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찰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석찬은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영주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과거 알렉산더의 부하였다라….’
메이드, 집사, 요리사, 한 명 한 명이 과거 최소 70층 이상은 올랐던 탑 최고의 엘리트였다는 사실에 석찬은 적잖게 충격 받았다.
게다가 더 충격적인 것은.
‘그 사람들이 다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고요?’
‘그렇다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알프레드 측의 공작으로 인해 영주성 안의 사람들은 알렉산더와 찰스를 비롯한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과거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은 뒤, 자신이 탑을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1층에서 평생 살아온 사람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기억을 잃지 않은 사람들은 최소 85층을 오른 자들로 기억 조작이 먹히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정신력을 가진 자들뿐이라고 한다.
‘잔인한 새끼들….’
어떻게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알프레드 일행에게 향하는 분노가 더욱 상승했다.
그와의 대화를 되새기며, 석찬이 주먹을 뿌드득 갈았다.
“반드시 죽인다.”
[반드시, 뭐라고?]
“아닙니다. 마저 주무세요.”
자다 깬 라우르의 물음에 대충 대답한 석찬은 침대에 눕는 대신 가부좌를 틀었다.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은 훈련에 매진할 때다.
‘이브도 파랑 등급에 올랐는데 놀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의지에 불타오른 채로, 그렇게 날이 밝았다.
* * *
“후아암!”
잠에서 깬 알렉산더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끄아압!”
숙취는 이미 해결된지라, 찌뿌둥한 몸만 대충 푼 알렉산더가 방을 나섰다. 그러자, 언제나처럼 찰스가 그를 반겼다.
“일어나셨습니까. 주인님.”
“어, 그래.”
그가 건네는 물을 받아 들이켠 알렉산더가 문뜩 찰스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음….”
“왜 그러십니까.”
“자네, 요즘 좋은 일 있나?”
“좋은 일이요?”
“얼굴이 풀어진 거 같아. 좋은 일 있는 사람처럼.”
그 말에 찰스가 작게 미소 지었다.
“살짝 좋은 일이 있었죠.”
“뭔데? 나한테만 살짝 말해봐.”
궁금해서 귀를 가져다대는 알렉산더를 향해 찰스가 작게 읊조렸다.
“아무래도, 아가씨의 반쪽을 찾은 것 같습니다.”
“반쪽? 내 딸의?”
“네, 강석찬 말입니다. 아가씨의 반쪽으로 아주 제격인 것 같던데요?”
그 말에 알렉산더의 이마에서 빠직 소리가 났다.
“찰스. 잠시 그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볼 수 있나?”
“어제 대화를 해봤는데 육체적인 힘뿐만 아니라 사나이답게 포부도 크더군요. 마치 예전의 주인님을 보는 것 같았어요.”
석찬에 대한 칭찬이 이어질수록 알렉산더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저는 대만족입니다. 만약 그와 아가씨가 이어진다면 주인님도 걱정 없….”
콰직.
파쇄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알렉산더는 온데간데없었다. 바닥에 발자국 하나만 찍혀 있을 뿐이었다.
“음… 내가 말실수를 한 것이려나.”
찰스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 * *
그 날 오후.
“…….”
“뭐, 뭘 봐.”
저녁 식사가 한창인 와중, 석찬과 알렉산더는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며 밥을 깨작이고 있었다.
둘은 상태가 엉망이었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진 채, 얼굴은 상처투성이였다.
“진짜 너무하신 거 같아서요.”
“누가 할 소리. 내 딸은 절대 못 넘긴다.”
“그니까 아까부터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요.”
경위는 이러하다. 찰스에게 이야기를 들은 딸 바보 알렉산더는 그대로 눈이 돌아갔다. 그리고 무작정 석찬이 머무는 방으로 가서 주먹부터 휘둘렀다.
석찬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명상을 하고 일어나니 갑자기 알렉산더의 기습이라니. 무방비 상태로 맞았던 옆구리가 아직도 욱신거린다.
그 이후, 알렉산더는 계속해서 ‘내 딸은 절대 못 넘긴다’는 말만 반복하며 석찬을 공격했다.
물론 석찬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최선을 다해 알렉산더를 맞상대했고, 그 결과 늦은 오후까지 공방이 이어지며 저녁 시간에 가까워져서야 극적인 타결을 맺을 수 있었다.
비록 육체적인 싸움이 끝났지만, 아직까지도 말싸움이 계속된다는 점에서 찰스가 굴린 스노우볼의 위력은 엄청났다고 말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한다. 내 딸은….”
“안 넘본다고요, 이 딸 바보야!”
하지만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에 석찬이 결국 고함쳤다.
“딸 바보라. 인정한다. 나 딸 바보 맞다. 그러니 내 딸은 못 넘긴….”
“알았어. 알겠다고요, 그만 말해요.”
빠직.
그때, 젓가락을 두 동강내며 이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자 보자 하니까, 아버지. 그만하시죠?”
아버지.
그 딱딱한 표현에 알렉산더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이브?”
“부끄러우니까 제발 그만하세요, 아버지. 오빠도 그만하고 밥이나 드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브는 새 젓가락을 받아들고 식사를 이어갔다.
“…밥이나 먹자.”
“…예.”
단 한마디로 최고의 전사 두 명의 말다툼을 멈춘 이브를 보며, 영주성의 식객들은 생각했다.
‘역시 대단한 여자야.’
‘엄마, 저 언니 무서워.’
‘우리 여신님, 짱!’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식사는 끝이 났다.
식사가 끝난 후, 이브는 석찬과 단 둘이 대화를 나눴다.
“아니 진짜. 아빠는 항상 저에 관련된 일에만 과민 반응을 한다니까요?”
“다 널 사랑하셔서 그런 거지, 뭐.”
물론 알렉산더의 경우는 중증이긴 하지만,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따로 부른 거 보면, 무슨 일 있어?”
“아, 맞다. 그게 말이죠. 제 힘에 대해 측정해줄 사람이 필요해서요.”
“힘에 대한 측정?”
“네.”
이브가 천천히 고민을 밝혔다.
파랑 등급이 된 직후, 이브는 바로 1층으로 와 이틀 째 지내고 있다.
그 말인즉슨, 새로운 힘을 제대로 알아갈 시간이 없었다는 사실.
“오빠가 아니면 제 힘을 견딜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서요. 혹시 도와주실 수 있어요?”
그녀의 말에 석찬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실험은 어디서 하게? 31층?”
“그래야겠죠.”
하긴, 평소 훈련할 때는 몰라도 새로운 힘을 체크할 때는 페널티 없이 본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곳에서 테스트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래, 그러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석찬과 이브는 31층으로 올라왔다.
31층은 30층과 같이 바다로 이루어진 장소였다.
‘바다라…’
바다에서 우베라는 강적을 만났던지라 석찬은 바다가 그리 반갑지 않았다. 게다가 육지 또한 30층과는 다르게 최소한의 영역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렇다는 건….’
철퍽!
그 순간, 강한 물살과 함께, 거대한 물고기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역시 이런 놈들이냐!”
텅!
물고기의 비늘은 단단했지만, 석찬의 주먹을 완전히 견디지는 못했다.
콰직!
비늘이 박살 나며 몸통이 관통당한 물고기가 그대로 숨을 거뒀다.
[메인 퀘스트 – 31층(플래티넘 전용)]
[피라미아고 처치 10,000(미완료)]
[자이언트 피시 처치 1,000(미완료)]
[시호스 처치 50(미완료)]
[시호스 킹 처치 1(미완료)]
아무래도 방금 전에 본 것이 자이언트 피시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피라미아고 10,000마리 처치? 저건 뭐야?’
초반부터 터무니없는 수치라고 생각할 때쯤, 석찬 앞의 바다가 검게 물들었다.
‘저건….’
“키야아아!”
손가락만 한 이빨을 잔뜩 단 거대 물고기, 피라미아고 무리가 석찬과 이브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브, 피해!”
석찬이 황급히 건틀릿을 매며 주먹을 내질렀다.
쾅!
마력 폭발 기술의 발현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수백 마리의 피라미아고 떼 중 고작 스무 마리 정도가 죽었을 뿐이다. 그야말로 인해전술이라고 할 수 있는 녀석들의 공세에 석찬이 방어 태세를 취한 순간.
“익스플로전.”
피라미아고 떼 사이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건…!’
익스플로전. 강제 돌파 이후로 ‘열화판’으로나마 이브가 사용하던 폭발 마법이다.
비록 열화판에 불과했지만 위력이 쏠쏠해 이브가 애용했던 마법이기도 했다.
그런 마법이 이제는 열화판이 아닌 본판으로 발현되었다.
콰과광!
피라미아고 떼 중간에서 발현된 익스플로전이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피라미아고들을 몰살시켰다.
그 모습을 본 석찬은 물론이고 이브조차도 마법의 위력에 말문이 턱 막혔다.
짧은 침묵 속, 석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브… 이거 굉장한데?”
“그… 그러게요?”
물과 불이라는 상성이 있었음에도 이브의 마법에 물속에 있던 피라미아고까지 전부 타 죽었다.
“와우.”
연신 감탄을 내뱉던 석찬은 무언가를 떠올리며 이브에게 속삭였다.
“이브, 혹시 그 마법 써볼래?”
이어지는 석찬의 주문에 이브가 놀라 반응했다.
“그 마법이요? 확실히 그걸 사용한다면 편하겠지만, 너무 위험해요!”
“다 방법이 있어.”
석찬이 천천히 계획을 알려줬다.
* * *
천계.
“…….”
엄숙한 분위기 속 천사장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평상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녀의 표정 변화에 모든 천사들이 숨을 죽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
어두운 침묵 속, 천사장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
명백한 분노의 증거에 주변에 앉아 있던 천사들이 몸을 떨었다.
“무언가 잘못되었어.”
어인족의 왕 우베. 녀석은 절대 져서는 안 되는 보스 몬스터다.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수십, 아니 수백 명이 달려들어도 상처 하나 못 낼 몬스터였단 말이다.
“헌데 어떻게. 게다가, 파랑 등급이라고?”
천사들도 당연히 마력 운용자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들은 자유로운 마력 운용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전원 이레귤러로 지정되며 착실한 감시가 이루어진다.
헌데 그 중에서도 가장 예의주시하던 알렉산더의 딸이 결국은 파랑 등급이 되어버린 것이다.
“설명해 보실까요, 가엔?”
“…….”
상급 천사 가엔은 말이 없었다.
‘아니, 나는 우베 선에서 끝날 줄 알았지!’
그녀 또한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석찬이 상식을 벗어난 놈이라는 것은 유명한 사실. 하지만, 이번 일은 도를 넘어도 훨씬 넘었다.
‘저게 어떻게 50층도 도달하지 못한 녀석들이냐고!’
게다가 이브라고 했던가? 파랑 등급의 마력 운용자가 되면서 그녀는 이미 50층 이상의 사람들과 동급의 힘을 가진 것이 확실시됐다.
50층 이상의 힘을 가진 사람이 그 밑에서 온전한 힘을 쓸 수 있다? 그것은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콰과광! 콰광!
그때, 수정구 너머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뭐야… 저건.”
석찬과 이브를 감시하는 수정구 속.
푸른 번개가 사정없이 바다를 내리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