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7 향정신성 약물은 의사, 약사와 상의하고 복용하세요
“끄으으으······.”
온몸의 피가 부글부글 끓고,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느낌.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머리를 가득 채우고, 시야가 붉게 물들며 정신이 흐려진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 평생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뭐, 뭐라도 부수고 싶어!’
바로 그때, 무언가 묵직한 것이 나의 어깨에 올라탔다.
“가자 수하, 서둘러 끓어 넘치는 기를 발산해내야 한다.”
고미가 보들보들한 솜털이 가득한 손으로 나의 머리를 감싸 안자, 서늘한 기운이 천천히 몸으로 퍼져 나가며 조금은 이성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방이라도 몸속에서 뭔가가 폭발할 것 같은 기운이 느껴지며 또다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김수하!”
“수하님!”
나는 봉식이와 이강혁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무기를 꺼내 바위와 돌들이 가득 늘어선 산길을 질주했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이 끓어오르는 광기를 주체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바람이 뺨을 스치고, 주위의 풍경이 빠르게 변한다.
크르륵- 크륵-
멀리서 귀에 거슬리는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방향을 틀어 그쪽으로 달렸다.
‘이 기운을 쏟아낼 상대가 필요하다.’
나의 머리가, 아니, 몸이 그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가라! 수하!”
고미가 내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가리키며 외쳤다.
내 키의 배는 되는 바위를 훌쩍 뛰어넘자, 단단한 갑각을 가진 몬스터 세 마리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갑옷처럼 전신을 감싸고 있는 암석에, 기이할 정도로 발달한 상반신과 길고 두꺼운 팔, 그와 반대로 걸어 다니는 것조차 불편해 보이는 짧고 굵은 다리.
나는 곧바로 뛰어내려 그 이름 모를 몬스터 중 한 놈의 머리를 향해 티타늄 주걱을 휘둘렀다.
콰드득!
첫 번째 놈이 바닥을 나뒹굴고, 남은 두 놈 중 하나가 나를 향해 농구공만 한 주먹을 휘두르며 반격을 가해왔다.
쾅!
그 순간, 바위가 떨어진 것처럼 묵직한 감촉이 방패를 타고 전해졌다.
“으아아아!”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 억제할 수 없는 기분에 나는 함성을 지르며 놈을 밀쳐냈다.
그때, 바닥에 쓰러졌던 놈이 머리에서 돌조각을 우수수 떨어뜨리며 달려들었다.
퍽!
나는 곧바로 발을 들어 놈을 걷어찬 뒤 녀석의 머리 위에 티타늄 주걱을 내리쳤다.
콰드득, 퍽!
뭘 때리고 있는지, 어디를 때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주체할 수 없는 힘을 발산하기 위해 그저 미친 듯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뭐지, 어딘가 익숙한 이 감각은······.’
두더지 잡기, 두더지 잡기다!
왜 때려! 왜 때려!
“으하하하!”
미친 사람처럼 바닥에 쓰러진 놈을 두들겨 부수고 나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후우웅-! 꽝!
방패 위로 묵직한 주먹이 떨어지며 덜컥, 무릎이 꺾였다.
‘이 짱돌이!’
공격을 받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오르며 당장 눈앞에 서 있는 저놈을 부숴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다.
“우씨!”
나는 막무가내로 몽둥이를 휘둘렀고, 그중 한 방이 운 좋게 놈의 다리에 적중했다.
그리고는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으헤헤헤! 신기록이다!”
퍽퍽퍽!
두 놈 처리. 마지막 한 놈, 어딨어!
“이리 와! 어딜 도망가!”
나는 겁에 질린 듯 얼어있는 놈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 방패와 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들겨 주었다.
뭐야, 다른 놈! 이제 곧 신기록이라고! 보너스 스테이지!
“어딨어!”
다른 놈을 찾기 위해 감각 강화를 사용하자, 저 멀리서 다른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르······.”
퍽!
바로 그때, 무언가가 나의 관자놀이를 때리며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고, 고미······. 왜······.”
“이쯤 하면 됐느니라.”
* * *
“야, 야! 김수하!”
정신을 차려보니 고미가 나의 이마를 짚고 있고, 봉식이와 이강혁 씨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으으······.”
온몸이 몽둥이찜질을 당한 것 같은 느낌.
내가 두더지를 잡은 것인가, 두더지가 나를 잡은 것인가.
이건 아무리 봐도 내가 처맞은 느낌인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는다.
“고, 고미······.”
“가만히 있거라. 시원하게 기를 뽑아냈으니 이제 몸을 안정시킬 차례다.”
눈동자를 굴려보니 고미의 털 침이 전신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어서 내 몸에 박힌 털 침 하나하나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고미, 뭐 하는 거야······.”
“쉿! 이제 거의 완성되어 간다. 잠시만 더 기다리거라.”
고미가 신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으으, 의원님, 사람을 때려서 기절시켜놓고 침이라니요.
그렇게 몇 분 정도가 지나자, 들끓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잦아들고, 단전에서 시작해 손발은 물론이고 온몸의 솜털과 머리털 한올까지 알 수 없는 기운이 퍼져 나갔다.
“자, 이걸 먹거라.”
‘먹으라’는 말에 몸이 먼저 거부 반응을 보였다.
서, 설마 왕유 알약 버전이라도 먹이려는 거냐, 차라리 날 죽여······.
하지만 고미의 손에 들린 물건의 모양을 보는 순간,
“휴우······.”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모양이 정상이다. 고미가 만든 게 아니라 수다르 할아버지가 만든 영약인 것 같다.
나는 안심하고 오각형의 갈색 단약을 받아 꿀꺽 집어삼켰다.
‘홍삼 캔디 맛이네.’
민트에 이어서 홍삼 캔디라······.
산신령의 영약은 이번에도 취향을 타는 맛이었다.
그래도 왕유에 비하면 천하일미지. 감사히 먹겠습니다.
단약이 흡수되자, 몸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왕유를 먹으면 본래 기가 폭주하여 미치광이가 되거나 기혈이 상하게 되어 있다. 예전에 어리석은 인간들이 이 몸이 만든 왕유를 흉내내어 이상한 약을 만들어 먹고 자신이 광전사라느니 하는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해대기도 했지.”
“뭐, 뭐라고?”
역시 모양이고 맛이고 심상치 않더라니!
몸에 좋은 거라고 일단 믿고 원샷하는 게 아니었어!
게다가 먹고 나서 잠깐 눈 뒤집혀서 이상한 짓하고 돌아다닌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이 몸이 없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위대한 이 몸이 곁에 있다면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건 알려주고 먹여야지!’ 하고 말하려는 찰나, 칼집이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젖혀 그것을 피해냈다.
“무슨 짓······ 응?”
잠깐, 뭔가 이상한데?
내가 이강혁의 공격을 피했다고? 이 거리에서?
“이게 어떻게······.”
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고미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떠냐? 이것이 왕유의 효과다.”
나는 황급히 상태창을 불러 나의 능력치를 확인해 보았다.
< 능력치 >
힘 : 8 (+1) / 민첩 : 13 (+2) / 체력 : 10 (+2) / 마력 : 6 (+1)
지리산 던전의 보상과 산악 지형 버프까지 추가된 능력치지만, 이강혁의 공격을 피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
왕유를 먹고 능력치가 오르지도 않았다.
물론 진심으로 휘두른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내 수준에서 피할 수 있는 공격은 아니었을텐데······.
“굉장하군요. 지금 그 공격은 C급은 되어야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는데 말이죠.”
이강혁이 놀랍다는 듯 나와 고미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렇게 휘두르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곰 선생님께서 딱 너희들이 말하는 C급에 맞는 수준으로 공격해 보라고 하셔서.”
아니,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고미를 그렇게 믿는거야.
뭐······. 그러는 나도 고미를 믿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렇게 연약하고 가녀린 나에게 칼질이라뇨.
어찌됐든, 조금 전 이강혁의 공격은 장군 말벌의 공격보다도 거의 두 배는 빨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킬창도 확인해 보았지만, 새로운 스킬이 생기거나 하지도 않았다.
“고미,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능력치는 변한 게 없는데······.”
“그런 것에 의존하니 진정한 강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왕유는 네가 가지고 있는 힘을 보다 완벽하게 활용하도록 도와주고, 더 큰 힘을 받아들일 그릇을 만들어주지. 이제 넌 진정한 전사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봉식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음······. 그런데 너, 뭔가 인상이 변한 것 같다?”
이강혁도 나를 유심히 바라보며 봉식이의 생각에 동의를 표했다.
“그렇군요. 확실히 조금 전과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그야 그렇겠지. 지금 수하는 조금이나마 환골탈태를 한 상태니 말이다.”
그러자 고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초코바를 야금야금 씹어먹으며 말했다.
“환골탈태? 무협지에 나오는 그거? 그건 무슨 무슨 경지를 넘고 막 몇 갑자의 내공을 쌓아야 가능한 거 아니었어?”
아니, 내가 훼까닥 한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구경꾼 둘이나 달고 흑역사 쌓아놓고 정신 돌아오니까 환골탈태라고!?
“이 몸의 위대한 영약이 있다면 기가 없어도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다. 달리 왕유(王乳)겠느냐? 왕유의 힘으로 탁기를 씻어내고, 근골과 경맥을 강화한 것이다.”
이어지는 설명에 이강혁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고미를 바라보다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왕유가 먹고 싶은 건가? 먹어보면 후회할 텐데.
지옥물이라는게 실존한다면 그런 맛일거라고.
“고, 곰 선생님!”
그러나 고미는 이강혁의 입을 떼기도 전에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왕유는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먹을 수 있다. 네가 먹으면 주화입마에 빠질 것이다.”
'허락해줘, 허락해줘 고미! 아직 많이 남았잖아! 제발 나눠 먹게 해줘! 혼자서 저거 다 먹으면 나 진짜 죽어!'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강혁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이 아닙니다. 부디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말을 마친 이강혁은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고미에게 내밀었다.
“호오······.”
그러자 고미가 눈을 빛내며 이강혁의 얼굴을 훑어봤다.
맛있는 음식이나 단 것을 보았을 때를 제외하고, 고미가 이런 표정을 보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법 귀한 물건인데, 왜 공짜로 내주려는 것이냐?”
게다가 귀한 물건이라는 소리까지. 호기심이 절로 샘솟는다.
“지난번 생에서 제가 이 물건을 먹어보았지만, 결국 초월자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수하님께서 이것을 드시고 곰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반드시 그들을 막아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실 수 없다면, 부디 이것이라도······.”
워, 이게 무슨 소리야.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라, 진짜.
초월자를 막아달라니, 당신이 나한테 이런 부탁하면 안 되지······.
고미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나는 이제 막 싸움 배우기 시작한 전직 대학원생이고, 당신은 3회차 회귀자잖아.
검성도 못 하는 걸 내가 어떻게 해.
물론 이강혁에게 모든 걸 떠넘길 생각은 아니었다.
나와 우리 가족이 사는 세상을 남에게 떠넘기고 모르는 척할 만큼 무책임한 인간은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생각한 내 역할은 어디까지나 잔챙이, 잘해야 중간 보스 정리 정도다.
솔직히 그 이상은 하고 싶어도 무리지.
그런데 초월자라니, 여기서 덥석 그거 맡겠다고 말하는 게 더 무책임하다고.
“그, 저기 이강혁 씨······.”
내가 더듬더듬 입을 열자, 이강혁이 간절한 표정으로 한 번 더 머리를 조아렸다.
와씨, 돌아버리겠네.
그때, 고미가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강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흐음······. 너 같은 회귀자는 처음이구나. 대체 미래에서 무엇을 본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