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라우르와 파괴신 트로이. 두 신의 싸움은 그야말로 천외천의 싸움이라고 불리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트로이는 여전히 자신의 주력기인 파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같은 신조차도 멸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호오? 파괴를 이 정도로 발전시키다니. 대단한걸?”
“이것저것 찍어 먹기만 하는 네 녀석과는 다르게, 나는 오로지 파괴만을 단련시켰다. 내 파괴는 최강이다.”
쿠오오!
트로이의 손에 담긴 파괴의 힘이 주인의 말에 동의하듯 강하게 울부짖었다.
“그래봤자 내 것을 베낀 녀석이 말이 많아?”
빠직.
파괴신이 미간을 꿈틀거렸다.
“왜, 맞는 말이어서 찔리나, 혹시?”
“그 입부터 파괴해 주마.”
“할 수 있다면 해봐.”
두 신의 손에서 동시에 파괴의 힘이 펼쳐졌다. 그래도 명색이 파괴의 신이라는 것인지, 파괴신의 힘이 라우르의 힘을 눌렀다.
“제법인걸.”
“말했지 않느냐? 나는 오로지 이 힘만을 갈고닦았다고.”
동시에, 파괴의 힘이 변형했다. 파괴신의 전신을 덮은 자색 힘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저건….’
“피하는 것이 좋을 거야. 아무리 네 녀석이 만든 힘이라고 해도, 위험할 것이니 말이야!”
파직!
쭉 늘어난 파괴의 힘이 라우르의 옆에 있는 기둥에 박혔다. 당연하게도 기둥은 파괴되어 한 줌의 재가 되어 산화했다.
“이런, 진짜 위험하겠는걸?”
탁.
라우르는 파괴의 줄기를 잡으며 웃었다.
“어떻게… 이것을 만지는 거지?”
“내가 이런 것도 생각 안 하고 덤볐겠어?”
라우르는 태연하게 파괴의 힘에 둘러싸인 반대쪽 손을 치켜들었다.
“이렇게 하면 만사 오케이지. 빡대가리 녀석아.”
“여유를 부리는군.”
살짝은 화가 치민 듯, 파괴신이 더욱 많은 파괴의 줄기로 라우르를 공격했다.
라우르는 쳐낼 것은 쳐내며 천천히 공격을 방어했다. 그 사이, 파괴신의 곁으로 한 무리의 남녀들이 다가왔다.
“파괴신! 잠깐만, 저 녀석은….”
“라우르? 부활했다더니… 벌써 싸우고 있는 것인가.”
저마다 개성 있는 겉모습을 지닌 신들은 라우르를 보며 흠칫 놀라면서도, 파괴신을 돕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하지만.
“어딜.”
쾅!
석찬이 신들을 가로막으며 신마력을 끌어올렸다.
“인간… 네가 강석찬이냐?”
“보면 몰라?”
“들었던 대로 오만방자하기 그지없군.”
그 말에 석찬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오만해? 그건 너희들 아닌가?”
그때, 한 신이 긴 창을 뽑아 들며 석찬에게 다가섰다.
“우리를 앞에 두고 주눅 들지 않다니, 인간 치고 배포가 큰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남신이 든 창에 강력한 투기가 깃들었다.
“그 건방짐도 여기까지다.”
남신이 무자비하게 창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 정도라… 너무 약한데?”
석찬은 멀쩡했다.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점은.
“저건… 보호막인가?”
석찬의 머리 위로 1cm 정도 떠 있는 채 부들거리는 남신의 창. 게다가.
‘멀쩡하군.’
멀쩡하다 못해 작은 흠집조차 나지 않은 보호막을 보며, 남신이 침을 삼켰다.
전투신, 그중에서도 나름 상위권을 무력을 지닌 자신이 흠집조차 내지 못하는 보호막이라니?
그때, 석찬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브, 땡큐.”
‘이브?’
“별말씀을, 고마우면 빨리 끝내주세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은발의 여성을 확인한 남신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인간 여자… 네 녀석이 만든 보호막이냐?”
“맞으면 뭐 어쩔 건가요?”
빠직.
“쌍으로 건방지기 짝이 없군.”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창을 든 손에 힘을 빡 주는 남신을 보며 석찬이 피식 웃었다.
“아까부터 계속 건방지다 그러는데….”
턱.
창을 붙잠은 석찬이 팔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콰직.
창이 기괴한 형상을 띠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인간… 무슨!”
“인간, 인간, 너는 할 줄 아는 말이 건방진이랑 인간밖에 없어?”
“너!”
쾅!
끔찍한 소리와 함께 두 동강 난 창대. 그 사이로 석찬의 주먹이 날아들어 왔다. 남신이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석찬의 주먹 앞에서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
한마디 하지 못하고 급사한 남신이 재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전신이!”
“어찌 이런 일이….”
타 신들의 수군거림에 남신의 정체를 깨달은 석찬이 놀라 재가 된 자리를 쳐다봤다.
‘전신이라고?’
전신.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당장 석찬이 쓰고 있는 가호의 이름이 전신의 가호.
전투 중 발생하는 피로를 거의 제로로 만들어주는 극상급의 가호인데, 그 가호의 주인이 이렇게 약한(?) 신일 줄이야.
‘라우르의 기억에서 나온 대로라면 전신은 전투 신 중에서도 3위 안에 드는 강한 신, 그렇다는 말은….’
“나머지는 다 별 볼 일 없다는 소리네?”
“…….”
신들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석찬의 말이 맞았으니까.
전신은 그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강한 신. 그런 이가 손도 못 쓰고 당했는데, 자신들이라고 저 괴물을 어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전의를 상실했군.’
석찬은 흥이 식었다는 등을 돌리며 말했다.
“무진, 진현, 너희가 해봐.”
“응? 우리가? 왜, 네가 마저 하지?”
진현은 갑작스럽게 기회를 주는 석찬의 모습에 당황하듯 물었지만.
“솔직히 싸우고 싶었잖아? 너희가 더 강하니까, 화끈하게 해버려.”
석찬의 말에 미소 짓고는, 그를 지나 신들의 앞에 다가섰다.
“당신은 또 무엇입니까?”
금발 여신의 물음에, 진현이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
“그래, 당신 말입니다. 설마, 강석찬도 아닌 당신 같은 일개 인간이 저희를 상대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대지신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조소했다. 그 모습에 진현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나를, 아니 우리를 너무 물로 보시데, 그랬다가는 큰코다친다.”
“큰코다쳐요? 호가호위하는 자들이 지나치게 오만하시군요.”
대지신을 비롯한 신들이 저마다 강력한 신력을 발동시켰다.
“그리고, 인간 주제에 말도 짧고… 버릇을 고쳐주도록 하지요.”
그 말에 진현이 어이없다는 듯 대지신을 향해 걸어갔다.
“야이 씨, 진짜 레전드네. 이딴 게 신?”
“어느 안전이라고 막말을 내뱉느냐?”
진현의 말에 화난 신 하나가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서걱.
그를 향해 날리던 주먹은 어느새 진현의 안면이 아닌 바닥에 닿아 있었다. 절단된 팔뚝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게 무슨….”
고통도 잊을 법한 어리둥절함에 빠져 있을 때쯤.
서걱.
이어지는 2격에 신의 목이 달아났다. 이 참상을 만들고도 침착하게 검을 집어넣는 천무진을 보며 진현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나이스, 무진 아재.”
“…….”
“너는 또 뭐야?”
대지신이 단숨에 신 하나의 목숨을 앗아간 천무진을 노려보며 손을 뻗었다.
명색의 대지신이라고 수많은 돌덩이가 쏟아지고 대지가 갈라지며 뾰족한 흙뭉치가 쇄도했지만.
탁, 탁! 쾅!
모든 것을 여유롭게 부숴버린 진현이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픽 말했다.
“기대했는데… 별거 없네.”
“무슨….”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그녀였지만, 정신을 놓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퍼벅!
“끄악!”
촤아악!
“커헉!”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들리는 각기 다른 비명에 정신을 가다듬은 그녀가 땅을 짚으려는 순간.
탁.
희고 가느다란 손이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거기까지예요.”
차가운 눈웃음으로 그를 마주한 이브가 다른 손으로 지팡이를 들어 그녀의 머리 위에 겨눴다.
“아아….”
“아프지는 않을 거예요.”
“너어… 인간 주제에 감히 신을….”
퍼석.
대지신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사라진 입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충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이브는 목 없는 시체 앞에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이라고 인간을 이렇게 개무시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쵸? 석찬 오빠?”
“맞지.”
“경우 없는 신이었어요.”
이브는 피가 튄 지팡이를 손질한 뒤 석찬과 함께 라우르의 싸움을 지켜봤다.
쾅! 콰과광!
그녀가 만든 보호막 아래에서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는 라우르와 트로이의 싸움은 방금 전의 반푼이짜리 신들의 놀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과연 전성기의 라우르를 뛰어넘었다는 말에 걸맞은 무력을 지닌 파괴신과, 원조 최강의 신인 라우르의 맞대결.
쾅!
양 신의 팔에 맺힌 파괴의 힘이 공명해 보호막을 부식시켰다.
파아앗.
이브가 제때 보호막을 다시 쳐주지 않았다면 그 영향이 천계 전체로 퍼져나갔을 수도 있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오빠가 돕지 않아도 돼요?”
다시 한번 보호막을 새로 생성한 이브의 물음에, 석찬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라우르의 싸움이야.”
석찬은 이마가 찢어진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라우르를 보며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죽어도 마지막까지 승부를 보는 것은 그야. 내가 아니야.”
단호한 대답에 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존중할게요.”
“그리고 굳이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라우르가 알아서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석찬이 좁은 눈매로 트로이를 살폈다.
미세하지만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반면, 라우르의 호흡은 일정했다.
‘흥분해서 오버 페이스로 싸우고 있어. 이제 곧 힘이 다할 터.’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트로이는 열등감의 근원인 라우르 앞에서 그는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힘을 흘리고 있었다.
라우르도 일찌감치 그것을 캐치하고 페이스를 조절하며 싸움에 임하고 있었으니, 이는 금세 결과로 나타났다.
“헉, 헉.”
숨소리가 보다 거세졌고, 전신에 맺힌 파괴의 힘 또한 눈에 띄게 옅어진 것이다.
“끝을 볼 때가 된 것 같구나.”
하지만 여전히 쌩쌩한 라우르는 그의 앞에 선 채 조용히 파괴의 힘을 장전시켰다. 그의 손날이 트로이의 목에 닿기 일보 직전.
“왜….”
트로이가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나는… 네 녀석을 뛰어넘을 수 없는 거지?”
“나는 노력했다. 과거의 네 녀석을 뛰어넘기 위해 피를 깎는….”
이어지는 그의 한탄에, 라우르는 완전히 사라진 파괴의 힘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방금 네 입으로 말했네. 내 과거를 쫓는 이상, 너는 절대 나를 뛰어넘을 수 없어.”
“허어….”
파괴신의 허무한 음성이 들려왔다.
“뭐, 우리 둘 사이에 대화가 필요하지는 않잖아? 궁금한 것도 다 알았으니… 이제 끝내자고.”
“그래, 죽여라.”
개운한 표정을 짓는 파괴신은 깔끔하게 자신의 목을 내주었고, 그날로 한 줌의 재가 되어 천계에서 떠나갔다.
파괴신까지 죽은 이후, 모든 신이 사라진 시점에서 천사들은 더 이상 싸울 의지를 비치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니다. 라우르.”
“오냐, 신수가 환해졌어.”
대신, 대천사 하나가 그들을 찾아왔다.
아이테르. 과거, 라우르의 부하이자 천사장이었던 그는, 이제는 여덟 장이 된 날개를 고이 접은 채 석찬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라우르 님의 부활을 도와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G에게 들어보니까 이 갑옷도 당신이 보관하고 있었다는데….”
“예. 그것을 포함한 라우르님의 물건은 모두 제가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돌아오실 당신을 위하여.”
재차 자신을 향해서도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며, 라우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얘가 다 좋은데, 이런 면이 조금 있어.”
“이런 면이 뭐죠?”
“아냐. 그보다, 내 물건 다 네가 가지고 있다고?”
“예.”
그 말에 라우르가 씩 웃으며 진현과 천무진을 바라봤다.
“좋았어. 그럼 이참에 무기랑 방어구 좀 바꾸자. 꾀죄죄한 거 그만 쓰고.”
“괜찮으십니까? 그건….”
“괜찮아. 다 따라와. 아, 이브는… 야, 석찬이.”
“옙.”
“너, 신들 보물 창고 어딘지 알지?”
“물론이죠.”
라우르의 기억은 물론 고든의 흔적에서도 수도 없이 봐왔기 때문에 약도도 훤히 아는 것이 바로 보물 창고다.
“거기서 좋은 거 몇 개 골라… 아니지. 걍 필요한 거 다 챙겨도 된다고 해. 이제 주인 없으니까.”
“옙, 그러죠.”
“아니, 우리는? 우리도 보물 창고….”
“너는 닥치고. 내 물건이 훨씬 좋으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투덜거리는 진현을 단숨에 제압한 라우르가 두 사람을 끌고 아이테르와 길을 나섰다.
“우리도 갈까?”
“네.”
석찬과 이브도 손을 잡고 보물 창고를 향해 떠났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고, 완전히 모습을 탈바꿈한 세 인간과 석찬, 그리고 라우르가 씩 웃었다.
“자, 그럼 이제 가볼까. 마계로.”
“가보자고요.”
다섯 사람 앞에 마계로 향하는 게이트가 생겨났다.
“예상보다 빨리 끝나서, 마계에서는 넉넉하게 이 주 정도의 시간이 있을 거다. 그 안에 빠르게 끝낸다.”
“옙.”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아이테르의 배웅을 받으며, 다섯 사람이 천계에서 벗어났다. 목적지는 마계, 그중에서도 마신이 거주하는 마신의 성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