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15층. 어느 한 레드 리자드맨 부락.
한 노인이 부락 입구를 등지고 서있었고, 곧이어 다른 사내가 나타나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장님, 아무래도 그가 당한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노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베테랑 암부라고 해서 붙여놨건만, 올킬러에게는 역부족이었던 건가.”
“그런 듯합니다. 본부에서 투명 망토와 스킬도 지원해 줬다고 하던데… 한심한 녀석이죠.”
사내의 조소에 노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그는 강해. 단지 올킬러가 더 강했을 뿐, 그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도 크다.”
진중한 그의 표정에 사내도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다. 그나저나, 준비는 확실하게 되고 있는 것인가?”
“예.”
사내의 입가에 커다란 미소가 걸렸다.
“미끼로 내버려둔 1개의 부락을 제외한 나머지 부락들의 일반, 보스 몬스터들 전부 이 부락 안에 집어넣어 놨습니다.”
“총 몬스터의 수는?”
“레드 리자드맨만 1,200마리, 전사 150마리, 그리고 샤먼도 5마리 다 꽉꽉 채웠습니다.”
‘1,355마리라….’
아무리 올킬러의 무력이 예상 밖이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이 엄청난 양의 물량을 버틸 수 있을까?
답은 간단했다.
불가능.
이정도로 정신 나간 짓을 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지부장이나 여타 다른 ‘규격 외의 존재’들뿐이었다.
‘올킬러가 아무리 이레귤러라고 해도 고작 1년 차도 안 된 애송이.’
투둑. 툭.
그때, 노인이 서 있던 땅이 얕게 진동했다.
“요즘 들어 지진이 잦군.”
하지만 뭐, 사막에서의 지진이 한 두 번인가?
‘그보다, 나도 빨리 준비를 하러 가봐야겠군.’
노인은 부락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텅 빈 사막에는 다시금 적막만이 맴돌았다.
그 시각, 고블린 궁전의 비밀 공동.
“이럴 수가….”
진실을 알게 된 라이너는 나라를 잃은 듯한 표정으로 바닥을 응시했다.
‘미안한데, 그거 가짜야.’
‘뭐라고?’
‘내가 네 아내를 어떻게 알겠어. 그냥 네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참조해서 복제한 손가락일 뿐이다.’
석찬의 대답 직후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것이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었고, 라이너의 동공이 격분한 듯 흔들렸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암부 주제에 임무와 계획에 관해 전부 실토하다니.
원래 같았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았을 짓이었건만….
‘저런 악마보다 못한 쓰레기 같은 녀석!’
감히 가족을 건드리다니!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한 번 신뢰를 잃은 암부를 위에서 다시 쓸까? 아니다.
신뢰를 잃은 암부는 버린다. 그것이 암부의 룰이었다.
‘릴리아….’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던 그때였다.
“라이너.”
석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냐.”
라이너의 음성은 전보다 세 배는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혹시 내 동료가 되어주지 않겠어?”
“???”
“예?”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석찬의 질문에 라이너와 이브가 동시에 얼어붙은 듯 굳었다.
[흠….]
하지만 라우르만큼은 달랐다.
[확실히 저 녀석이 네 동료가 된다면.]
‘예.’
유일하게 석찬의 의도를 파악한 그는 조용히 씩 웃어 보였다.
“부탁한다.”
비록 가족 앞에서 무너지긴 했지만, 석찬이 보았을 때 라이너는 확실하게 의리가 있는 자였다.
‘재능도 좋고 말이지.’
고작 한 번 격돌해 본 것 뿐이었지만 석찬은 알 수 있었다.
라이너의 실력은 절대 평범한 수준이 아니었다.
‘스킬과 장비를 제외하고도 충분히 최상급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없는 육체 능력과 전투 센스를 지니고 있어.’
만약 지구였다면 가뿐하게 세계 챔피언을 먹을 정도의 재능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게다가 성품까지 완벽해. 이런 자를 여기서 놓치기는 아깝다.’
비록 악연이긴 하지만 노력한다면 관계는 충분히 개선될 여지가 있었다.
“싫다.”
즉답. 하지만 석찬은 포기하지 않았다.
“부탁한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석찬. 하지만 라이너는 여전히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널 따라야 할 이유가 뭐지?”
“…….”
“넌 강하다.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지. 하지만 그게 다다.”
‘확실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너, 아니 당신을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지?”
그 물음에 라이너는 피식 웃었다.
‘고작해야 1년 차 애송이 주제에….’
당돌하기 그지없었다.
‘확실히 무력은 굉장한 녀석이다. 하지만….’
이 탑이라는 곳은 단지 무력 하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지금은 인생이 탄탄대로 같겠지.’
하지만 그것도 얼마가지 않아 무너질 것이다. 바로 과거의 자신처럼 말이다.
‘그래도….’
석찬을 보고 있자면, 과거의 자신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철없던, 하지만 당돌했던 자신이 말이다.
‘어차피 신뢰를 잃은 이상 돌아갈 곳은 없을 터.’
라이너가 입을 열었다.
“좋다.”
“음?”
예상치 못한 대답에 석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 갑자기 오케이 한다고?’
“대신 조건이 있다.”
“뭔데?”
‘이런 사람을 얻을 수 있다면야… 뭐든지 할 수 있다.’
“간단하다. 우선 사냥꾼 길드로부터 내 아내와 딸의 안전을 책임져줄 것.”
“오케이, 그리고?”
“나를 이기긴 했다만… 그 정도로는 아직 부족해. 최소한의 실력을 증명해 보여야겠다.”
“어떤 식으로 증명하면 되지?”
“가령… 사냥꾼 지부 20층 지부장의 목을 가져온다거나, 말이지.”
“…알았다.”
어차피 자신을 해치려 한 20층 지부장은 가만둘 생각이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죽이는 건 꺼려졌겠지만….’
올레드의 일을 겪은 후 석찬은 마음을 다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필요 이상으로 잔혹해질 필요는 없다만, 때로는 냉정해져야 한다.’
1층에서의 참상을 또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 이만 나 좀 풀어주지?”
“알았어.”
라이너를 묶은 포박을 풀어준 석찬은 그의 앞에 소량의 식량을 꺼내주었다.
“부족하면 에브릭이라는 양반을 찾아가서 더 달라고 해. 내가 얘기해둘 테니까.”
“나를 믿는 건가? 내가 널 배신할 수도 있는데?”
라이너의 조소에 석찬이 진지하게 답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만약 당신이 날 배신한다면….”
순간, 석찬의 전신에서 살기를 비롯한 엄청난 양의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가만 안 둬. 그리고… 이번엔 거짓말도 없을 거야.”
흠칫.
그 기세에 라이너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그러지.”
석찬이 적이라고 간주된 자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그였다.
그때, 라우르가 공동을 떠나려는 석찬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대로 내버려 둘 거야?]
‘그럴 리가.’
석찬 또한 아직 완벽하게 라이너를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라우르 님께서 수고 좀 해주시죠.’
일전에 한 실험으로 라우르는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있든 석찬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이점을 그냥 버려둘 수는 없지.’
[…귀찮은데.]
‘부탁드립니다.’
[뭐, 그래. 알았다.]
라이너의 곁에 달라붙는 라우르의 모습을 보며, 석찬은 15층으로 향했다.
* * *
15층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막이었다.
“굳이 빨리 갈 필요 없으니까, 천천히 가자. 천천히.”
약 30분 정도 여유를 가지며 걸으니, 석찬과 이브 앞에 엄청난 크기의 리자드맨 부락이 나타났다.
그 크기는 앞서 보았던 부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여기가….”
‘함정이라고 했던가?’
다시금 마력 감지를 사용하자, 이전보다 더욱 많아진 리자드맨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전사와 보스급 또한 다수로 추정됐다.
‘수는 대략….’
1,400에서 1,500 정도.
하지만.
‘그 정도로는 우릴 막을 수 없지.’
쾅!
“키에엑!”
“키에에엑!”
문을 박차고 들어온 석찬의 주위로 엄청난 양의 레드 리자드맨들이 몰려들었다.
“거참 많이도 몰고 왔네.”
“저거 다 처리할 수 있겠어요?”
일반 몬스터라면 몰라도 전사급과 보스급 몬스터들은 제아무리 석찬이라고 하더라도 원펀치로 끝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원펀킬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1,000마리가 넘어가는 일반 몬스터들이라니.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위기감을 느끼는 이브와는 달리, 석찬은 태평한 표정으로 부락을 응시했다.
‘이거 참, 옛날 생각나는구만.’
때는 바야흐로 1층에 머물러 있던 시절이었다.
고블린 킹을 잡기 위해 궁전으로 향하던 중 마주친 수백 마리의 몬스터 떼.
진현과 함께 학살의 밤을 보냈던 그날을 어찌 잊겠는가.
‘벌써 그게 몇 개월 전이라니.’
비록 지금 옆에 진현은 없지만 대신 이브가 있었고, 육체 능력 또한 비약적으로 상승한 상태였다.
“이 정도야 껌이지!”
쾅!
석찬의 주먹에 레드 리자드맨 하나가 공중을 부양했다.
“키에엑!”
그 모습에 곁에서 그를 경계하고 있던 다른 리자드맨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기 시작했다.
“파이어볼.”
그 순간 거대한 불의 구가 앞을 향해 날아갔고, 열댓 마리가량의 리자드맨 무리가 일격에 전사했다.
“키익?”
동료들이 일격에 쓸려나가자, 리자드맨들은 표적을 바꾸어 이브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딜 가?”
쾅!
광역기가 아닐 뿐이지, 리자드맨들의 입장에서는 석찬의 공격 또한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케륵!”
결국 인해전술이 답이라고 생각했는지, 수백의 리자드맨들이 일제히 석찬과 이브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브, 알아서 잘 막아봐!”
“저 말고 오빠 걱정이나 해요! 어스 월(Earth Wall)!”
시동어와 함께 대지가 흔들리더니, 엄청난 크기의 토벽(土壁)이 나타나 이브를 감쌌다.
“나한테로 와라, 녀석들아!”
석찬의 주먹에 강렬한 푸른 기운이 맴돌았고.
콰광!
그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수십의 라자드맨이 일격에 전사했다.
휘이잉-
그 압도적인 광경에 다른 리자드맨들은 물론이고, 저 멀리서 마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냥꾼 길드의 사람들마저 경악의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 이 무슨….’
올킬러가 강한 것쯤이야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근접 딜러로 분류되는 올킬러에게 이렇게 강력한 광역 마법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괴물 새끼….”
괜히 올킬러를 건드린 것일까? 후회가 드는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 이거 쓸 만한데?”
석찬은 완성된 신기술의 위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이는 라우르가 알렉산더와 겨룰 때 사용했던 기술 중 하나로, 마력을 응축해 주먹 끝에서 터뜨리는 나름 고급 기술이었다.
1층에서 고블린 킹을 상대할 때 사용해보긴 했지만 라우르의 도움을 받아 완성된 기술은 위력이나 효율이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높아졌다.
‘위력이 클수록 마력 소모량이 많은 건 어쩔 수 없다만, 이 정도면 10번 정도 더 사용할 수 있겠군.’
아직 보스 몬스터도 만나지 못했는데 필살기 중 하나를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니들은 이걸로도 충분해.’
자세를 잡은 석찬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다 들어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