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 갓-고미님의 예술세계
“고미류 소환술.”
드드드득!
“대웅전(大熊殿)!”
아기 같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숲속에 울려 퍼지는 순간,
크릉!
맹수의 울음처럼 낮고 섬뜩한 소리가 주위를 휩쓸었다.
숲속에 숨어있던 작은 동물들이 벌떡 일어나 달아나고, 나무 위에 앉아있던 새들도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 새도 없이 바닥에서 거대한 목조 건물 하나가 솟아올랐다.
“이, 이게 뭐야?”
“말하지 않았느냐? 대웅전(大熊殿)이다.”
고미가 불러낸 건물은 내가 아는 그 대웅전(大雄殿 : 절에서 석가모니 본존물을 모시는 당우)과 생김새가 제법 비슷했다.
'한자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말이지.'
“녹초가 되었더라도 이곳에서 쉬면 빠른 회복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곳에는 나의 기가 깃들어 있어 주위의 동물과 몬스터들이 다가오지 못하지.”
고미가 아무렇지 않게 대웅전의 문을 열며 말했다.
텐트 괜히 가지고 왔다. 이런 거 할 줄 알면 미리 말 좀 해주지.
“그런데 이건 어디서 난 거야? 네가 만든 거야?”
“아니, 이 몸을 흠모하는 이계의 존재가 인간들이 만든 건축물을 본 따 만들어주었다.”
“꽤 잘 만들었네. 절에서 본 대웅전이랑 거의 똑같아.”
문고리가 곰 발바닥 모양이라든가, 기와 끝에 고미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든가 하는 이상한 부분만 제외하면 말이지.
뭔가 대단한 듯 하면서 묘하게 귀여운게 고미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후훗, 그러하냐?”
“그래? 친구는 없다고 하지 않았어?”
친구가 없다는 말이 생각나 던진 질문이었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잠깐 연이 닿아 작은 도움을 주었을 뿐이지.”
하지만 고미는 그렇게 답하며 쓸쓸하게 웃음을 지을 뿐 이었다.
‘에이씨,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거야.’
나는 차마 묻지도 못하고 고미를 따라 대웅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도움을 받은 대상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만한 건물을 만들어 줄 능력이면 어지간히 대단한 사람임에는 분명해 보였다.
대웅전의 바닥은 윤기가 반질반질 나는 고급스러운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넓이는 어림잡아 100평도 넘어 보였다.
다만 내부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아 조금 삭막하고 휑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살고 있으니 내 집 보고 누추하다고 했던 거구만. ’
그리고 대전의 정면에는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커다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대체 뭘까 이 너저분한 건. 뭔가를 그리려고 한 것 같은데 도통 알아볼 수가 없네.’
깨끗한 부분이 있고 지저분한 부분이 있으니 원래부터 벽이 이 꼴이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 현대미술처럼 난해하지만, 훨씬 더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다.
‘이 찌그러진 원이 사람 머리인가? 괴물 같기도 하고······. 대체 뭘 그리고 싶었던 거야?’
알록달록하게 색칠한 찌그러진 동그라미를 가득 채워넣고, 그 위에 머리카락 같은 걸 대충 죽죽 그려 넣은, 조잡하기 짝이 없는 그림.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가 따로 없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낙서였다.
“후훗. 알아본 것이냐?”
그때, 고미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이게 뭐야?”
“멋지지 않느냐? 괴수 군단에게 맞서는 이 몸의 용맹한 모습을 벽화로 남겨 보았다.”
······.
이게? 어딜 봐서? 아무리 잘 봐줘도 콩나물 시루잖아.
“그럼 이게 너야?”
내가 중앙에 있는 고동색 덩어리 – 덩어리라는 말 외에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조악했다 –를 가리키며 물었다.
형태만 보고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지만, 어린애란 보통 ‘주인공’, 즉, 자신을 그림의 중앙에 그려 넣는 경향이 있다.
특히 자신감이 과한 아이일수록 자신을 크게, 정중앙에 그려 넣는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는 갈색의 ‘무언가’가 크기도 가장 크고, 위치도 정중앙에 있었다.
그러니 이게 고미겠지.
“한눈에 이 몸을 알아보다니, 역시 나의 부하답구나. 감상이 어떠냐?”
으으, 나쁜 말을 하고 싶은데, 눈빛에 너무 기대가 가득해서 도저히 솔직히 말할 수가 없다.
“음, 뭐랄까, 순수한 에너지나 열정, 투지, 그런 게 잘 묻어나는 그림이야. 세세한 묘사는 없지만 그래서 더 힘이 느껴진달까.”
< 고미의 호감도가 3 상승합니다. (43/50) >
헐······.
3점이나 오르네. 이걸 알아봐준게 그렇게 좋은 건가?
“사실 언젠가 부하가 생기면 보여주려고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그린 것이다. 이 몸의 웅혼한 기상이 곳곳에 깃든 걸작이라고 할 수 있지.”
그림에 관해 설명하는 고미의 목소리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부하를 언제 만날 줄 알고?”
“어차피 놀 사람도 없고, 맛있는 것도 없고, 남는 것은 시간뿐이니 시간이 날 때마다 정성을 들여 그려 보았다.”
왜 자꾸 이런 짠한 발언을 하는 거냐 마음 아프게.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힘이 넘치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느낌이 드는 거였구나.”
위로하기 위해 던진 말에 고미는 감동한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호, 혹시 이것도 알아보겠느냐? 그림은 자신 있지만, 조각은 자신이 없어 전시해 두지는 못했는데······.”
······.
자신이 있으셨구나.
말을 마친 고미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검은색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조각상······. 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음. 찌그러진 눈사람? 그냥 돌덩이에 터진 찐빵을 올려놓은 것 같기도 하고. 위에 달린 이상한 덩어리 두 개가 귀인가?’
고미의 귀는 꼭 만화 캐릭터처럼 동그랗고 귀여웠지만, 이건 뭐 짱돌 두 개 올려놓은 모양새다. 그것도 모난 돌.
가장 난해한 것은 고미로 보이는 것 아래에 깔린 '정체를 알 수 없는 쓰레기'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게 대체 뭐지?’
아래에 깔려있는 것으로 보아 적일 거다.
특이한 점은 귀가 네 개라는 점.
귀가 네 개 달린 몬스터도 있나?
뿔일 가능성도 있겠군.
그리고 몸통으로 추정되는 괴상한 물체의 등 쪽에 달린 팔. 팔도 네 개인가?
‘아!’
그때, 머릿속에 섬광처럼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등 뒤에 달려 있는걸 보니 날개야!’
이어서 고미가 유독 용을 싫어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용이네. 제법 강력한 녀석이었나 봐. 하지만 결국 너에게 패배했군. 꽤 치열한 싸움이었나 본데?”
“괴, 굉장하다 수하! 너도 나만큼이나 안목이 높구나!”
그래, 나도 내가 이렇게 안목이 높은 줄 처음 알았다.
이걸 알아볼 수 있는 나 자신이 대견해.
장하다 김수하.
< 호감도가 3 상승합니다. (46/50) >
또다시 3점. 어김없이 호감도 상승 메시지가 올라왔다.
“저 녀석의 뿔을 잘 제련하면 제법 쓸만한 무기를 만들 수 있는데, 이미 버려 버린 게 아쉽구나.”
자신의 화려한 전적을 설명하는 고미의 어깨는 하늘을 뚫을 듯 올라가 있었고,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바로 그때,
< 불가능에 가까운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
고미의 예술세계는 난해하고 심오하여 지금껏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눈에 그것을 알아본 당신은 매우 훌륭한 안목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칭호가 변화합니다. >
제법 훌륭한 안목을 가진 고미님의 부하 1호 (E)
이제부터 고미님의 권능을 보다 잘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칭호 보너스 (마력 소모 없이 감정 가능. 일일 3회)
< 스킬이 추가 됩니다. >
날카로운 곰정사의 눈 (E/ Gomi~F)
마력을 사용해 E등급 이하의 물건을 감정할 수 있습니다.
······.
그것 참, 보상은 확실하네. 언제 뭐가 터질지 몰라서 문제지.
멍하니 시스템 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고미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 자거라. 눈을 뜨면 진정한 전투가 무엇인지 알려주마.”
“어어, 알았어.”
일어나면 뭐라도 감정해 봐야겠다.
* * *
“수하, 일어나라. 이제 다시 산을 올라야 한다.”
고미의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 이렇게 오래 잤나?”
“일부러 내버려 두었다. 몸을 혹사하는 것만이 수련의 전부가 아니다. 나처럼 위대한 전사가 되고 싶다면 휴식 또한 수련만큼 중요하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거짓말처럼 몸이 가뿐하고 온몸에서 기운이 샘솟는 것이 느껴졌다.
으레 있으리라 생각했던 근육통도 없었고, 정신없이 숲을 헤집고 돌아다니느라 생겼던 작은 상처들도 모두 아물어 있었다.
“와, 굉장하네. 네 말대로 상처도 다 낫고, 몸 상태도 너무 좋아.”
하지만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꼬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허기가 찾아왔다.
“이런, 밥을 먹고 나가야겠구나.”
“그래야겠네. 너는 꿀이라도 먹을래? 사놓고 여태 뜯지도 않았잖아. 기껏 챙겨왔는데.”
꿀이라는 말에 고미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더니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것은 4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주고 산 것이 아니냐. 영약을 얻어 약속을 지키면 그때 꿀로 축하연을 열 생각이다. 나는 신의를 아는 곰이니 말이다.”
이제와서 하는 얘기지만, 이 녀석은 정말 자기 말대로 신의를 아는 곰인 것 같다.
“알았어. 그럼 그때 실컷 먹고, 지금은 밥 먹자.”
나는 그렇게 말하며 라면을 꺼내기 위해 더블백을 뒤적였다.
그때, 문득 머릿속을 스친 생각 하나.
‘어, 잠깐. 산삼도 감정이 가능한가?’
라면과 함께 산삼 하나를 꺼내 정신을 집중하자,
<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칭호 효과로 마나가 사용되지 않습니다. (잔여 2) >
- 쓸만한 산삼 (등급 없음)
쓸만한 산삼이다. 산의 정기를 제법 흡수했다.
산신령에게 가져다주면 좋아할 것 같다.
70년산.
‘산신령에게 가져다주면 좋아할 거라고? 그러고 보니 고미도 산신령 어쩌고 했었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라면과 냄비, 휴대용 가스버너를 꺼내 불을 붙이자, 고미는 신기하다는 듯 가만히 앉아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호오······. 요리도 할 줄 아느냐?”
“요리라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만들 줄은 알지.”
라면 못 만드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너도 같이 먹자. 이거 맛있어.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야식 중 하나야.”
“흥미롭구나. 한번 맛을 보마.”
“그런데 산신령이 진짜 있어? 바깥세상 이야기니까 모르려나?”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사이 나는 시스템 창에서 보았던 산신령에 대해 물었다.
시스템은 산신령이 산삼을 좋아한다고 했고, 고미는 어린 산삼을 캐면 산신령이 싫어한다고 말했으니까. 뭔가 아는 게 있어 보였다.
‘산삼 가져다주면 금도끼 주나? 금도끼가 더 비싸겠지?’ 하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도 좀 들었고.
“몰랐느냐? 우리는 지금 산신령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엥? 영약을 찾는다는 게 산신령을 만난다는 소리였어?”
“영약이면 당연히 산신령이지. 예로부터 인간들은 병든 부모를 위해 산신령을 만나 영약을 받아가지 않았더냐? 내가 받을 것은 조금 더 특별한 물건이지만 말이다.”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산신령은 어떻게 생겼을까?
옛날 이야기에 참 많이 등장하는 양반인데.
역시 백발에 기다란 수염을 기른 노인이려나.
“산삼을 선물하면 산신령이 좋아할까?”
나의 질문에 고미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산신령을 만나려면 산삼이 필요하다. 아, 게다가 남는 산삼이 꽤 되니 그것을 산신령에게 주면 영약 말고도 좋은 것을 줄지도 모르겠구나.”
더욱, 흥미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