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단 한 사람으로 인해 초토화가 된 세계수 중앙. 당연하게도 마을은 순식간에 뒤집혔다.
“어제 기억나?”
“몰라, 윽. 아직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엘리자베스의 마력에 노출되었던 자들은 모두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거나 기절해,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베테랑 사냥꾼 같은 소수의 강자는 정신을 잃지 않았고,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내뿜는 상상 이상의 마력을 말이다.
“봤어? 그 여자가 뿜어내는 마력.”
“응. 그 느낌… 분명 악마였어.”
게다가 잔뼈가 굵은 이들은 단박에 엘리자베스의 정체가 악마임을 알아챘다.
“왜 악마가… 게다가 이렇게 대놓고?”
“조직들이랑 연관이 있는 건가.”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둘 엘리자베스에 대한 추측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그때, 발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뭐 하냐.”
“어엇, 오셨습니까?”
그를 본 베테랑 사냥꾼 하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베테랑 사냥꾼을 고개 숙이게 할 수 있는 힘.
사냥꾼 길드 70층 지부장, 베르톨트 메이먼은 눈살을 찌푸리며 박살 난 세계수 중앙을 바라보았다.
“뭔 일이냐, 이건.”
“어제 못 느끼셨습니까?”
부하 사냥꾼의 말에, 베르톨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어제 잠시 아래층에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거든.”
“아. 그러니까 말이죠….”
베르톨트는 조용히 부하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웬 악마 새끼가 하나 나타나 날뛰었단 말이지? 그것도 우리 구역에서.”
“예.”
그 순간 둥글둥글했던 베르톨트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푸른 눈이 더욱 서슬 퍼렇게 빛났다.
‘힉.’
그 모습에 베테랑 사냥꾼을 제외한 모두가 몸을 벌벌 떨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가 눈을 감았다.
그의 몸에서 마력이 퍼져나갔다.
‘나왔다, 지부장님의 마력 탐지.’
일반적으로 스킬을 발동했을 때 흘러나오는 푸른 마력보다 짙은 마력이 물 흐르듯 아수라장이 된 광장을 쓱 훑었다.
쏟아지는 정보를 확인하며, 베르톨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기운… 귀족급이군. 백작급 아니 그 이상인가…”
그의 말에 베테랑 사냥꾼들이 침음했다.
‘백작급?’
70층에 100년 이상 거주해 오면서, 그들은 나름 많은 수의 악마를 토벌해왔다.
중급 악마는 이제 혼자서도 척척 잡아내며, 힘을 합치면 최상급 악마도 어렵지 않게 토벌해낼 수 있는 그들조차 귀족급 악마는 까다로운 존재였다.
우선 귀족급 악마가 지닌 권능이란 변수, 이것 하나만으로 악마의 전력의 최상급 악마였던 시절의 몇 배로 상승한다.
‘남작급도 진땀을 흘리면서 잡아야 하는 판국에… 백작급?’
게다가 지부장은 최소 백작급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악마가 후작급 이상일 확률도 있다는 것.
‘우리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훗.”
그런 그들의 마음을 읽었는지, 베르톨트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날 믿지 못하는 것이냐.”
“아…!”
그 한마디에 베테랑 사냥꾼들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베르톨트, 그만 따라가면 뭐든 두려울 것이 없다. 설령 그것이 신일지라도.
사냥꾼 길드 70층 지부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그럼, 찾으러 가보자고. 악마 새끼 족치러.”
“예.”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어두운 공간 안.
“여기.”
“고맙다.”
석찬은 로베르트가 건네주는 물을 마시며 누워 있는 엘리자베스를 바라봤다. 일전의 폭주는 어디 갔냐는 듯이 곤히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
[여기서도 폭주했으면…]
‘생각도 하기 싫네요.’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세계수 뿌리, 그 어딘가. 정확한 위치는 석찬도 몰랐다. 그저 작은 구멍 안에 사람 몇 명은 거뜬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보였기에, 잠시 피신한 것에 불과했다.
‘만약 라우르의 말대로 여기서 폭주를 일으킨다면…’
공간은 무너지고, 모두 꼼짝없이 생매장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예요?”
어둠 속에서, 이브가 물었다. 주어는 없었지만, 모두가 어떤 걸 질문하는 건지 잘 알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 아시다시피, 저와 누님은 악마입니다. 저의 무력은 아직 후작급에 불과하지만, 누님은 공작급. 무력으로만 따진다면 마계 안에서 10위 안에 들어갈 겁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맞죠. 중요한 건 이거죠.”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작은 화염이 타올랐다.
“이건…”
“석찬 님은 멍청한 소 녀석을 상대해봐서 아실 겁니다.”
로베르트가 생성해낸 불꽃. 그것은 일반적인 불꽃이 아니었다.
[권능.]
그렇다. 그의 말대로 레벨리온과 겨뤘던 전적이 있는 석찬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권능이 무슨 상관이지?”
“아주 큰 상관이 있죠. 그나저나… 그 전에.”
로베르트는 살며시 궁금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네 쌍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 먼저 설명하는 시간이 있겠습니다.”
로베르트는 최대한 빠르고 간결하게 권능에 대한 설명을 마쳤다.
“그러니까, 권능이란 건 귀족급 악마들만 가질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이라는 건가?”
천무진의 물음에 로베르트가 고개르 끄덕였다.
“제 권능은 인페르노(Inferno). 지옥의 멸화(滅火)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나름 뛰어난 능력이죠.”
“그래서, 권능이 무슨 상관…”
“저희 누님의 권능은… 질투.”
“응?”
이름만 들어서는 무슨 능력인지 전혀 예상이 가지 않는 권능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들은 라우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질투라고?]
그는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사람처럼 놀라 소리쳤다.
‘왜요? 특별한 능력이에요?’
[특별하냐고? 석찬아, 저건 특별한 정도가 아니다.]
라우르는 말했다.
[마계의 권능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일곱 개의 권능 중 하나가 바로 질투다.]
그 말에 석찬의 눈이 동그래졌다. 곧이어 로베르트가 부가 설명을 이어갔다.
“질투. 만약 이 권능의 소유자가 질투심이 상승한다면… 만약 특정 상대를 질투한다면, 권능은 그자를 뛰어넘을 만한 힘을 주죠.”
“에?”
“그게 무슨…”
그 말에 진현과 천무진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능력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런가.]
그에 비해, 라우르는 담담했다. 오히려 그가 놀란 쪽은.
[질투의 소유자는 다른 녀석이었는데, 그 녀석이 죽은 건가. 놀랍군.]
이런 것이었다.
‘라우르, 질투의 소유자를 만난 적 있어요?’
[그래. 녀석… 일시적이지만 날 뛰어넘는 힘을 발휘하기도 했어.]
‘예?’
전성기 시절, 천계의 최강자로 불리며 모든 신의 정점에 도달했던 것이 바로 라우르. 그런 그를 뛰어넘을 정도라니.
[물론 처음 한 번에 불과했지. 이긴 건 나였어.]
그래도, 조금이라도 라우르를 뛰어넘다니. 왜 가장 위대한 권능 중 하나라는지 알 것 같았다.
“믿기 힘들겠지만, 맞습니다. 누님이 탑에 머무는 이유기도 하죠.”
로베르트는 말했다.
엘리자베스에게 잘못 걸려 그녀의 힘을 더 불려주기 전에, 탑이라는 곳에 격리하다시피 보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천사 측에서 태클이 들어오지 않았나?”
그렇다. 탑을 만든 신과 천사들이 공작급 악마인 엘리자베스가 탑에 들어온다는데 마냥 손들고 환영할 리가 없었다.
“날카로우시군요. 역시 누님의 주인. 그런데 천사 쪽도 그리 큰 반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질투로 강해지는 권능. 이는 제한이 없고, 과거에는 마신을 질투해 그를 뛰어넘는 힘을 지닌 소유자가 나온 적도 있는 모양이었다.
“천계 측에서도 그런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하고 싶었기에 별 반대 없이 누님을 탑에 들였습니다.”
“그렇군.”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누님의 폭주에 대해 설명하자면… 하…”
로베르트는 대뜸 한숨을 내쉬었다.
“석찬 님.”
“응.”
“아…”
말하기 머뭇거리는 그를 보며, 석찬을 포함해 공간 안의 모두가 의문을 표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도 있습니까? 형님.”
진현의 물음에 로베르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뇨, 전혀. 그나저나 제가 언제부터 당신 형님…”
“누님 동생분이면 형님이시죠.”
“뭐, 알아서 부르세요. 그나저나… 석찬 님, 혹시 아십니까?”
“뭘?”
“누님이 당신 좋아하는 거.”
“???”
그 말에, 석찬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그게 뭔…”
“역시…”
로베르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 모름?”
“고자가 따로 없군.”
“…….”
진현과 천무진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고, 이브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저 아줌마가 아저씨 좋아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렐의 해맑은 물음만이 동굴 전체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질 뿐이었다.
* * *
[그게 뭔…]
[역시.]
“이제야 알아챈 거야?”
수정구를 들여다보는 백안이 밝게 빛났다.
백발 백안의 여인 등 뒤로 여섯 장의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석찬 님, 이런 구석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훗훗.”
날개에서 흘러내린 깃털이 침대보를 덮는다.
에피르는 수정구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날개를 정돈했다.
“그나저나, 진짜 인간을 좋아할 줄이야… 엘리자베스.”
그녀는 무심하게 엘리자베스를 흘겨봤다.
“석찬 님이 아무리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강함을 지니고 있다만….”
뭐, 됐다. 굳이 악마의 속마음을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에피르는 수정구의 위치를 바꿔 세계수를 띄웠다.
‘다들 꽤나 열심히 오르고 있네.’
그곳에는 아등바등 세계수를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내자의 공지 이후 더욱 필사적으로 세계수를 오르는 그들을 보며 에피르가 작게 웃었다.
‘어디 한번 열심히 올라보세요. 할 수 있다면 말이죠.’
[으악!]
그때, 한 남자가 밟고 있던 세계수 껍질이 부서지며 그 몸이 급속도로 추락했다.
콰직-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고, 끔찍한 꼴로 죽음을 맞이한 남자의 모습이 산화해 흩어졌다.
이는 굳이 그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곧이어 몇 명의 사람이 세계수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모두가 죽는 것은 아니었다.
[올랐다!]
세계수의 꼭대기에 오른 이들도 분명 존재했다. 그들의 몸이 흩어졌다.
‘71층으로 갔군.’
이어서 71층, 72층… 가장 빨리 세계수를 오른 이는 벌써 79층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에피르도 익히 아는 자였다.
‘저 녀석은… 이번이 다섯 번째 이벤트 참여라고 했던가.’
마지막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그의 정신은 한 발 한 발 세계수를 오르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으아아!]
하지만 남자는 얼마 못 가 추락했고, 그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에피르는 다시금 수정구를 석찬에게 비췄다.
당황한 채 뭐라고 말하는 그를 보며,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과연, 석찬 님은 어디까지 오를 수 있을까요? 77층? 78층? 어디까지 오르든 재밌겠네요.”
그녀의 웃음이 작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