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라우르의 두 번째 영혼 조각을 획득하고 하루가 흘렀다.
“포이그 레바돈이 대결을 받아들였습니다.”
아침 식사 중에 먼저 입을 연 엘리자베스.
“그쪽에서도 이 대결을 원하던 모양인 것 같았어요. 덕분에 대화가 조금 쉬웠죠.”
“설마, 벌써 이야기가 끝난 겁니까?”
“네. 대결 시간은 닷새 뒤. 장소는 사냥꾼 길드 20층 지부 야외 대련장에서 진행하기로 했어요. 관중도 있을 겁니다.”
‘아직 하루도 안 됐는데 벌써 여기까지 일을 진행하다니….’
석찬은 놀란 속을 감추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래 봬도 다크니스 길드 지부장이랍니다. 너무 무시하지 말아 주세요.”
엘리자베스는 그런 석찬의 마음을 전부 꿰뚫고 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아 맞다, 그쪽에서 조건을 걸었어요.”
“조건이요? 어떤….”
“포이그 레바돈이 강석찬 씨, 당신하고만 싸우고 싶다고 하더군요.”
“저랑만요? 이브는….”
“2 대 1은 형편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이브 없이라….”
확실히 이브는 강하다. 비록 그 무력이 포이그 레바돈에게 밀리기는 했었으나, 그것은 그가 너무 강했던 탓이다.
본래 그녀의 무력은 극소수의 강자를 제외하고는 상대할 자가 없다.
게다가 이브는 일전의 전투 이후로 더욱 강해진 상태.
‘두 명이서 같이 붙으면 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확실히 그런 이브와 함께 싸운다면 100%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황. 포이그 레바돈도 이미 판이 커져버린 싸움에서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흠….’
생각에 잠긴 석찬.
‘지금 내 전력으로 포이그 레바돈과 혼자 싸운다면….’
초록 등급의 마력 저장소로 돌파하지 않는 이상, 솔직히 완벽한 승리는 장담하기 힘들다.
‘그래도… 라우르의 영혼 조각만 잘 흡수할 수 있다면.’
첫 번째 영혼 조각을 획득한 뒤 건틀릿의 효과가 강화됐었다. 그리고 이는 사냥을 함이나, 전투에 있어서 그 효과가 제법 쏠쏠했다.
‘만약 영혼 조각으로부터 새로운 능력을 얻을 수만 있다면….’
100%는 아니더라도 70~80% 정도 확률로 승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우선….’
석찬은 방에서 자신의 영혼 조각에 대한 기억에 대해 고민 중인 라우르를 떠올렸다.
그는 영혼 조각을 받아 든 이후부터 쭉 아무 말도 없이 생각에 빠져있었다.
‘결투 시간 전에는 기억하시겠지?’
남은 시간은 무려 7일이다.
‘그래도 명색의 신인데.’
하지만, 석찬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루 뒤.
“라우르, 아직 멀었어요?”
[기다려 봐.]
이틀 뒤.
“라우르?”
[기다려 보라니까? 거의 다 기억났어!]
그리고 어느덧, 닷새 뒤.
‘젠장….’
어느덧 포이그 레바돈과의 재대결까지는 이틀밖에 남지 않은 상황.
하지만 라우르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준비는 잘 되어가고 계신 건가요?”
“음…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석찬 씨의 대결에 거는 기대가 정말 커요. 부디 최선을 다해주시길 바랄게요.”
“예….”
부담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석찬의 싸움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수련실 대여, 피로 회복 포션, 전문 힐러 등등, 굉장히 많은 지원을 받는 상황에서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라우르는 아직 먼 거야? 뭐야?’
처음엔 마냥 기다리기만 했지만, 석찬도 이제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라우르가 기한 전에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젠장.’
명상을 하며 마음을 다스려 보려고 했지만, 걱정 때문인지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부스럭.
‘누구지?’
인기척에 옆을 바라보자, 이브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브. 언제 왔어?”
“한 30분 전?”
30분이라니.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래? 왔으면 얘기를 하지, 왜 가만히….”
“한 50번쯤 부른 거 같은데 계속 가만히 있길래 기다리고 있었죠.”
“미, 미안.”
석찬이 고개를 숙이자, 이브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뭐가 미안해요?”
“그냥. 30분이나 너를 밖에 세워둔 게 좀….”
“괜찮아요. 오빠가 이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저번에는 문 두드리는 소리도 못 듣고 2시간 동안 명상한 적도 있으면서….”
“크흠….”
이 모든 것이 어느 하나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다른 것을 신경 쓰지 못하는 성격 탓이다.
“미안.”
“미안해하실 거 없다니까. 엘리자베스 씨가 저녁 먹으러 오래요.”
“벌써 저녁 시간이야?”
그러고 보니 창밖이 어느새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
“점심때는 한 시간 정도 있었는데 아무 말도 못 들으시길래 그냥 갔죠. 그런데 엘리자베스 씨가 저녁까지 굶고 수련하면 안 좋다고 무조건 먹이라네요.”
“그, 그래.”
석찬은 빠르게 수련실을 정리하고 밖을 나섰다.
“걱정되세요?”
“어?”
식사 자리로 가는 길. 갑작스러운 이브의 물음에 석찬이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냉정하게 말해서 나는 아직 약해. 게다가 지면….”
이런저런 혜택을 주던 엘리자베스의 마음이 돌변해 자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브 또한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기에 패배가 두려웠다.
스윽.
그때, 무언가 따스한 것이 허리에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느다란 팔이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팔의 주인은.
“이, 이브?”
갑작스러운 그녀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석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오빠는 강해요. 제가 없어도, 자신을 믿으세요. 그럼 분명 쉽게 이기실 수 있을 거예요.”
이브의 말에 석찬은 가만히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을 믿어라…라.’
탑에 들어오기 전부터 질리도록 많이 들은 말이다. 하지만 무엇 때문일까? 이번에는 그 말이 유독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 오묘한 감정은 무엇일까?’
이브의 얼굴을 보니 끊임없는 신뢰감이 생겨나는 것만 같았지만, 왜 그런 것인지는 모르는 석찬이었다.
스윽.
이브의 팔을 푼 석찬은 그녀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고마워, 이브. 많은 도움이 됐어.”
방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는 석찬.
그의 행동에 이브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이브는 빠른 걸음으로 식사 장소를 향해 달려갔다.
“가, 같이 가. 이브!”
석찬 또한 그녀를 따라 텅 빈 복도를 달렸다.
“후훗, 아직 풋풋한 애들이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엘리자베스. 그녀는 귀여운 두 남녀의 행각에 잠깐 미소를 지은 뒤, 모습을 감추었다.
* * *
이브의 격려가 있은 후, 석찬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엘리자베스 씨.”
“좋은 아침이에요, 석찬 씨.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요.”
“그런가요? 하하.”
그렇기 때문일까? 표정도 눈에 띄게 밝아졌다. 명상 중에도 마력이 흐트러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성취 또한 조금씩 이뤄가고 있었다.
[마력이 1 증가했습니다.]
“마력이 올랐네?”
몇 달이 지나도록 오르지 않던 마력 스탯이 올랐다. 이제 정말 돌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태.
그런 상황에서 희소식이 들려왔다.
[기억났다!!!]
엿새 동안 가만히 앉아 있던 라우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라우르! 뭔가가 떠오른 건가요?”
[그래, 이 몸이 드디어 기억해냈다!]
라우르는 대단한 일을 끝마쳤다는 듯 뿌듯한 표정과 함께 보석을 치켜들었다.
[이 보석의 사용법은 말이다!]
“예.”
[바로~]
“바로….”
드디어, 라우르의 영혼 조각을 흡수할 수 있다는 사실에 석찬의 몸이 살짝 떨렸다. 과연 저 보석의 사용법은 무엇일까? 석찬은 라우르의 다음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보석을 먹는 것이야!]
“예?”
라우르의 말에 석찬의 입에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먹으면 된다니까? 자, 아- 벌려봐.]
“허어….”
예상외로 너무나도 간단한 방법. 이것을 떠올리는 데 무려 엿새를 썼었다는 말인가. 그래도 괜찮다. 기한 내에 사용법을 기억해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 표정이 많이 좋아졌다?]
라우르 또한 달라진 석찬의 모습을 바로 눈치챘다.
“그러게요, 요즘 기분이 좋네요.”
[그래, 그런 기분으로 내 영혼 조각을 모두 모으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포이그 레바돈부터 쓰러트려야겠죠.”
[내 힘만 있다면, 그 정도 녀석 따위야, 한 방에 쓰러트릴 수 있다~ 이 말이야~.]
“그래요?”
[물론이지! 자, 빨리 먹어라.]
“잠시만요.”
영혼 조각을 받기에 앞서, 석찬은 방 안이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커튼을 치고, 방문을 잠갔다.
‘혹시 모르니까.’
조치를 모두 취한 뒤, 라우르에게서 영혼 조각을 받아 든 석찬은, 조심스럽게 투명한 보석을 입에 가져다 댔다.
‘내가 살다 살다 보석을 다 먹는구나.’
딱딱한 촉감과 생김새 때문일까? 입 앞에서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석찬은 보석을 입 안으로 던져 넣었다.
‘음… 오?’
예상외로 보석은 혀에 닿자마자 기체로 증발해 사라져 버렸다.
그때, 라우르가 멋쩍은 듯한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참고해야 할 게, 그… 조금 많이 아플 수도 있어?]
“조금 아프다고요?”
[영혼 조각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나온 반발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편해. 근데 조금 많이 아플 거야.]
‘그게 무슨….’
변화가 시작된 때는, 보석을 먹은 지 몇 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크윽.”
시작은 가벼웠다.
이 정도면 버틸 수 있겠다. 싶을 정도의 가벼운 통증.
하지만, 통증은 점점 그 강도가 올라가더니, 마지막에는 비명이 절로 나올 정도로 그 정도가 세졌다.
“크악….”
그 고통이 무려 레플렉시아를 마셨을 때의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으니 말 다 한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석찬은 침대에 드러누운 채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끄윽….”
손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침대보가 뜯겨 나갔으며,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마력에 서리 거인 세트의 효과가 더해져 침대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버텨라! 네가 버티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야!]
“크윽!”
하지만, 이번에는 전과 달랐다. 레플렉시아를 마셨을 때는 맥없이 정신을 잃었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쉽게 고통에 지배당할 생각은 없었다.
‘버틴다….’
까드득.
그렇게 몇 시간 동안이나 고통에 맞서 싸웠을까.
“헉…헉.”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어느새 사라진 고통과 함께, 어두컴컴한 방 사이로 메시지 창이 하나 떠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