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의식의 바다 속에서, 후드의 사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긴….’
자신은 분명 15층에서 올킬러 일행을 미행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에게 걸려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똑.
‘이 소리는…?’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
그 순간.
똑.
차가운 물방울이 닿는 듯한 느낌과 함께 사내는 눈을 떴다.
그의 앞에는 무표정 상태의 석찬이 서 있었다.
“이제 일어났나?”
“여, 여기는?”
사내가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바닥 여기저기가 부서져 있고 한쪽 벽에 금이 심하게 가 있는 어느 한 공동.
[여기도 오랜만이구만.]
‘그쵸.’
올레드 그리젤을 죽인 곳이자, 라우르를 만났던 고블린 궁전의 비밀 공동이었다.
“도망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어차피 네 녀석이 갈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으니까.”
살벌한 석찬의 말투. 하지만 사내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입을 열었다.
“흥, 내가 사라진 걸 알면 본부에서 수사가 들어갈 거다. 그러면 이곳도….”
“저기, 정말 미안한 말인데. 아무리 그쪽에서 네가 사라진 걸 알았어도 여기는 못 찾을 거다.”
“뭐?”
이 공동은 고블린 궁전 1층에 있는 비밀 장소.
고블린 궁전 안에서도 한참을 지나야 좁은 통로가 나오고 그마저도 위장시켜 놓은 상태다.
‘이곳이 발각될 확률은.’
제로.
석찬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싹 불어. 그럼 목숨만은….”
퉤!
순간 석찬의 뺨에 침을 뱉는 사내.
“닥쳐라. 적이랑 협상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
‘난 사냥꾼 길드의 베테랑 암부다.’
사냥꾼과 심부름꾼의 재능을 동시에 가진 암부들은 길드 내에서도 주요 전력으로 취급되고, 엄격한 훈련으로 단련된다.
또한 등급을 떠나서 암부가 정보를 흘리거나 실토하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
석찬은 뺨에 묻은 침을 닦은 뒤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하, 어디 한번 고문해 봐라, 내 입이 열리나 안 열리….”
“누가 너 고문한대?”
딱!
‘어엇.’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사내의 정신이 다시금 끊어졌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순순히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정신 계열 마법 같은 거 아는 거 없어?”
“음, 아뇨. 모르기도 모르는데, 듣기로는 정신 계열 마법은 소모하는 마력량이 어마어마하다고 들었어요. 아마 알았다고 해도 파란 등급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남자의 입을 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석찬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흐음. 그럼 일단….”
가장 쉽게 정신력을 잡아먹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면 역시 그 방법밖에 없다.
[사흘 정도 굶기고 생각하자.]
“그러죠.”
사냥에 차질이 생기긴 할 것 같다만, 어쩔 수 없었다.
‘만약 함정 같은 것이라면 여기서 뿌리를 뽑고 가는 게 더 나아.’
이 녀석도 사흘 정도 못 먹고 못 마시면 어쩔 수 없이 아는 사실을 실토하겠지.
그렇게, 사흘이 흘렀다. 하지만.
“넌, 아무것도….”
“난 아, 직 멀쩡….”
사내는 사흘 동안 단 하나의 정보조차 입 밖에 내뱉지 않았다.
“와, 징한 놈.”
그 정신력은 석찬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슬립.”
“아무….”
힘겹게 말을 잇던 사내는 이브의 슬립 마법에 곧장 정신을 잃었다.
이렇게 간단한 마법에도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 확실히 정신력에 한계가 온 것은 분명할 터.
‘적이지만, 존경스러울 정도군.’
석찬은 고뇌에 빠졌다.
‘이런 방법도 안 통하면 도대체 어떤 방법을 써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게 두뇌를 풀 가동하던 중, 석찬의 눈에 사내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들어왔다.
“저건?”
순간, 석찬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브.”
“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곧이어 석찬이 계획에 대해 설명했고.
“진짜 오빠는… 여러 의미로 굉장하네요.”
그 엄청난 계획에 이브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 * *
“일어나.”
촤악!
허공에서 나타난 물벼락이 사내를 향해 쏟아졌다.
“커헉! 케헥!”
실눈을 뜬 사내가 석찬을 사납게 노려봤다.
“몇 번, 을 말해도 똑같다. 난, 아무 말도….”
탁.
석찬은 말없이 사내의 앞에 작은 상자 하나를 내려놓았다.
“뭐, 뭐냐.”
붉은색 포장지와 리본을 묶어 놓은 것이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를 연상케 하는 모양새였다.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내가 선물을 하나 준비해봤어.”
석찬이 조심스레 상자를 개봉했고.
“!!”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한 사내의 얼굴이 악귀처럼 사납게 일그러졌다.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것은 하나의 손가락이었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한 손가락.
일반적인 손가락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오, 올킬러!!”
바로 손가락 끝에 걸린 하나의 반지였다.
세상에 오직 두 개밖에 존재하지 않는, 비열한 사냥꾼 지부 놈들의 볼모가 되어 10층에서 자신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그녀가 끼고 있는 소중한 반지.
파란 사파이어 반지가 피로 물들어 있는 모습에 사내의 얼굴에 핏줄이 울긋불긋 돋아났다.
“너, 너 이 새끼가!”
당장에라도 포박을 뚫고 나올 듯이 몸부림치는 사내.
하지만 사흘 이상을 굶은 시점에서 그에게 기력이 남아 있을 리가 만무했다.
쾅!
석찬이 세차게 발을 구르자 바닥에 새로운 금이 생성되었다.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알아들었어야지.”
그의 살기에 사내 또한 고함을 멈춘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에 힘 풀고, 우리 대화 좀 해보지.”
“이, 이익….”
“여기서 더 말 안 했다간.”
석찬은 말없이 두 개의 손가락을 접어 보였다.
‘아, 안 돼….’
사내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변해갔다.
임무가 먼저인가, 가족이 먼저인가.
답은 간단했다.
“말…하겠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말해줄 테니 제발, 그녀만큼은….”
순식간에 항복의 뜻을 내비치는 사내.
그 모습에 이브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말 투항하다니.’
솔직히 석찬이 처음 계획을 꺼냈을 때 반신반의했다.
과연 저렇게 정신력이 강한 남자가 가족 때문에 입을 열까?
아니, 그 이전에 이런 뻔한 ‘함정’조차 구별하지 못할까?
함정.
그렇다. 이 모든 것은 석찬의 함정이다.
이브는 몇 시간 전 석찬이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금부터, 우리는 함정을 판다.’
‘함정이요?’
‘그래, 저놈 손가락에 저거 보이지?’
‘저건, 결혼반지?’
‘그래, 우린 저걸 이용할 거야.’
카피(Copy).
말 그대로 어느 한 물건이나 사물을 복제할 수 있는 고급 마법이다.
‘원래는 소모 마력 대비 효율이 떨어져서 쓰지 않는 마법이지만.’
이번 상황에서는 이거만큼 제값을 톡톡히 할 수 있는 마법이 또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낸 똑같은 반지와 손가락 하나.
그것들을 활용하여 사내의 정신을 흔들어놓는 것이 석찬의 계획이었다.
‘그나저나 급조한 거라서 가짜 티가 났을 텐데.’
그렇다. 아무리 계획 자체는 좋았더라도, 시간이나 숙련도상 완성도가 조금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잘못하면 계획이 실패할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사내의 정신력이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도 육체가 굉장히 쇠약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약해진 신체와 더불어 최하가 된 인지력이 이번 계획을 성공시킬 가장 큰 열쇠였고, 다행스럽게도 계획은 별다른 변수 없이 생각한 대로 탁탁 맞아떨어졌다.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먼저 이름.”
“리이너 치프먼.”
“소속이랑 직급은?”
“사냥꾼 길드 20층 지부 소속 베테랑 암부다.”
“암부?”
“…간단히 지부장 제외 최상급 직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 그러면 첫 번째 질문. 언제부터 우릴 따라다녔나?”
“12층에서부터다.”
“12층이라.”
그 말인즉슨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자신들을 따라다녔다는 소리.
“그렇다면 어떻게 나의 마력 감지에 걸리지 않을 수 있던 거지?”
“그것은… 내가 익힌 스킬 덕분이다.”
“스킬?”
“그렇다, 인기척이나 마력을 지워주는, 암부에게 특화된 패시브 스킬이지. 그거랑 길드에서 준 투명 망토를 사용했다.”
라이너의 말에 라우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인기척이랑 마력을 지운다고? 뭐 저딴 개같은 스킬이 다 있어? 그것도 고작 이런 저층에?]
‘그러게요, 신기하네요.’
[신기해할 게 아니야, 인마! 저 정도면 적어도 50층은 가야 나오는 스킬인데.]
‘…….’
하긴, 사람을 없는 것과 다름없게 만드는 사기 스킬을 이런 곳에서 줄 리가 없었다.
“수상한데, 그 스킬이란 것은 어디서 얻은 거지?”
“지부장이 투명 망토와 함께 나에게 준 것밖에 모른다. 출처에 대해선 나도 아는 바가 없다.”
[그럼 그렇지, 저놈이 아는 게 더 이상하면 이상했지, 뭐.]
‘뭐, 그럼 일단 이건 넘기고.’
답이 안 나오는 문제를 가지고 천년만년 고민할 필요는 없었기에, 석찬은 이것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고 다른 문제를 떠올렸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사냥꾼 길드라.”
다시금 나오는 익숙한 이름에 석찬이 이를 갈았다.
‘또, 또 사냥꾼 길드다.’
분명 올리드 그리젤과 관련된 건은 미쉘 그레이스와 합의를 봤었다.
‘내가 또 밉상 짓이라도 했나?’
그렇게 고민하던 와중, 석찬의 머릿속으로 수개월 전에 마찰이 일어났던 한 파티가 떠올랐다.
“설마 도리네 파티 일로 이러는 거냐?”
“도리? 그게 누군진 모르겠고, 나는 20층 지부장의 명령을 받고….”
이후로도 라이너는 차근차근 사냥꾼 지부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얘들이 몇 개월 동안 뺑이 쳐서 리자드맨들을 몰이해서 모아놓는 중이었고.]
“나랑 이브를 유인해서 거기 한가운데에 떨궈놓는다, 이거지?”
“그렇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어쩐지 몬스터들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함정이었나 보다.
‘그나저나, 확실히 리자드맨 여러 마리로 물량 공세를 한다면.’
아무리 동층 대비 엄청난 양의 레벨과 스탯을 쌓은 석찬이더라도.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었겠군.’
그만큼 인해전술은 가장 확실하게 강자를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당장 과거 1층에서만 하더라도 물량 때문에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석찬은 내심 함정에 그대로 들어가는 것이 꺼려졌다.
‘어떻게 해야 잘 대처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려던 찰나였다.
‘잠시만, 몬스터를 모아놨다는 것은….’
“라이너, 혹시 그 녀석들이 보스 몬스터들도 몰아놓는다고 했나?”
그 말에 라이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잘하면 엄청난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석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