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왜 이순신이죠-204화 (204/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04화

70. 철의 나라 (2)

경회루.

“전하.”

좌우에 자리한 신하들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각자의 앞에 차려진 술상은 검소를 미덕으로 삼은 조선과는 어울리지 않게 산해진미와 진귀한 음식이 가득했다.

평소 원칙주의자로 소문난 자들도 함께 했지만 화려한 주안상으로 불평하는 자는 없었다.

이런 자리가 아니면 언제 이런 상을 받아보겠는가. 흠흠, 하고 헛기침만 조금 나오다 말 뿐이었다.

그 가운데 내가 자리했다.

“경들이 평소 노고가 많아 특별히 자리를 마련하였으니 마음껏 먹고 마시게.”

나의 축사는 조촐했다.

좋은 술상을 앞에 두고 높은 사람이 잔말이 많으면 안 된다.

각자의 잔을 들고 쭈욱 건배하니 제신들은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시선을 모아 술자리를 즐겼다.

상석의 바로 좌우에 자리한 삼의정들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오전에 말씀하셨던 손님들은 어떻게 되었사옵니까?”

홍섬이 물었다.

“준비가 늦는군.”

“음.”

홍섬은 쓰게 웃었다.

이 나라의 왕이 부른다는데 감히 늦게 도착한단 말인가.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그에게, 왕을 무시한다는 건 왕 바로 밑에서 일하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과 같았다.

“어떤 자인지 궁금합니다.”

“곧 알게 될 걸세. 어쩌면 놀랄지도 모르겠군.”

“고대하겠나이다.”

삼의정은 술자리도 마음 편히 즐기지 못하고 나라의 중요 의제를 나누었다.

피곤하게 사는구나, 싶었지만 고위 공무원이 놀기보다는 일을 하겠다는데 어떻게 방해할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세 사람과 논의를 나누었다. 아래쪽에서 먹고 마시며 떠드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그러던 중.

“김자강과 율보리 입시요!”

계단 아래의 내시가 외쳤다.

그래.

내가 말한 손님이란 김자강과 율보리였다.

두 사람은 거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조선의 관복을 입은 채였다. 내가 시켰다. 상하와 소속의 구분을 확실하게 해주고자.

김자강과 율보리가 경회루로 올라서자 제신들의 눈이 커졌다.

“여진족이 아닌가?”

“저쪽은 폐주 때 입시하였던 자 같은데…….”

“조선의 관복을 입었군.”

“오랑캐가 감히.”

조선말을 어느 정도 익힌 김자강과 율보리에게는 불쾌한 말도 간혹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나의 앞에 이르러 각자가 품고 온 함을 바쳤다.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전하께서 폐주를 몰아내고 즉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지.

자신이 줄을 대고 있던 타국의 관리가 대뜸 왕이 되었다.

좋게 말하면 라인이 동아줄에서 금줄이 되었다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손에 쥐고 있던 밧줄이 목에 걸린 목걸이가 됐다는 거다.

“바쁜 두 사람이 나의 재산을 직접 옮겨주고자 먼 도성을 찾아와 인사를 올리니, 무척이나 고맙게 생각한다.”

“진즉에 찾아와 예를 표해야 했음에도 신들의 결례를 용서해 주시니 망극할 뿐이옵니다.”

“북방의 상황은 어떤가?”

“지극히 순탄하옵니다.”

육진 일대의 국경 너머는 내가 김자강, 율보리, 석탈리를 통해 전부 접수했다.

후방까지 든든하니 일대에서는 상대할 존재가 없는 연합체가 됐겠지.

물론 이 즈음 되어서는 배가 불러서 독립할 생각도 들었겠지만, 세 명이 서로를 견제하는 상태라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을 거다.

그렇게 어영부영하다 결국은 내가 정식으로 접수하는 거지.

“여기 자리한 제신들 중에서 김자강을 아는 사람은 있을 거다. 율보리의 이름을 들어본 자도 있겠지.”

나는 제신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부디 두 사람에게 출신을 트집 잡아 결례를 끼치는 사람은 없기를 바란다. 경들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 역시 나의 사람이자 친우이며, 또 수고하여 머나먼 동북면에서부터 나의 재산을 옮겨주고 인사도 하지 않았나.”

다시 김자강과 율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신들에게 그대들이 옮긴 나의 재산을 구경시켜 주게.”

“예.”

김자강과 율보리는 자세를 고쳐 수많은 제신들에게 향했다.

그리고 각자가 품고 온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

내용물을 본 제신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영의정 홍섬이 대표로 아뢨다.

“은이 아니옵니까?”

“그렇다.”

“하지만 저만한 은이 어떻게…….”

북방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만일 귀금속이 있었다면 진즉에 유용한 것으로 바꿨으리라.

그러나 두 사람이 가져온 상자에는 순도 높은 은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만한 양의 은이 북방에 있었다는 건 마치 하늘에 흙이 떠다니고 땅에 구름이 묻혀 있다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차차 경도 사정을 알게 되겠지만 굳이 대답을 해주자면, 내가 용돈벌이를 했네.”

“용돈으로 치부하시기에는…….”

너무나도 막대한 양의 은이었다.

하지만 내가 끌어모은 은은 고작 두 상자가 다가 아니다.

여진족들은 대금으로 받은 소금을 다른 부족에게 팔아 은 따위는 언제든지 다시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겠지만.

틀렸다.

나는 은이 품귀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여진족 사회에 유통되는 은이란 은은 모두 긁어모았다.

모조리!

덕분에 명나라에서는 늘어난 여진족의 약탈로 몸살을 앓고 있었지만 나야 알 바 아니었다.

“내가 농기구 양산에 필요한 비용을 정말로 댈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불신자들이 있어서 말이네. 재산을 가져오는 김에 겸사겸사 신하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네.”

“신들이 어찌 감히 전하의 말씀을 불신하였겠사옵니까. 하나 이렇게 직접 보여주시며 신하들을 안심시켜 주시니 지극히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홍섬은 예를 표하더니, 애써 외면하면서도 시선이 은으로 향한다.

상자 한 가득 쌓인 은은 ‘0’이 끝도 없이 박힌 수표와도 같았다. 물욕이 없는 사람조라 믿기지가 않아서 눈이 가리라.

물론 홍섬이 물욕이 없는 사람이라는 건 아니고.

“곧 공금이 되어 실컷 만져볼 수 있을 터인데 그리도 관심이 가는가?”

“아, 아니옵니다.”

홍섬은 물론 제신들이 애써 고개를 돌렸다.

고상한 인격으로 유명한 노수신과 이이도 마찬가지였다.

“경들은 그동안 나라가 가난하여 대신이면서도 녹봉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니, 내가 그대들의 노고를 잘 아는 왕으로서 조금의 포상도 못 해주겠나.”

마치 나눠줄 것처럼 운을 떼자 신하들이 얼굴이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조선은 황금이 이래로 비축과 예산이 끊임없이 줄어들었다.

아무리 백성들에게 적게 거두는 것을 이상적으로 삼는다지만, 현실과는 배치되는 기조 속에서 징세조차 부패와 타락으로 더렵혀지자 조정은 절약이 선택사항이 아니게 됐다.

관리의 녹봉도 계속해서 줄어들었으며 가뭄이라도 들었다간 반도 못 받는 일이 흔했다.

심지어는 얼마 있지도 않은 당상 대신들조차 녹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청렴하게 일하는 자들은 가문의 지원에 기대야 했다.

탐욕스러운 자들이 녹봉이 충분하다고 부패를 저지르지 않는 건 아니지만, 부족한 녹봉은 멀쩡한 사람도 부패를 저지를 명분이 된다.

명나라의 꼴이 어떻던가?

관리들 녹봉도 세입이 정상화된다면 마찬가지로 정상화해야 했다.

“경들의 기대어린 눈빛을 보아하니 엎어진 물을 다시 담기는 글렀군. 다들 걱정하지 말고 이 순간을 즐겨라.”

“망극하옵나이다.”

홍섬이 밝은 얼굴로 예를 올리자 제신들도 뒤따라 예를 올렸다.

김자강과 율보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신하들의 선물을 가져온 덕으로, 오랑캐라 멸시하던 자들도 인식을 달리했다.

두 사람은 비어 있던 자리로 들어가 연회에 녹아들었다.

왕이 은이 난 경위와 북방에 대한 영향력은 자세히 말해주지 않은 관계로, 제신들은 호기심과 궁금함으로 김자강과 율보리에게 정보와 해명을 구걸했다.

덕분에 두 사람이 콧대가 높아진 채로 인기인의 기분을 즐길 동안 나는 계획대로 흘러갔음을 확인하고서 만족한 기분으로 잔을 기울였다.

* * *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좋지 않군.”

나는 농기구 머리들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썩 호의적인 느낌은 아니어서일까.

불시방문이라는 벼락을 맞은 선공감 제조가 덜덜 떨며 말했다.

“문제라도 있으시옵니까?”

“말하지 않았나.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좋지 않다고.”

최전방에서 전쟁질까지 해봤던 나라 철에 대해서도 안목이 있었다.

선공감에 비축된 농기구의 초도 생산량의 품질은 내가 경험한 무기의 품질에 비해 많이 낮았다.

“비용처리를 내수사에서 전담한다니 이때다, 하고서 한탕 남겨먹을 생각한 건가? 응?”

“아, 아니옵니다! 신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발뺌부터 하는 선공감 재조였다.

나는 동행한 위사를 불렀다. 그가 다가오자 나는 환도를 뽑았다.

-스르릉!

스산한 소리에 주변에 시립한 선공감 관리들은 제조부터 밑바닥까지 모조리 무릎을 박고서 절을 올렸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신은 정녕 모르는 일이옵니다! 선공감에서는 단지 양사에서 만든 농기구들을 보관만 하고 있을 뿐이지, 생산에는 어떠한 관여도 하고 있지 않사옵니다!”

“그래?”

“예, 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하하…… 그렇다면 자네에게는 다행이겠는데. 고개를 들게.”

선공감 제조는 벌벌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어찌하여 겁을 그리도 먹으셨나? 내가 이걸로 피라도 흩뿌릴 줄 알았나.”

“아, 아, 아니옵니다.”

“아니긴 뭘 아닌가. 바짝 쫀 것을 보아하니 내가 이 환도로 제조의 배라도 쑤실 줄 알았던 게 분명하군.”

나는 환도를 쥐고서 살살 흔들었다.

익숙한 감각. 적절한 무게 배분. 겁대가리도 없이 누구보다 앞에서 서서 내달렸던 과거의 분홍빛 추억이 떠올랐다.

회상을 마친 나는 제조에게 말했다.

“나는 함부로 칼을 휘두를 생각은 없다. 단지 그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야. 환도의 날과 농기구의 머리를 비교해 보라.”

선공감 제조는 그제야 안심했는지 조금 편해진 시선으로 도신과 농기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신은 매끈한 날이 하얗게 빛났고, 농기구는 시커먼 주제에 자글자글 박힌 이질적인 색상의 점들이 눈에 띄었다.

“많이 다르지 않나?”

“그, 그러하옵니다.”

나는 위사에게 환도를 돌려주고는 물었다.

“이렇게나 품질 차이가 심한 이유가 무엇인가?”

“시, 신은 잘…… 송구하옵나이다.”

“선공감의 제조가 농기구에 대해서 꼭 알 필요는 없지.”

선공감의 역할은 토목과 궁궐을 유지, 보수하는 일이었다.

내가 찾아온 이유는 단지 농기구 초도 생산분이 선공감 창고에 보관됐기 때문일 뿐.

“하지만 알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농기구를 제작하는 호조와 공조의 담당들이지.”

“…….”

“과인이 농사에 대해서는 식견이 부족해서 농기구의 품질이 떨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오해가 사실인지, 아니면 착각인지 해명해 줄 사람이 필요하네. 무슨 뜻인지 알겠나?”

“당장 불러오겠사옵니다!”

“그러게.”

윤허가 떨어지기 무섭게 선공감 제조는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선공감을 탈출했다.

남은 관리들은 자신을 버려두고 떠난 장관의 뒤통수를 흘기고는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러고들 있나. 보관 이상으로 이렇게 된 것이 아닌 이상, 그대들 잘못은 없으니 이만 돌아가서 일들 보게.”

“예!”

선공감 관리들은 힘찬 대답과 함께 장관처럼 어딘가로들 도망치듯 흩어졌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선공감 제조가 두 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다.

“저, 전하……. 호조판서와 공조판서이옵니다.”

제조는 두 사람을 소개하고는 물러났다. 자신은 책임질 게 없다는 듯.

혼낼 사람은 없는데 왜 제 발 저리는 인간들만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로 제 발 저릴 일이 있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겁이 많아서 그러는 건지.

불려나온 이산해와 김성일도 잔뜩 긴장한 모양새였다.

“제조에게 사정은 전해 들었나? 내가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바쁜 사람을 귀찮게 만들었군.”

“아니옵나이다.”

이산해가 나서서 답했다.

“일이 잘 돌아가고 있어서 싶어 찾아봤더니 농기구 품질이 많이 실망스럽더군. 내가 여태 본 농기구들 상태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지만, 원래 이런 건가?”

만일, ‘원래’ 이런 게 아니라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