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아침이 밝았다.
강은 푹신한 이불 위에서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죽는 줄 알았지.’
들어보니, 그가 처리했던 사내들은 마을 내에서도 꽤나 애를 먹이던 놈들이라고 했다.
돈을 빌려주고 감당 못할 이자를 요구하는, 악질 사채업자들. 게다가 채무자에게 살인을 요구하고 인신매매를 했었다는 점까지 포착되어, 강이 그들을 죽이거나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갔음에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마을의 골칫거리를 해결해준 대가라며 치안부에서는 환영 겸 조촐한 파티를 열어주었고, 거기에서 먹고 마시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았다.
어찌저찌 취한 렐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것까지는 기억이 났으나, 그 이후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으, 머리야.’
옷에 물들인 진한 알코올 냄새를 맡으며, 강은 마력으로 취기를 싹 날려버렸다.
“슬슬 움직여야지.”
강은 아직 잠들어 있는 렐을 깨운 뒤 간단한 요리를 만들었다.
“우음?”
잠기운에 뭉그적거리기를 10여 분, 집안 가득 흘러넘치는 향기로운 냄새에 그제야 이부자리를 치우고 일어난 렐이 무의식적으로 식탁에 다가섰다.
“아저씨… 밥….”
“그래, 앉아 있어.”
파티 이후, 렐은 강을 보고 아저씨라고 불렀다. 이제 고작 약관의 나이를 넘긴 렐에게 불혹의 나이를 넘긴 강은 아저씨라고 불리기 충분했다.
강은 직접 만든 채소 스튜를 한가득 덜어 렐 앞에 놓아주었다.
“우와, 맛있는 냄새.”
렐은 흘러내리는 군침을 닦으며 수저를 들었다. 스튜를 들이켜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맛있어?”
“네. 엄청 맛있어요.”
“다행이네. 배워두길 잘했어.”
강은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렐의 반대편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달큼하면서도 고소한 스튜의 풍미가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자신이 만든 것임을 감안해도 맛은 꽤 훌륭했다.
“다 먹었으면 슬슬 움직이자.”
“움직여요?”
“같이 오르기로 했잖아, 탑.”
“아.”
그제야 강이 했던 제안을 떠올린 렐이 당황한 듯 말했다.
“그렇지만… 문제가 하나 있어요.”
“문제?”
“저, 시스템의 선택을 받지 못했어요….”
“아.”
강은 떠올렸다. 탑의 바깥에서 소환받은 존재가 아닌, 탑 안에서 태어난 이들은 간헐적으로 시스템의 선택을 받고,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없다.
층을 이동하는 명령어를 사용하지 못하기에 탑을 오르지도 못하고, 마력을 부여받지 못하기에 초월적인 힘을 내지도 못한다.
하지만, 강은 당황하지 않았다.
“상관없어.”
“네?”
“어이, 듣고 있지?”
잠시 후, 방 안에 마법진이 생겨났다. 순백색 마법진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예쁘다….’
그녀를 본 렐이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미의 일족이라고 불리는 엘프조차 감탄하는 미모.
‘천사 같아.’
“…….”
백발의 여인이 말없이 강을 쳐다봤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거죠? 그것도 이렇게 빠르게.”
“아, 안 부르고 싶었는데 도움이 필요해서 말이야.”
강은 렐을 가리키며 물었다.
“전에 네가 나한테 했던 말, 지금 들어줄 수 있어?”
“…….”
여인은 말없이 렐을 흘겨봤다. 그녀의 안광이 밝게 빛났고, 눈을 질끈 감은 사이에 그녀가 렐 앞에 당도했다.
“힉.”
너무 놀라 뒤로 넘어갈 뻔했지만, 다행히 강이 막아줬고, 여인은 그런 그를 놀랍다는 듯이 쳐다보고는 마법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애들을 어떻게 잘도 골라내는군요.”
“내가 또 보는 눈이 있어서.”
“절차라는 게 있어서 말이죠. 조금 시간이 걸릴 겁니다.”
“알았어.”
이내 천사가 사라졌고, 강은 놀라서 힘이 풀린 렐을 부축해 주었다.
“아저씨… 방금 그건….”
“비밀. 뭐 어차피 곧 알게 되겠지만. 일단 진정하고, 슬립.”
강은 가벼운 수면 마법으로 그녀를 재운 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섰다.
‘수염이랑 머리가 꽤 자란 것 같은데….’
강은 꺼끌꺼끌한 턱과 눈을 가리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용실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직원은 잠시 그를 흘겨보긴 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정리하고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최대한 단정하게 해주시죠. 머리는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게.”
“예…예.”
가장 까다로운 주문에 직원이 그의 머리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열심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가위가 머리를 자를수록, 긴 머리칼 속에 감춰져 있던 강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꽤 괜찮은데?’
머리를 깎으면서 든 직원의 생각이었다. 처음의 거지 같던 꼴과는 다르게, 미용을 마친 강의 얼굴은 꽤 봐줄 만했다.
‘근데 누굴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의 매서운 눈빛을 보며,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는 항상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던 남자였다. 상식을 파괴하며 탑을 오르던 그는 70층에서 나고 자란 그녀조차 얼굴과 신상을 알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7년 전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혹시…?’
그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는 분명 동료들과 항상 같이 다닌다고 했어.’
게다가 그의 동료들은 지금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탑을 오르고 있다고 들었다.
‘1년 전에 벌써 80층에 도달했다고 했던가?’
괴물 같은 속도였다.
잡념에 잠긴 사이, 머리는 깔끔하게 잘렸고, 덥수룩했던 수염마저 털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면도가 완료되었다.
“좋네요.”
“그럼 다행이네요.”
강은 머리를 매만지며 미용실을 나섰다.
[이야, 쥑이네.]
그의 귓가로 중년 남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랜만이네요, 라우르.’
[저번 강신 테스트 때 조금 무리했나 보다. 몸은 좀 어때?]
‘저야 최고죠.’
그렇다. 미용실 직원의 생각과는 다르게, 강은 그녀가 생각하는 그 남자가 맞았다.
강석찬.
전례가 없는 재능과 무력을 바탕으로 10년도 안 되는 세월 동안 50층까지 오른 괴물 중의 괴물. 그는 7년 전 자취를 감췄다. 천사장 에피르와의 계약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마을에 오니까 좋네요.”
석찬은 주머니에 든 명패를 흔들며 길거리를 누볐다. 명패는 평소 그가 지니고 다니던 백금색의 명패가 아닌, 금색으로 도금되어 있다. 명패 중앙에는 ‘강’이라는 이름이 크게 박혀 있다.
‘머리도 시원하게 깎았겠다, 슬슬 렐이나 데리러 가야지.’
석찬은 렐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그는 잠든 렐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그녀와 뒤에서 계획을 짰던 사냥꾼 무리. 원래 석찬은 렐을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녀는 자신을 해하려 했고, 그런 그녀에게 신경을 끌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생각을 라우르가 통째로 바꿔주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그냥 돌아서려는 자신을 막아 세우는 라우르의 급한 소리가.
[멈춰, 멈춰!]
‘뭔데요?’
[쟤, 데려가라.]
‘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공격한 자를 동행하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었다. 이내 이어지는 라우르의 말.
[쟤, 잠재력 100이다.]
‘예?’
잠재력.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잠재력은 탑의 시스템이 친절하게 수치화해 준다. 그런데 잠재력이 100이라고? 그럼 말이 달라진다.
잠재력에 의심을 가지고 이에 대해 여러모로 조사를 해본 결과, 석찬은 잠재력에 대해 꽤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잠재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성장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잠재력이 높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 이브나 알렉산더조차 잠재력이 90대였고, 오로지 진현만이 극히 드물다는 잠재력 상승효과를 받고 100의 잠재력을 가지게 되었다.
진현 말고는 100의 잠재력을 지닌 자를 본 적이 없는 만큼, 석찬도 렐에게 호기심이 갔다.
‘진짜 100이에요? 잘못 본 거 아니고?’
[맞는다니까 그러네!]
여기서 잠깐, 라우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잠재력을 알게 되었나. 그것은 바로 건틀릿에 박힌 노란색 보석에서 알 수 있었다.
[투신이 되기 위한 시련]
[투신의 선택을 받아 차기 투신 후보가 된 당신, 모든 시련을 통과하여 진정한 투신이 되자!]
[내용 : 라우르의 영혼 조각 획득(3/6)]
[보상 : 투신의 신위]
어느새 한 개 더 모은 라우르의 영혼 조각. 조각의 출처는 65층의 한적한 동굴 안이었다.
70층까지 클리어되긴 했지만, 라우르의 영혼 조각을 탐색하고자 층별로 돌아다니던 와중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덕분에 스탯도 오르고 라우르의 기억도 조금 더 되찾을 수 있었다. 아쉽게도 대부분 천사장 에피르에게 들은 내용뿐이어서 큰 수확은 없었지만, 그래도 영혼 조각을 모았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게다가 수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잠재력 측정 능력.’
그렇다. 라우르는 인간의 잠재력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평범한 인간뿐 아니라, 이종족도 포함되었다.
그의 말로는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어떤 신이든 언제든지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다고.
[아마 이렇게 작고 여린 놈이 그런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지 몰랐겠지, 케케케! 심 봤다!]
영혼 조각을 모으면 모을수록 어찌 된 게 말투가 경박해지는 라우르지만, 10년 넘게 이를 들어온 석찬은 가볍게 무시하고, 렐을 깨웠다.
“렐, 그만 일어나.”
“응? 제가 언제…”
“피곤해 보이길래 더 재웠어.”
“아, 감사… 근데 오빠는 누구?”
“응?”
오빠라는 단어에 석찬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 오빠야? 나야, 아저씨.”
“에?”
이번에는 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내 상황을 파악한 그녀의 눈매가 동그랗게 떠졌다.
“에… 에에에?”
비명 같은 외침이 집안 가득 울려 퍼졌다.
“아… 아저씨?”
몹시 당황한 렐이 벽에 딱 달라붙어서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래?”
“오… 오지 마요!”
옆에 놓인 국자를 집어 든 그녀가 석찬을 향해 국자를 붕붕 휘둘렀다.
‘으음….’
결국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포기한 석찬이 멀리서 그녀를 지켜봤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렐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뭐야?’
머리와 수염을 깎기 전 모습만 본 렐은 당연히 석찬이 아저씨일 줄 알았다. 실제로 나이도 자신의 두 배가 넘어간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은, 아저씨라고 부르기에는 거리가 꽤 있었다.
긴 머리에 가려졌던 날카로운 눈매, 오뚝한 코 그리고 남자다움이 가득 묻어나오는 표정 등등. 겨우 진정시키려 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진정하게 된 것은 이로부터 30분이 지난 후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