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05화
70. 철의 나라 (3)
“농기구의 품질이 무구에 비해서는 떨어지기는 하오나, 민간에서 쓰는 농기구와 크게 다른 점은 없사옵니다.”
이산해가 답했다.
“원래 이렇다는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심각한 수준이 아닌가.”
“생철로 만들기 때문이옵니다.”
조선의 철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무쇠라 불리는 생철(生鐵)이며, 다른 하나는 시우쇠라고도 하는 정철(正鐵)이다.
생철은 녹는 점이 낮아 쉽게 가공할 수 있어 수요가 많은 농기구를 만드는 데 쓰였다.
정철은 무른 특징으로 두드려 형상을 만드는 단조에 유리해, 무기를 만드는 데 쓰였다.
“농기구와 무기가 다른 철을 쓴다는 것쯤은 안다. 내가 지적하는 것은 형상과 색상이 고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산해는 당당하게 답했다.
“주조의 한계이옵니다.”
단조는 형상을 잡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망치질하면서 불순물을 떨쳐내지만, 주조는 녹인 쇳물을 틀에 부어 굳히는 방식이다.
제련 과정에서부터 불순물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똥철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이 시대의 제련 수준이 이 정도라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 농기구 머리는 어떤 방식으로 제조하고 있나?”
“양사 속아문에 소속된 공장(工匠, 장인)들에게 철을 보내 농기구 머리의 형태로 가공하도록 명하였사옵니다.”
“공장들은 어디서 일하나?”
“각사의 사정에 따라 다르옵니다만, 일부는 속아문 소속의 철장에서 생산하며 일부는 공장이 소유한 철철장에서 생산되고 있사옵니다.”
중구난방이었다.
말이야 소속 공장이지, 정해진 작업 장소도 없이 자기 꼴리는 대로 알아서 수량만 맞춰서 내는 수준이었다.
장인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일하니 농기구 머리들에게 통일성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물론 농기구의 기능에 중요한 건 형상이지 정확한 치수가 아니다.
하지만 만일 정확한 치수가 중요한 상황이 닥친다면?
‘내가 함경도에서 일할 때도 조총도 탄환도 아주 각양각색이었지.’
기존의 냉병기란 형상만 맞춰지면 어련히 기능하는 놈들이었다.
열병기는 다르다.
세상은 빠르게 바뀌는 중이지만 조정의 사고는 여전히 냉병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덕분에 나는 조총수들을 앞에 탄환을 부어놓고 총구에 맞는 탄환을 정해진 수량대로 가져가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골 깨는 짓거리를 하면서 조정의 무능을 두고두고 욕했는데 그동안 잘도 잊고 있었다.
‘…….’
흑역사를 떠올린 나는, 걷어찰 이불이 없는 것을 한으로 여기며 입을 열었다.
“개선이 필요하겠다.”
개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자 이산해는 새파랗게 질리더니 금세 비굴해져서 간청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 양사와 의정부에서는 이미 철 수급의 방도로 바쁘옵나이다!”
“억울하면 진즉에 개선해 놓지 않은 선인들의 무덤을 걷어차는 수밖에.”
“저,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만들어 놓은 것도 다 마음에 안 들어! 비축해 두고 있다가 상황이 ‘개선’되면 전량 녹이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라!”
“전하!”
농기구의 한심한 수준을 캐물으니 생철이라 그렇다, 주조라서 그렇다 당당하게 답하던 이산해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자비를 청했다.
하지만 나는 자비로운 왕은 아니다.
죄인에게는 무자비했으며 관리에게는 더욱 무자비하다.
녹봉을 제대로 챙겨주는 이유는 나랏일을 제대로 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보기에 이산해는 나랏일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았다.
“시끄럽다! 내가 훈시 명목으로 격일마다 호조를 방문하여 닦달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서둘러 방도를 내놓도록!”
“전하아아!”
* * *
현기증을 느낀 이산해는 머리를 쓸어내리고는 뜰로 나섰다.
청아한 밤하늘에 달과 은하수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좋은 풍광이었으나 이산해는 좀처럼 안심할 수 없었다.
금상이 폐주를 죽이고 조정을 장악했을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금상이 오랫동안 외직을 전전한 관계로 접촉이 부쩍 줄어들었지만, 그와 금상의 친분은 세간에 잘 알려져 있었다.
만일 상황이 잘 못 돌아간다면 애먼 자신의 목까지 떨어질 판국.
하지만 금상은 능숙하게 대신들을 휘어잡고 그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까지 올랐다. 이산해가 호조판서에 임명된 것도 그때쯤의 일이었다.
“이제야 진짜 관직을 지내나 싶었건만.”
폐주의 치세에서는 고속으로 영전하였으나 재상의 위치에는 오르지 못했던 이산해는, 동인을 결성하여 요직을 차지한 서인과 맞설 정도로 출세욕이 강한 자였다.
그래서 호조판서의 자리에 처음 앉았을 때는 안심했고 황송했으며 망극했다.
금상과의 친분도 있겠다, 자신의 능력을 백방 발휘하여 이이가 차지한 의정대신의 자리도 자신이 꿰어 찰 거라 확신했다.
“내가 미쳤지.”
금상은 즉위와 함께 개혁을 추진했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하나의 개혁도 호조와 관련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이산해는 호조판서인 덕으로 누구보다 바빠야 했다.
판서가 실무직은 아니니 조금은 여유를 부리며 아랫놈들만 닦달해도 그만이 아니냐, 주변 사람들은 속 편한 소리만 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금상이 판을 엎어버리면서 동, 서인의 구분은 없어졌으나 과거 동인의 영수로 활동하면서 만든 적이 많았다.
일의 진전이 늦을 때마다 귀신 같이 탄핵을 당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리라.
터무니없는 조작을 기반으로 중상모략이 적절하게 가미된 탄핵소가 발할 때마다 왕은 자신을 감싸주기는커녕 ‘호조판서가 맡은 바를 충실히 이행해야 세간의 오해를 풀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등만 걷어차 댔다.
이제 이산해는 의정대신의 자리 따위는 욕심 내지 않는다.
“사직할까.”
현자타임이 온 이산해가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호판의 사직은 받지 않겠다.”
“저, 전하…….”
“누구보다 바쁠 위치에서 사직이라니? 경은 책임의식이 없는 건가, 아니면 내가 일을 많이 시킨다고 투정이라도 부리는 건가.”
“아니옵니다.”
이산해는 처량한 투로 답했다.
“이봐, 영의정.”
돌아가는 시선에 홍섬이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부르셨사옵니까.”
“경은 나랏일이 우습나?”
“그럴 리 있겠사옵니까.”
“좌상!”
나의 부름에 노수신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예…….”
“경은 나랏일이 우습나?”
“그렇지 않사옵니다.”
나는 다시 이산해를 내려 보았다.
“연배가 지긋한 의정대신들도 나라의 대사가 막중하게 돌아감을 알고서 감히 사직하지 않고 있는데, 새파란 놈이 왕을 능멸해?!”
“아, 아니옵니다! 신이 어찌 전하께 무례를 끼칠 생각으로 사직소를 올렸겠사옵니까!”
“그럼 진정으로 자신에게 자질이 없어서 판서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경은 말장난으로 나를 우롱하고 있군!”
-쾅!
용상의 팔걸이가 울었다.
이산해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경의 자질이 어떠한지는 경이 아니라 내가 판단해! 스스로에 대해서 건방지게 왈가왈부하지 마라! 나의 인사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면!”
“예, 예!”
이산해는 본전도 못 찾고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왕은 갑자기 태도를 달리하고 대소한다.
“하하하!”
화내다가 이제는 웃는다. 왕이 드디어 미친 건가?
금상은 예전부터 정상이 아니었지만 왕위에 오르고는 더더욱 정상이 아니었다!
“…….”
신하들이 당혹감을 느낄 동안 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일렀다.
“호판이 노고가 길어져서 많이 피로해진 모양이다. 일처리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부담 가지지 말라. 나라를 경영하는 일은 시대의 제일가는 인재에게도 쉽지 않은 법이다.”
마치 조부모가 손주를 타이르는 듯한 자애롭기 그지없었다. 직전만 하더라도 왕의 진노를 받아내고 있었던 이산해는 당혹스러웠다.
“마, 망극하옵니다.”
“경의 성실함과 자질을 대체할 사람은 없으니 사직은 반려하겠다. 대신 보름의 휴가를 줄 터이니 당분간 입궐도, 등청도 하지 않고 마음껏 쉬도록 하라.”
왕의 배려에 얼어붙었던 어전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렸다.
이산해도 정신을 차렸는지 황송하다는 듯 답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제신들은 들으라. 내가 호판을 배려하기 위해 각별히 보름의 휴가를 주어 심신을 위로하게 하였으니, 만일 기간 동안 공무로 귀찮게 하거나 탄핵 등으로 부담을 주지 말라.”
“받들겠나이다.”
제신들이 합창했다.
조일 땐 조이더라도 풀 때는 풀어줘야 했다. 사람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미치는 법이다.
호조는 한동안 바빴고 장관인 이산해는 유난히 바빴다. 정적들이 쉬지도 못하게 갈궈댔을 뿐만 아니라 나 역시 편승하여 거들었으니까.
덕분에 고생이 많았으니 조금은 쉬어도 되겠지.
“저, 전하.”
이산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하라.”
“호조에 급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보름의 휴가는 너무 긴 듯하옵니다.”
“내가 하결할 터이니 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 전하! 망극하옵나이다!”
* * *
정확히 보름 뒤.
이산해는 제신들과 함께 어전에 입시했다. 휴식이 길어서인지 쑥 들어간 볼살도 다시 나왔고 얼굴도 밝아졌다.
“그동안 잘 쉬셨나?”
맞은편의 이조판서 박순이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덕분입니다.”
“쉴 때는 쉬어줘야지.”
폐주의 목이 달아날 즈음, 서인의 영수로 오랫동안 일해왔던 박순은 한직을 지내며 심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이산해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너무 오래 쉬다보면 도리어 심심해지더군.”
“그렇더군요. 성상께서 임의로 내려주신 휴가가 길어, 염치 상 언제 다시 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서안을 찾았습니다.”
“보아하니 해답을 찾은 모양이군.”
“예.”
이산해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답했다.
쫓기며 살 때는 되는 게 하나도 없었는데 집에서 태평하게 뒹굴거리다 보니 좋은 생각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쉬는 것도 지겨워져서가 아니라 문득 든 좋은 생각을 잊지 않고 기록하고자 서안에 앉았다는 편이 옳으리라.
왕이 지시한 대로 보름 내내 놀지만은 못했지만 이산해의 마음은 홀가분했다.
비호를 동반한 휴가도 끝났겠다, 정적들이 이때다 하고 대신이 염치도 없이 왕이 시키는 대로 놀기만 했다며 지랄하겠지.
이산해는 그들 앞에서 큰소리칠 자신이 있었다.
“주상 전하 입시오!”
내시가 왕의 등장을 알렸다.
이산해는 잔뜩 기대하고서 왕을 기다렸다. 곧 금상이 용포를 휘날리며 정전에 입장했다.
제신들이 에법을 시행하자 왕은 손을 가볍게 들며 받아주었다.
“간밤은 무탈하였는가.”
“덕분에 무탈하였사옵니다.”
영의정 홍섬이 신하들을 대표하여 답하자, 왕의 시선이 이산해에게로 향했다.
“경은 충분히 쉬었나?”
“예.”
“개운한 얼굴을 보니 곱게 쉬지만은 않았군.”
“송구하옵나이다.”
물론 진심으로 송구한 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쉬면서도 일을 한 기특함을 알아달라는 듯 당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좋아. 호판이 다시 자신 있는 모습을 보니 좋군. 보고하라. 얼마나 대단한 방도를 구상했는지 나도 궁금하다.”
“예. 바로 아뢰겠나이다!”
이산해는 당찬 대답과 함께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