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미쉘 그레이스. 과거 탑을 오르던 시절, 알렉산더의 동료였던 그녀는 알프레드 올렉과 함께 그를 배신한 자 중 하나였다.
그녀는 말했다.
‘자신들이 심어두었던 뭔가가 울렸다고.’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탑의 최상층에 사는 그녀가 직접 찾아올 정도라면 여간 급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또 뭐야?’
석찬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네 명의 남녀를 바라봤다.
한 명 한 명이 개성 넘치는 외형인 그들은 신기한 듯, 석찬의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도대체 뭔….’
깨어나자마자 온몸을 해부당하고 있자니 짜증이 몰려왔다. 게다가 어찌 된 것인지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상태. 그때,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백발의 남자가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어이, 녀석이 깨어났다.”
“진짜네. 눈 뜬 것 좀 봐.”
다른 이들도 하나둘 석찬과 눈이 마주쳤고, 그는 갑자기 몰려오는 네 쌍의 눈빛에 눈을 감으며 물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죠?”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녹발의 여인이었다.
“대장이랑 싸우고 있다던 사람이 누군가 해서 구경하러 온 건데. 근데 대단하다, 너. 탑은 몇 층까지 오른 거야? 80층? 설마 90층?”
그녀의 물음에 석찬이 한숨을 내쉬뭐 답했다.
“…70층입니다.”
“에에?”
그 말에 네 남녀 전부가 놀라 뒤로 자지러질 뻔했다.
“70층이라고? 정말? 그 크기만 뒤지게 큰 나무 있는 층?”
“네.”
“대박이네. 그 시절 우리보다 강한 것 같은데?”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음, 맞지 맞지.”
서로 고개를 끄덕이는 백발의 남자와 청발의 남자. 그들에게 석찬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여러분은 누구시죠? 아까 대장이라고 했는데, 알렉산더 님과 아는 사이십니까?”
그 말에 네 사람이 웃음을 멈추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뭐, 그렇지? 아는 사이였지.”
“그와 같이 탑을 오르셨던 겁니까?”
“맞지.”
그제야 석찬은 그들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먼 과거, 6층에서 보았던 알렉산더의 앨범. 지금 그들의 얼굴은 사진 속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그쪽 분은 염색을 하신 것 같은데….”
석찬의 눈이 향한 곳에, 노란색 단발을 지닌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설명해 주시죠. 여러분이 왜 여기 있는지. 그리고 그녀는, 미쉘 그레이스는 어디 있습니까?”
그의 물음에 백발의 남자가 병실 뒤쪽 문을 가리켰다. 그쪽에는 병상에 누워 있는 알렉산더와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미쉘이 있었다.
“알렉산더?”
“일단 무사해. 상처도 메리가 치료해줘서 다 나았고.”
“메리?”
“나야!”
녹발의 여인이 번쩍 손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난 메리 로저. 잘 부탁해, 강석찬.”
“잘… 부탁드립니다.”
석찬은 조심스레 메리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너 진짜 세다며? 내 부하 놈보다 셀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앞으로 사이좋게…”
“아,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그때 갑작스럽게 메리의 말을 끊으며 들어오는 청발의 사내.
“야, 말 끊지 마!”
메리가 그에게 역정을 내봤지만, 청발의 사내는 가볍게 무시하며 말했다.
“대장께서 말씀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분께서 쫓…겨나실 때 우리는 그분을 감시하기 위해 일종의 장치를 심어놨지.”
“필요 이상의 힘을 쓰면 발동하는 건데! 이 양반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100년 넘게 소식이 없던 게 울리더라고? 혹시 몰라서 우리 전부 왔어! 아, 새로운 대장은 빼고.”
“아.”
아마 미쉘이 말한 심어놓은 것이 청발의 사내가 말한 장치고, 새로운 대장은 알프레드를 뜻하는 것 같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계시네요.”
그때 쭉 알렉산더만을 응시하던 미쉘이 처음으로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깨어나셨나요?”
석찬을 보며 묻는 물음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미쉘은 천천히 석찬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왜 그러시는 거죠?”
“눈빛이 달라졌어.”
석찬의 물음을 가볍게 무시한 그녀가 갑자기 석찬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뭐 하시는 거냐고…”
탁.
그때 미쉘이 강하게 석찬의 왼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건틀릿, 벗어봐.”
그 말에 석찬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그의 몸은 전투 때 입는 갑옷 세트와 건틀릿이 전부 무장된 상태.
게다가 에피르가 혹시 몰라 준 천사의 힘을 숨겨주는 장갑까지 착용해, 문양에서 흐르는 신력을 느낄 수 없을 터.
하지만 그녀는 정확히 왼손을 가리키며 건틀릿을 벗으라 하고 있었다.
‘큭….’
그녀가 주는 압박이 심해짐과 동시에, 건틀릿에 조금씩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알았어요.”
결국 고개를 끄덕인 석찬이 조심스레 건틀릿과 장갑을 벗었다. 그러자 두꺼운 강철 안에 감춰져 있던 순백의 날개 문양이 드러났다.
“저건…”
한데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두렵다는, 혹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문양을 보고 몸을 떠는 사람들을 보며, 석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 문양이 뭔가 잘못됐나요?”
그 말에 조금 전 손을 들었던 녹발의 여인, 메리가 입을 열었다.
“그 문양이 천계 소속의 인간임을 입증한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네.”
“여기 사람들이 전부 천계를 싫어하거든요. 혐오스러워하는 수준에 가까워서요.”
그 말에 석찬이 놀라 이유를 물으려고 했지만.
“더 이상은 묻지 말아라.”
살기를 내뿜는 미쉘 때문에 입을 다물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장갑을 다시 쓴 것은 덤.
[저 여자, 볼 때마다 살기 하나는 기가 막힌다니까?]
‘그러게요. 정말 대단해요.’
괜히 96층에 오른 자가 아니라는 듯, 미쉘은 진하고 강력한 살기를 오로지 석찬만을 향해 쏘아냈다.
페널티로 위력이 극히 약화되었다고 해도 무시 못 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너도 물었으니 우리도 너에게 물을 것이 있어. 도대체 왜 대장이랑 싸운 거지?”
“알렉산더랑요?”
“그래, 거짓말하면… 알지?”
방금보다 더욱 강한 살기를 뿜어내는 그녀의 모습에, 석찬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설명이 시작되었다. 렐을 훈련시키기 위해 알렉산더를 찾아온 일 그리고 그가 10년 동안 연락 하나 없다가 갑자기 찾아온 자신에게 분노해 싸움을 걸었던 일까지 전부 말이다.
솔직히 렐에 관해서는 비밀로 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스윽.
석찬의 눈에 맞은편 병상에서 잠들어 있는 렐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미 아는 것 같으니… 숨기면 오히려 오해를 받을 수 있어.’
석찬의 설명을 전부 들은 미쉘과 그녀의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속 좁기로 유명한 대장이라면, 그런 걸로 화났을 수 있겠어.”
청발의 사내의 말에 메리와 미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대장도 참, 몇 살인데 그렇게 유치해!”
메리가 발을 굴리며 알렉산더가 있는 방향으로 허공에 주먹을 날렸다.
‘그건 당신도 비슷한 것 같은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알렉산더의 동료였다면 당근 96층까지 갔을 거고, 힘 차이도 명확할 테니 굳이 속을 긁는 소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메리, 애처럼 행동하지 말아라.”
백발의 사내가 그녀를 집어 올려 침상 반대편으로 옮겨놨다.
“뭐 하는 거야, 드레이븐? 지금 숙녀의 옷가지를 함부로 만진 거야?”
메리가 하는 말을 듣고 석찬은 백발 남자의 이름이 드레이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레이븐은 메리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안 했으면 더 했을 거잖아.”
“그래도….”
“조용.”
그때 살벌하게 들려오는 미쉘의 목소리.
“넵…”
시끄러워지려던 상황을 한 번에 제압한 그녀가 석찬을 향해 말했다.
“우선, 별로 큰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판단했으니, 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
“바쁘신가 봐요?”
“미쉘이 저래 봬도 사냥꾼 길드 부길드장이야!”
“진짜요?”
‘어쩐지. 높은 사람이었구나.’
과거 사냥꾼 길드에 들어오면 준다고 했던 혜택들이 어지간한 간부급도 함부로 결정 못 할 것들이었는데, 부길드장이라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저 무력이면 부길드장이라는 것이 이상하지 않지.]
‘그쵸.’
드레이븐, 메리, 청발의 사내, 그리고 금발의 여인까지.
금발의 여인은 기운을 꼭꼭 숨기고 있어 모르겠지만, 잠자는 용처럼 잠들어 있는 그들의 마력 중에서도 미쉘의 마력은 발군이라고 볼 수 있었다.
7년의 수행을 마친 석찬마저도 보자마자 패배하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 알프레드는 이것보다 더 강하다는 거야?’
사냥꾼 길드의 길드장, 알프레드 올가. 그의 무력은 가히 짐작되지도 않았다.
“어쨌든 메리, 드레이븐, 랜스, 베로니카. 일주일 정도 휴가를 줄 테니 대장과 석찬을 잘 보살펴 주도록.”
“일주일 휴가?”
“나이스!”
갑작스러운 휴가 소식에 기뻐하는 그들을 뒤로하고, 석찬이 떠나려는 미쉘을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왜?”
“당신, 지금 알프레드를 따르고 있는 거 아니에요?”
“…맞지?”
“그런데 왜 알렉산더를, 우리를 도우고 있는 거죠?”
먼 옛날, 알렉산더를 배신해 그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이제 와서 도와준다니. 이상했다.
합리적인 의심에 미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은 말해주지 못하지만, 우리가 마냥 대장을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것만 알아둬라.”
“맞아. 대장 최고였어! 밥도 잘 사주고, 술도… 악!”
결국 메리의 정수리에 큰 혹이 생겨났고,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를 뒤로하며 미쉘은 1층을 떠나갔다.
“그럼, 모두 일주일 후에 봐.”
“오케이, 우리에게 맡겨.”
청발의 사내, 랜스가 미쉘을 떠나보냈고, 고개를 돌려 석찬을 바라봤다.
음흉한 그의 미소에 석찬이 흠칫하며 물었다.
“뭔…가요?”
“조금 미안한 부탁일 수 있는데, 나랑 대련 한 판 해줄 수 있을까?”
“대련?”
“너랑 한번 붙어보고 싶어서.”
그게 무슨 개소린가. 96층까지 가신 양반이 70층에 머무는 애송이에게 싸움을 걸다니. 심지어 알렉산더처럼 마력을 못 쓰는 것도 아니고, 보라색 마력을 풀풀 풍기며 말이다.
“진심인가요?”
“응. 진심이야.”
그의 투지를 느끼며, 석찬이 고뇌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련을 승낙하지 않는 것은 남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련을 하며 무언가 깨달을 수도 있으니, 솔직히 대련을 승낙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가 고민하는 것이 있으니.
‘메리트가 부족해.’
아무리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도, 둘의 실력 차이가 워낙 명확하기에, 대련이 순식간에 끝나면 말짱 도루묵. 그냥 체력만 소비하는 꼴이었다.
‘또 쓰러지면 안 되지. 난 빨리 렐의 스승님을…’
그때, 랜스가 말했다.
“혹시 걱정인 게 있다면, 조건을 하나 더 붙이지.”
“조건?”
“너, 저 녀석 스승 구하려고 왔다고 했지?”
랜스가 렐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쵸.”
“만약 네가 대련에서 이긴다면, 우리가 저 녀석을 가르쳐주지.”
“뭐라고?”
[개꿀 아냐?]
당황한 석찬을 향해, 랜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대련 조건은 네 녀석에게 맞춰주도록 하지. 또…”
이런저런 말이 오갔지만, 석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96층까지 오른 탑의 전설들에게 렐을 맡길 수 있다면.
그의 머릿속에 더 이상의 계산은 없었다.
“콜. 합시다.”
그렇게, 랜스와 석찬의 대련이 성사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