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저기, 올킬러 님?”
“왜 그러시죠.”
“사실 저희가 상황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일곱 마리로는 턱없이 부족해요. 열두 마리 정도는 안 될까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아부를 떠는 레일리.
[상황이 안 좋아? 그리고 뭐? 열두 마리? 이게 진짜 똥 싸고 앉아 있네.]
라우르의 표정이 사나워진 것처럼 석찬 또한 표정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선을 넘네?’
만약 레일리가 일곱 마리에서 콜을 불렀으면 석찬 또한 그녀에게 일곱 마리를 줄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열두 마리?
‘이건 아니지.’
욕심이 과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녀 또한 석찬의 표정 변화를 보고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라, 정말입니까?”
“예, 하지만 정말 저희도 상황이 좋지 않아서….”
“거짓말.”
“네?”
[호구 새끼라고 얕잡아 볼 땐 언제고 죄송?]
라우르는 원한다면 상대방의 마음 정도야 언제든지 읽을 수 있다.
그 때문에 그녀가 하는 생각쯤이야, 물 보듯 훤히 알 수 있었다.
“솔직해지시죠. 단지 제가 호구처럼 보여서 더 가지려는 거 아닙니까?”
정곡을 찔렸는지, 그녀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 그게 아니라….”
“그리고 상황이 좋지 않으면 사냥을 더 열심히 하면 되는 거죠. 안 그런가요?”
“그건….”
“적당히 하시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건만, 안 되겠네요.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아무리 좋게 넘어가려고 했어도 정도가 있지, 이건 아니다. 게다가 한 번 이런 식으로 호구라고 소문이 나면 나중에 많이 곤란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저런 여자도 빠르게 손절하는 것이 옳은 길이였다.
매몰차게 고개를 돌리는 석찬을 바라보며 레일리의 동공이 지진이 난듯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어떡하지?’
과한 욕심이 화를 부른다더니,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르는 말 아닌가?
‘이, 이대로 보내면 안 돼! 어떻게든….’
탁.
석찬의 팔을 붙잡은 그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올킬러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빨리 방법을 갈구해야 한다.
‘미인계라도 써야 하나?’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자신은 못생긴 편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아름다운 편에 속했다.
‘좋아, 한번….’
레일리는 최대한 매혹적인 표정과 함께 다시금 석찬에게 요청했다.
“올킬러 님, 일곱 마리, 아니 다섯 마리라도 사체를 양도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이 정도면 그래도….’
아니나 다를까. 석찬이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좋았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는 레일리.
하지만, 현실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달랐다.
[얼탱이가 없네.]
‘그러게요.’
석찬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유는 그녀의 미인계가 먹힌 탓이 아니었다.
그저, 어이가 없었을 뿐.
자신의 옆에는 어지간한 미인조차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의 절세미인인 이브가 있었다.
어중간한 여자의 미인계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레일리의 비장의 한 수는 악수라면 악수라고 할 수 있었다.
“역시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에?”
예상외의 반응에 레일리의 정신이 순간 멍해졌다.
‘어째서, 아.’
그제야 이브의 존재를 기억한 레일리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봤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절망과 두려움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안 돼.’
문득, 그녀의 눈에 석찬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아공간 주머니가 들어왔다.
‘저것만 있다면….’
초조함으로 인해 상황 판단력이 흐려진 그녀의 눈에는 오로지 그가 가진 사체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포그(Fog)!”
펑!
순간, 마력의 파동과 함께 자욱한 안개가 석찬을 덮쳤다.
‘이건?’
팟!
그의 시야가 가려진 사이에 빠른 속도로 주머니를 향해 손을 내뻗는 레일리.
탁!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가렸어도 스탯부터 엄청나게 차이 나는 석찬을 속도로 이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익.”
회심의 일격이 막히자, 레일리의 얼굴이 마치 악귀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올킬러!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우리 지부장이 누군지 알아? 너 따위는 한 방에….”
갑자기 길드 자랑을 하며 화를 내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금 남아 있던 한 톨의 정마저 완전히 떨어진 석찬은 미련 없는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브, 가자.”
“네.”
그녀 또한 레일리의 추파에 질린 듯 몸을 떨며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도리와 다른 파티원들이 둘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 새끼들은 또 왜.]
“뭔 일입니까.”
고개를 벌벌 떨던 도리는 이내 석찬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왜 당신이 죄송하죠? 죄송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도리는 지금도 여전히 홀로 허공에 소리를 지르고 있는 레일리를 힐끗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파티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파티장인 제게 있습니다.”
아예 무릎까지 꿇은 도리가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요즘 저희가 실적이 많이 부진한 터라…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부디 용서를….”
간절하게 호소하는 도리.
그 모습에서는 일말의 사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부터 느끼긴 한 거지만, 저 녀석 하나만큼은 나쁜 놈은 아닌 것 같네.]
‘그쵸.’
확실히 지금까지 도리가 보여준 인상은 좋았으면 좋았지, 나쁘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 다른 사람들은….’
다른 파티원들도 고개는 숙였지만, 도리처럼 진심 어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저놈들도 속에는 사체에 대한 욕망이 가득하군.]
‘레일리란 여자와 같은 생각인 건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래 탑 안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 천지다.]
그래, 저렇게까지 간절하게 비는데, 눈 한 번만 딱 감고 용서해 줘야지.
“좋습니다. 대신 사체는….”
“사체는 괜찮습니다. 그냥 네 마리 다 가지시죠.”
‘오호라.’
아무리 레일리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마음에 들어서 한 마리 정도의 사체는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굳이 괜찮다면야.’
“그럼, 여기서 헤어져야겠군요.”
“예,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렇게 떠나려던 순간.
“어딜 가!”
성난 모습으로 석찬을 향해 돌진하는 레일리.
“뭐 하는 거야, 레일리!”
도리가 급하게 막아섰지만.
“비켜!”
쾅!
“커헉.”
순식간에 발현된 파이어볼을 직격으로 맞은 도리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도리! 저게 진짜….”
가볍게 레일리의 공격을 피한 석찬은 그녀의 뒷목을 내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콰르릉!
“꺄아아악!”
엄청난 크기의 번개가 레일리의 몸에 직격했다.
‘뭐지?’
옆을 바라보자, 성난 표정의 이브가 마력이 넘실거리는 지팡이를 거두었다.
“그레이트 힐.”
상급 치유 마법으로 한 번에 도리를 치료해준 이브는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가요, 오빠.”
“으, 응. 그래.”
역시 이브.
[쟤 원래 저러냐?]
‘이브가… 화나면 조금 무서워요.’
몇 번 얻어맞았던 적이 있는 석찬은 몸을 살짝 떨며 그녀를 따라 길을 나섰다.
* * *
번쩍.
눈을 뜬 도리는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익숙한 여관방의 모습에 머리를 쓸어내린 그는 옆에 앉아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대장, 일어났어?”
“어… 여긴, 어떻게 이곳으로…?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리둥절한 도리의 모습에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동료, 랄프가 입을 열었다.
“대장이 쓰러진 지 오늘로 사흘째야.”
“사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게… 말이지.”
랄프는 차근차근 사흘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결국 레일리가 집행부에 넘겨졌다고?”
“그치.”
집행부라는 말에 도리가 침을 삼켰다.
‘집행부라니.’
집행부.
말 그대로 사람들의 처분을 ‘집행’하기 위한 부서로 사냥꾼 길드 내의 강자 중의 강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부서였다.
또한 집행부는 그 명성에 걸맞게 사냥꾼 길드 내의 모든 세력 중에 무력과 권한이 가장 강한 곳이었다.
이런 집행부에게 끌려갔다는 말은 곧.
‘더 이상 사냥꾼 생활은 무리겠군.’
도리는 레일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비록 불미스러운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자신과 수년 동안 함께 합을 맞춰온 파티원이었다.
조금은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번 일 때문에 나쁜 마음을 가질 일 따위는 없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잘못된 것은 순전히 자신들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
누구를 탓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 정도 마찰로 집행부라니.”
그의 탄식에 랄프 또한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보통이었으면 징계였을 텐데 말이지. 이번엔 보고하자마자 바로 잡혀가더라.”
랄프는 보고가 있었던 날을 회상했다.
* * *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전 베테랑 사냥꾼이자, 올레드를 대신해 새롭게 사냥꾼 길드 10층 지부장에 오른 유레이 미르는 새까맣게 타버린 레일리를 보고 노한 목소리로 이번 일에 관해 추궁했다.
‘11층에서 마찰이 있었습니다.’
‘마찰? 사체 때문이냐?’
‘예.’
‘제대로 상황을 설명해라.’
‘X됐다.’
시체를 빼앗으려다 이 사달이 났다고 설명하면 자신들은 어떻게 될까? 추방? 아니, 추방 정도면 다행이지.
잘못하면 사냥꾼 자격을 정지당하고 영원히 탑을 오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때, 랄프는 생각했다.
대장도, 올킬러도 없겠다. 자신들끼리 입만 잘 맞춘다면.
‘상대측에서 저희가 잡은 리자드맨 시체를 강탈하려 했습니다. 사냥으로 힘이 빠져 있던 저희는 맥없이 그만.’
다른 파티원들도 눈치가 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짝 앞을 보니, 성난 표정의 유레이 미르가 보였다.
‘좋았어.’
랄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가 화났으니, 아마 올킬러를 사냥하기 위한 사냥 조를 편성할 것이었다.
‘그래서 건드린 사람이 누군데? 내가 그냥….’
‘올킬러입니다.’
‘올킬러?’
‘예.’
하지만 이게 웬걸? 유레이 미르의 안색이 새파래지기 시작했다.
‘이, 이 새끼들이 누구 엿 먹이려고 작정했나!’
‘ㅇ… 예?’
이후, 유레이 미르는 레일리를 치료 후, 집행부로 넘기라고 명령했다.
‘그 양반이 그렇게 당황할 정도라니.’
랄프는 고개를 내저으며 도리를 바라봤다.
“그래서, 대장.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그러게나 말이다.”
주력 딜러였던 레일리가 빠진 이상, 사냥을 하려면 반드시 또 다른 파티원을 찾아야 할 터.
‘근데 이런 문제 있는 팀에 들어올 사냥꾼이 있을까?’
“하아.”
마음이 착잡해지는 날이었다.
그 시각, 10층.
“젠장! 올킬러!”
유레이 미르는 지부장실에 놓인 물건을 마구 집어 던지며 화를 풀고 있었다.
그는 레일리를 집행부에 보낸 것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올킬러가 대체 어떤 놈이길래.”
아무리 약하다고는 해도 레일리와 도리 또한 사냥꾼 길드의 길드원 중 하나였고, 그를 건드린 녀석은 본때를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를 막아선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올킬러의 존재였다.
‘올킬러와 마찰은 절대로 빚지 말도록. 만약 그러는 자가 있다면 바로 집행부로 보낼 것.’
무려 90층 본부에서 내려온 특별 지령이었다.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감히 자신의 사람을 건드린 올킬러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지.”
생각해보니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부탁한다면.’
방법을 생각해낸 유레이 미르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