렇게 취급해도 되는 건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흑발의 사내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참, 제 소개를 잊었군요. 저는 용왕 길드의 이유찬이라고 합니다.”
“아, 네. 김수하라고 합니다.”
“네, 그리고 품에 안겨 계신 분이 고미님이시죠?”
그의 얼굴에는 양아치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친절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 미소에 약간은 경계가 풀어져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 수하, 이 녀석, 사람이 아니다. ]
고미의 전음이 귓가에 울렸다.
뭐?
반사적으로 고미를 내려다보자,
[ 사람으로 변신한 검은 도마뱀이다. ]
우와, 이렇게 완벽하게 폴리모프가 가능하단 말이야?
진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말을 마친 고미는 다시 ‘계획’에 따라 얌전히 눈을 감고 나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이유찬’이라고 소개한 드래곤의 뒤를 따라 널따란 정원 안으로 들어가자,
“삐이이- 삐이이-”
“알틴! 이리 와!”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정원 안을 뛰어다니는 인형 같은 외모의 여자 하나와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열심히 하늘을 날아다니는 황금색 아기용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귀, 귀엽다! 고미만큼은 아니지만 굉장해!
“알틴. 손님 왔다. 그만하고 얌전히 앉아 있어.”
이유찬의 한마디에 하늘을 날아다니던 황금색 아기용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와 고미를 바라보다가 얌전히 풀밭에 내려 앉았다.
“어! 김수하 씨!”
이어서 한유진이 눈을 반짝이며 후다닥 나에게 달려왔다.
‘으, 역시 이 사람 부담스럽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연락 한번 달라고 한지가 언제인데, 그날도 그냥 사라져 버리고!”
“어, 저기 그게, 터치펜 사고, 밖에 나가니까 안 계시던데.”
“거짓말하지 마세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사라져 놓고. 그날 내가 얼마나 열 받았는지 알아요?”
지나치게 솔직하군. 지금은 화가 다 풀린 건가.
화난 것 치고는 너무 생글생글 웃고 있는데.
“그럴 리가요. 제가 어떻게 S급 헌터 눈을 속이고 빠져나가겠어요. 잠깐 딴짓하신 거 아니에요?”
태연하게 되묻자, 한유진은 입술을 비죽 내밀며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또 그렇네. 음······. 사실 그날 엄청 귀여운 케이스를 봤거든요!”
그리고는 곧바로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고양이 인형(?) 같은 것이 달린 분홍색 케이스.
이런 여고생들이나 좋아할 법한 디자인의 케이스가 취향인 건가.
이 사람 나랑 비슷한 나이로 알고 있는데······.
말을 마친 한유진은 곧바로 고미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어린애처럼 팔짝팔짝 뛰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떻게 해! 가까이서 보니까 더 귀여워!”
게다가 첫만남 때와는 캐릭터가 좀 바뀐 것 같기도 하고.
지난번에 봤을 때는 분명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근데 애기 상태가 왜 이래요?”
그러나 즐거워하던 것도 잠시, 한유진의 얼굴에 금세 걱정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끼잉······.”
때맞춰 고미가 앓는 소리를 내며 내 품에 고개를 묻었다.
“어······. 그게, 사실 며칠 동안 연락을 못했던 게······. 고미가 좀 아파요.”
나는 짐짓 수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답했다.
“네!? 어디가 아픈데요?”
“금방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점점 더 상태가 안 좋아져서······.”
“펫 병원은 갔다 왔어요!?”
고미가 아프다는 말에 한유진은 제 자식이 아프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펄쩍 뛰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기다려요. 제가 좋은 펫 병원 알아요. 지금 당장 가요.”
“아, 아니에요. 친구 소개로 펫병원은 다녀왔어요. 그런데······. 고미가 이상한 병에 걸린 것 같다고······. 사실 오늘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거거든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더블백에서 태양초 열매를 꺼내 들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불 한 번만 뿜어주시면 안 될까요? 약을 만드는데 화룡의 기운이 들어간 태양초 열매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걱정 마세요. 잠시만요!”
한유진은 곧장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붉은 머리의 여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제르보나!”
그러나 한유진이 그 여자를 부르기 무섭게 이유찬이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고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김수하 씨, 죄송하지만, 이 아기곰, 정말 아픈 게 맞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