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금발에 벽안을 지닌 거한, 알렉산더가 웃을 때마다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사라진다.
“아이고, 우리 강석찬 씨. 참으로 얼굴 보기 힘들어?”
턱-
어깨에 얹힌 손에서 꽤나 강한 압력이 전해져온다.
“그, 여긴 어떻게?”
“그러게, 나도 참 의문이다. 오랜만에 산책을 나왔더니 10년째 연을 끊은 제자 놈이 있다? 이건 못 참지. 그치?”
“그동안 못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암, 죄송해야지.”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무려 10년 만의 방문이다. 특히 최근 7년은 훈련 때문에 편지나 연락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 사과하는 것이 당연했다.
알렉산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석찬을 흘끗 쳐다봤다.
“그나저나, 뭔 짓거리를 하고 지냈기에 몸이 그러냐?”
“이것저것 했죠.”
“옆에 애는 또 누구고? 설마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여자 친구라든가….”
“아니고요. 일이 있어서 만나게 된 애예요.”
“호오?”
알렉산더가 신기한 듯 렐을 바라봤다.
“엘프야? 오랜만에 보네. 100년 만인가?”
눈을 빛내는 그의 모습에 렐은 무서운 듯 몸을 떨며 석찬의 뒤로 숨어들었다.
“저 아저씨, 무서워.”
“보기와는 다르게 착한 분이니까, 무서워하지 마.”
“보기와는 다르게?”
“그럼, 아닙니까?”
“10년 동안 쪼금은 강해졌나 봐? 나한테 얻어맞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허허.”
알렉산더의 몸에서 가공할 만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력을 다루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양.
“오랜만에 한 번 해야지? 연락 끊고 10년 동안 얼마나 강해졌나 한번 볼까?”
알렉산더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후웅-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빛처럼 빠른 주먹이 석찬을 향해 날아왔다.
쾅!
‘흐읍!’
주먹을 받아낸 석찬이 신음했다.
‘역시 예전에는 많이 봐주고 계셨던 거였어.’
단 한 합으로 석찬은 깨달을 수 있었다. 알렉산더의 힘은 제아무리 지금의 석찬이라고 하더라도 마력 없이는 쉬이 받아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긴, 과거 보라색 마력 그중에서도 정점에 도달했던 알렉산더가 아무리 마력을 다루지 못한다고 해도 그간 쌓아왔던 힘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막아? 어디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보자!”
쿵!
96층까지 오르며 쌓아왔던 그의 피지컬은 여전히 강력했다.
땅을 한 번 찍을 때마다 땅이 갈라지고 나무의 밑동이 흔들린다.
‘마을이 아니라 다행이지….’
만약 마을 안에서 알렉산더를 만나 싸움이 시작됐으면 정말이지 큰일이 날 뻔했다.
“렐, 뒤로 피해 있어.”
“넵!”
점프 한 번으로 자리에서 벗어나는 그녀를 보며, 알렉산더가 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오호? 저런 유연성이라니, 또 뭘 찾은 거냐?”
“말했지 않습니까. 70층에서 우연히 만난 아이라고.”
“그래, 그럼 하던 거나 마저 하자!”
알렉산더가 석찬을 밀쳤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가슴팍이 저릿저릿했다.
‘마력을 써야 하나?’
솔직히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알렉산더를 이길 수단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마력을 썼다간.’
70층까지 올라오며 늘어난 신체 능력, 마력과 강마력 심지어 신력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된 석찬이 마력을 사용한다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봐서 시작한 대련에 유혈 사태를 일으킬 수는 없다.
그런 석찬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알렉산더가 씩 웃으며 말했다.
“마력 쓰게? 한번 써봐라. 나는 두렵지 않으니.”
그 말에 석찬은 진지한 투로 물었다.
“진짭니까?”
“물론이지. 내가 실없는 소리나 할 놈으로 보이냐?”
“조금은?”
“이 자식이…”
순간 라우르의 몸에서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력과는 다른, 그렇다고 신력도 아니었다. 생전 처음 느끼는 기운에 석찬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처음 보지? 영광으로 생각해라, 이 힘을 보는 것도 네가 처음이니!”
순식간에 몇 배는 빨라진 속도로 달려드는 알렉산더. 석찬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몸을 날렸지만,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해 다리가 충돌에 휩쓸렸다.
‘큭…!’
단 한 방에 부러진 다리. 심지어 의문의 힘을 보고 마력을 두른 상태였는데도 부러진 것이었다.
당황한 석찬이 치료 마법을 사용하며 알렉산더의 피부 위로 흘러내리는 아지랑이를 살폈다.
진한 붉은빛을 띠고 있는 오라는 마치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았다.
“그러게, 뭘까?”
알렉산더는 대답 대신 주먹을 휘둘렀다. 살벌한 속도와 파괴력에 석찬은 온 힘을 다해 주먹을 피해냈다.
찌릿.
그런데 그저 주변을 스친 것만으로도 몸이 저려온다.
‘이건, 마치 살기 같잖아?’
하지만 살기는 위협용으로 뿜어내는 용도일 뿐, 몸을 강화해주지는 않는다.
“궁금하지? 이게 뭔지.”
“예.”
“그럼 날 이겨봐라!”
알렉산더의 주먹이 풀밭을 갈랐다. 그때를 틈타 석찬이 강마력을 발동했다.
층간 페널티로 위력은 현저히 줄었지만, 상관없었다.
“조금… 아플 겁니다!”
“와라!”
쾅!
석찬과 알렉산더의 주먹이 동시에 충돌했다.
콰앙!
거대한 파장과 함께 두 남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헉…”
나무 위에서 두 남자의 치열한 대전을 지켜보던 렐이 침을 삼켰다. 솔직히 지금까지의 싸움만으로는 석찬의 위력을 특정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꽤 있었다.
레벨리온과의 전투도 기절해서 보지 못했던 그녀에게 석찬의 위력은 크게 실감하지 않았다.
비로소 지금의 전투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석찬은 그냥 강한 것이 아니다.
“겁나 강하다… 아저씨.”
그를 바라보는 렐의 눈이 더욱 빛났다.
“큭…”
“강해졌군.”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어서 말입니다…!”
두 남자가 다시금 격돌했다. 층간 페널티로 본신의 능력을 반의반도 내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한 번 격돌할 때마다 천지가 진동하고 숲이 쓸려나갔다. 오죽하면,
“또 무슨 일이야?”
“설마, 몬스터? 고블린?”
마을에서도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으며, 몇몇 이들은 십수 년 전의 악몽인 고블린 군단 사건을 떠올리기도 했다.
“헉, 헉.”
“끈질긴 새끼….”
어느새 날은 저물어가고, 거대한 크레이터 중심에서 석찬과 알렉산더가 서로를 마주 봤다. 전신의 가호 덕분에 싸우는 데 체력 소모는 거의 없었지만, 마력을 하도 많이 사용하다 보니 정신력이 부족한 지경이었다.
“전 쓰러지지 않습니다.”
“오냐, 또 와봐라!”
그 말에 석찬이 힘을 모았다. 정신력을 한계까지 끌어내며 만든 거대한 마력의 주먹, 얼티밋 피스트가 압축되어 모아진다.
‘여기에…’
신력의 일부가 덧씌워진다. 비록 한계가 있어 소량밖에 두르진 못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을 완성해낸 석찬이 알렉산더를 노려봤다.
“멋지구먼, 그럼 나도…!”
그 또한 주먹을 쥐더니 붉은 기를 끊임없이 축적하기 시작했다. 종국에는 팔이 부들부들 떨릴 때까지 힘을 모은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달렸다.
“흐아압!”
“크아압!”
서로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두 사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렐은 두 눈과 귀를 가렸고, 곧이어 거대한 굉음이 일었다.
콰-광--!
두 힘이 부딪친 충격에서 일어난 거대한 소음. 날이 어두워져 잘 준비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소리는 똑똑히 들려왔고.
“끼에엑!”
“꾸에엥!”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몬스터들은 충격파에 휩쓸려 나갔으며, 산천초목이 무참히 파괴되었다.
“큿!”
자신이 머물고 있던 나무가 산산이 조각나는 것을 보며, 렐이 재빨리 충격파가 닿지 않는 곳으로 피신했다.
저릿저릿-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렐은 조금 전 보았던 격돌을 떠올렸다.
‘방금, 그 사람은 누구지?’
격돌 직전, 그녀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양팔을 뻗어 두 남자의 주먹을 움켜쥐는 한 여인을 말이다.
엘프의 뛰어난 시각으로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긴 적발의 소유자임은 알 수 있었다.
‘설마?’
렐의 머릿속에 한 여인이 떠올랐다. 강석찬의 동료 중 한 명이자, 상정 외의 강함을 지닌 악마, 엘리자베스가 말이다.
‘설마, 아저씨를 구하러 와주신 건가?’
렐은 엘리자베스를 볼 수 있을까 싶어 충격파를 뚫으며 전진했다. 그리고, 사라진 연기 속에서.
“어?”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했다.
* * *
“후우…”
석찬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서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이게 내 최선이다.’
이에 맞춰 피어나는 알렉산더의 거대한 기운을 느끼며, 석찬은 그에게 달려갔다. 왼손으로 모든 힘이 담긴 오른 주먹을 받치면서. 그건 반대쪽에서 달려오는 이도 마찬가지였다.
“흐압!”
“크압!”
그렇게 충돌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파앗.
두 사람 사이로 한 여인이 나타났다.
‘이런! 멈춰야…’
놀란 석찬이 주먹을 멈추려고 했지만, 이미 전력을 다한 주먹이 여인의 얼굴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으려는 순간, 석찬의 눈에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도 장미처럼 붉었다.
‘엘리자베스?’
아니다. 엘리자베스와 비슷한 외형이었지만, 그녀가 풍기는 기운은 악마의 기운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기운이었다.
그리고 여인이 살며시 손을 뻗어 석찬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위험!’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 거대한 충격파가 여인을 감쌌다.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알렉산더도 마찬가지였다.
충격파가 잠잠해진 뒤, 세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근육질의 남자 둘의 주먹을 동시에 받아낸 여자. 게다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별다른 상처는 없어 보였다. 팔을 끝까지 덮고 있던 검은 천이 찢어진 것이 전부였다.
“흐음…”
그때 그녀의 입에서 흥겨운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또한 그녀를 바라보는 알렉산더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너… 여긴 어떻게 온 것이냐…”
그 말에, 여인, 미쉘 그레이스가 매혹적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떻게 오긴… 대장이 별 뻘짓을 하고 있길래 구해주러 온 거지.”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석찬과 알렉산더를 동시에 내던졌다.
“크윽.”
“컥.”
방금 일격으로 모든 힘을 소모한 두 남자는 힘없이 쓰러졌고, 미쉘은 그런 두 사람을 흥미롭게 쳐다봤다.
“방금 공격, 대단했어. 1층에서 이 정도 위력을 내다니… 석찬이는 그렇다고 쳐도… 대장은 생각보다… 의외네. 그때 그 공격을 맞고도 이 정도 힘이라니.”
“닥…쳐라. 어떻게 온 것이냐고 물었다.”
미쉘은 알렉산더에게 다가가더니,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옛날에 심어둔 거 잊었어? 갑자기 그게 울려서 얼마나 당황했는데.”
그 말에 알렉산더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흠칫했다.
“설마…”
“이미 늦었어.”
‘늦었다고?’
그리고 그것이, 석찬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