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손님?”
알렉산더의 물음에 찰스가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예, 빨리 나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였다.
“아니요, 그럴 것 없어요.”
“힉.”
찰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한 여인이 의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누구지?’
이브와 필적한 수준의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적발의 여인.
그녀는 한 손에는 자신의 머리처럼 붉은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들은 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그 웃음이 마냥 선의로부터 나오는 웃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라우르의 다급한 음성이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조심해! 저 여자, 강해.]
알렉산더에게도 강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라우르였다.
‘강하다고요? 얼마나요?’
[너나 네 옆에 있는 놈이나 저 여자가 제대로 힘을 드러낸다면 아마 몇 분, 아니 몇 초 만에 죽을 거다.]
‘뭐라고요?’
충격적인 라우르의 말.
게다가 알렉산더 또한 몇 초 만에 죽일 수 있다고?
석찬은 고개를 돌려 알렉산더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알렉산더?”
그녀를 보는 알렉산더의 눈빛 또한 라우르가 접신한 자신과 싸울 때보다 더 사납게 변해있었다.
‘뭐지? 아는 사람인 건가?’
그때, 여인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대장.”
대장이라는 말에 석찬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대장?”
“뭐가 대장이라는 거냐, 미쉘.”
“미쉘?”
석찬의 물음에 알렉산더가 살기가 깃든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 저 녀석의 이름은 미쉘 그레이스. 과거 탑을 오르던 시절 내 동료였던 녀석이다. 지금은… 쓰레기지.”
그의 말에 미쉘 그레이스가 눈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어머, 쓰레기라니. 못 본 사이에 말이 너무 험해지셨네.”
“내가 안 험해지게 생겼냐?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 것처럼 몸을 들썩이는 알렉산더.
하지만 미쉘은 시종일관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왜? 나 때리게? 때리려면 때려봐.”
콰앙!
그 순간, 그녀로부터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마력이 퍼져 나왔다.
“커헉!”
그 엄청난 충격에 찰스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석찬과 알렉산더 또한 몸을 잔뜩 웅크렸다.
미쉘은 아무렇지도 않게 알렉산더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입가에 주르륵 흐르는 핏물을 본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열었다.
“어머, 고작 이 정도에? 아무리 마력 저장소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너무 실망인데… 아니, 부상 때문인가?”
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는 석찬을 바라보았다.
“강석찬이라고 했던가? 요즘 아주 뜨겁던데, 이 녀석이랑 싸운 거야?”
“뭐, 그렇지.”
미쉘은 놀랍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석찬을 보았다.
“알렉산더를 이 정도로 몰아붙일 줄이야. 대단한데?”
‘젠장.’
그녀도 마력 운용자인 건지, 블루 하이오크의 포션을 마셨던 레이놀드나 올레드에게서조차 느껴본 적이 없는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무슨 힘이… 쿨럭!’
석찬의 입안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오며 눈의 초점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알렉산더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힘 좀 풀지? 애 죽겠다.”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잠깐만 간만 본다는 게.”
팟.
“커헉!”
숨을 조이던 마력장이 풀리자 석찬이 연신 마른기침을 해댔다.
알렉산더 또한 입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가 뭐냐.”
“아, 그거? 당신 찾아온 거 아닌데?”
“뭐? 내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를… 설마.”
알렉산더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는 석찬을 바라보았다.
“맞아.”
“네가 저 녀석을 왜…?”
“우리 쪽 애 하나가 저 애한테 큰 실수를 저질렀지 뭐야?”
그 말을 들은 석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큰 실수?”
“올레드 그리젤이라고 하면 알아들으려나?”
올레드 그리젤.
자신과 지인을 해하려 했던 이름이 튀어나오자 석찬의 몸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당신, 설마 사냥꾼 길드?”
“맞아. 정식으로 소개할게. 사냥꾼 길드 80층 지부의 지부장 미쉘 그레이스다.”
“80층 지부장….”
10층 지부장인 올레드 그리젤만 해도 막강한 힘을 과시했었다.
게다가 그녀는 과거 알렉산더의 동료였던 자.
그렇다는 것은 그녀 또한 마력 운용자라는 것.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수행을 해야 저 정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거지?’
“어쨌든, 우리 쪽 애가 했던 행위에 대해서는 고개 숙여 사과하도록 하지. 그건 정말 미안했어.”
석찬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미쉘.
“그리고 이건, 그에 대한 보상.”
딱!
그녀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웬 물약 하나가 허공에 나타났다.
“자, 받아.”
그녀가 건넨 물약을 받은 석찬은 시스템 창을 띄워보았고, 곧이어 경악의 탄성을 내뱉었다.
[초월급 강화 물약]
[등급 : 레전더리]
[효과 : 모든 스테이터스 20 상승(이 효과는 다른 어떠한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와우.”
그 정체는 모든 스테이터스를 무려 20씩이나 키워주는 엄청난 물약이었다.
‘게다가 다른 어떠한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니.’
그렇다는 말인즉슨, 이전에 1층에서처럼 획득 스탯이 감소하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는 얘기였다.
꿀꺽.
그대로 물약을 들이켠 석찬.
[초월급 강화 물약을 섭취하셨습니다.]
[모든 스탯이 20 상승합니다.]
‘좋았어.’
강해진 힘을 느끼며 석찬이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미쉘이 입을 열었다.
“그거 주는 게 우리 입장에서는 엄청 손해거든? 그 정도로 눈감아 줬으면 좋겠어.”
‘뭐 이 정도면.’
조금 위험한 상황이 오기도 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좋은 보상까지.
“좋습니다. 이 정도로 넘어가죠.”
그 말에 미쉘이 활짝 웃었다.
“고마워.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바람인데….”
“뭐죠?”
“혹시 사냥꾼 길드로 들어올 생각 없어?”
“예?”
사냥꾼의 자격을 부여받는다고 해서 모두가 사냥꾼 길드에 소속되는 것은 아니다.
탑에서의 사냥꾼은 총 두 종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석찬처럼 직급만 가지고 자유롭게 사냥을 하고 몬스터 사체를 판매하는 자들.
그리고 두 번째가 일정한 액수의 봉급을 받고 사냥꾼 길드의 소속하에 사냥을 하는 자들이었다.
비록 그들은 잡은 몬스터 사체를 전부 담당 지부에 넘겨야 하긴 했지만,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온다는 측면에서 적지 않은 사냥꾼들이 사냥꾼 지부에 들어가곤 했다.
“만약 네가 사냥꾼 길드로 들어온다면 매월 200골드, 각 층에 맞는 아이템 지급, 그리고 지부마다 말해 베테랑 사냥꾼 명패를 지급하도록 명해놓지. 어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매월 200골드에 아이템. 게다가 베테랑 사냥꾼 직급까지.
확실히 괜찮은 조건이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석찬은 거절을 택했다.
그 말에 미쉘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이유를 들어봐도 될까?”
“저는 딱히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지 않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다. 그리고 베테랑 사냥꾼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딸 수 있기에 그리 매력적이지가 않았다.
또한 사냥꾼 길드에 소속된다면 모든 행동을 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할 터였다.
‘아이템을 준다는 건 조금 아깝긴 하다만, 서리 거인 갑옷 세트라면….’
이 정도 스펙의 아이템이라면 꽤 오랫동안 쓸 수 있을 테고, 돈을 모아 다음 상점에서 아이템을 사거나 얻으면 될 것이었다.
무기 또한 이 건틀릿 하나면 충분했다.
“그리고 당신은 알렉산더를 해하려 했던 자 아닙니까? 그런 당신의 밑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흐음….”
그의 완고한 대답에 미쉘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래, 뭐. 싫다는데 어쩔 수 없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의무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밖을 나서려다 손잡이만 잡은 채 잠시 멈칫하는 미쉘.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 너 정도의 실력자를 알프레드가 본다면 아마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도 있거든.”
“됐습니다.”
“그래도 일단 보험으로….”
그녀의 손에서 종이 한 장이 생겨났다.
“받아.”
“이게 뭐죠?”
“생각 있으면 그거 찢어. 그럼 내가 바로 계약서 들고 달려갈게.”
저렇게까지 간곡하게 부탁을 하니 석찬도 별수가 없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종이를 아공간 주머니에 잘 넣어둔 석찬.
“고마워, 그럼 나중에 한 번 더 보길 기대할게.”
그렇게 그녀가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을 때였다.
“아버지, 석찬 오빠, 지금은 조금 괜찮….”
쿵.
“아야!”
의무실 안으로 들어오려던 이브와 부딪힌 미쉘.
“아버지?”
그녀는 이브와 알렉산더를 번갈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런 거야, 대장?”
“…그냥 가라.”
무서운 표정으로 미쉘을 노려보는 알렉산더.
“그렇게 보지 마. 나도 자식까지 건드릴 정도로 염치없진 않아.”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브를 한 번 훑어보더니 의무실을 나섰다.
“꽤 어려 보이는데 초록색이라… 피는 못 속이는 건가? 어쨌든, 잘 살아 대장! 석찬이는 나중에 꼭 다시 생각해 보고!”
말을 마친 그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긴장이 풀린 석찬의 몸이 스르르 무너졌다.
“헉, 헉.”
아무리 친근하게 대해왔어도, 압도적인 강자에게서 나오는 위압감이라는 게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심력 소모가 어마어마했다.
[그래도 나쁘진 않은 놈이네. 이대로 끝난 걸 다행히 여겨라.]
‘그러게요.’
그때, 숨을 고르는 석찬에게 이브가 다가왔다.
“오빠, 저 사람 누구예요?”
“…….”
그녀의 물음에 석찬은 말없이 알렉산더를 쳐다봤다.
“후.”
그는 말없이 씁쓸한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 * *
커다란 폭풍이 영주성을 휩쓴 지 어느덧 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지속된 이브의 치유 마법 덕분인지 석찬의 몸도 어느 정도 나아져 일상적인 생활에 지장이 없는 정도까지 회복할 수 있었다.
“아마 두세 번 정도 더 치료하면 다 나을 거예요.”
“그래?”
또 한 번의 치료를 끝마친 석찬이 팔을 빙빙 돌려보았다.
‘이 정도면 가벼운 전투까진 가능하겠어.’
“알렉산더 씨는 어떠셔?”
석찬은 조심스럽게 알렉산더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버지요? 음,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날 이후로….”
이브의 말로는 미쉘이 다녀간 이후, 알렉산더는 치료나 식사도 마다하고 방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근 채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뭘 하시는 거지?’
궁금하긴 했지만,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물어보는 건 너무 민폐 같아 질문은 거기서 멈춘 석찬이었다.
‘그 사람이 다녀간 이후에 생각할 게 많으신가 보군.’
“야!”
그때, 진현이 환한 눈동자와 함께 의무실로 들어왔다.
“석찬아!”
“왜, 인마.”
“나, 주황 등급 됐다!”
그의 외침에 석찬 또한 놀란 듯 되물었다.
“정말?”
“그래!”
처음 알렉산더가 한 말에 의하면, 진현이 빨강 등급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 1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어떠한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진현은 빨강도 아니고 무려 주황 등급을 달성했다.
“괴물들….”
이브의 나지막한 한숨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그 시각.
알렉산더의 방.
‘생각을 비울 땐 잠이 최고지 암.’
귀여운 사자가 그려진 잠옷을 입은 알렉산더가 침대 위에서 잠과의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