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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44화 (44/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44화

16. 하늘을 울게 만들(3)

몸 좀 사릴 분위기라는 이이의 경고가 있었지만 나에게 퇴로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비격진천뢰를 만드는 일은 이미 시작이 됐거든.

조정에서도 이미 말이 돌았는지 사람이 직접 찾아왔다.

“여, 첨정! 게 있는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오니 병조좌랑 정철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기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소식들 전해주려고 왔지.”

“무슨 소식을요?”

“좋은 소식 하나, 나쁜 소식 하나. 뭐부터 들어보겠나?”

“무슨 뻔한 소리를……. 그럼 나쁜 소식부터 듣겠습니다. 그래야 바로 좋은 소식 듣고 기분이 덜 상할 테니까요.”

선택을 하니 정철이 문득 빈정 상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문제인가 싶었는데 정철이 친절하게 말했다.

“그럼 순서가 안 맞는다고. 좋은 소식부터 듣게.”

“…….”

답정너도 아니고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겁니까. 어이가 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원래 이따금 실없는 사람이 또 정철이기도 했다.

술을 너무 좋아하는 탓이겠지. 혈관에 피 대신 알코올이 흘러서 항상 취해있는 걸 거다.

“좋은 소식은 첨정이 진행하던 일이 거의 통과됐다는 걸세. 어떤 말이 내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병조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있다면 예정 배정과 시범 생산을 승인하겠다는군.”

“오. 그럼 나쁜 소식은 뭡니까? 호락호락한 일은 아닐 것 같은데요.”

“딱 맞췄네. 병조판서께서 자네를 직접 보고 싶다시네. 승인에 앞서 몇 가지 논의할 일이 있으시다는군.”

역시는 역시다.

귀한 나랏돈 쓰는 일인데 사업을 쉽게 벌일 수야 있나.

하다못해 조선 조정은 상시 긴축상태다. 인구도 늘어나고 실질세율도 늘어나는데 예산은 갈수록 줄어드는 신기한 나라지.

“꼭 저만요?”

“명목상 군기시에서 하는 일이라고만 논의가 됐지만, 책임자가 자네란 건 모두가 알아. 알면서 거들먹거리려는 게 아니라면 가서 판서대감이나 뵈세.”

“알겠습니다.”

바깥에서 이야기가 오가서일까.

그새 군기시 사람 몇 명이 나오더니 정철에게 예를 표했다. 그중에는 품계가 한두 단계 높은 사람들도 있었다.

하기야 병조는 군기시의 상위 기관. 그런 차원에서 정철은 하도급을 방문한 원청 직원이라 할 수 있었다.

잘 보여야지. 그중에는 군기시정 심의겸도 있었다.

“정 좌랑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소?”

썩 호의적인 태도였다.

“첨정을 빌려가려 합니다. 병조판서 대감께서 직접 뵙고자 하십니다.”

“흠, 비격진천뢰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데려가게. 가급적이면 좋은 결과 가져왔으면 좋겠군. 첨정, 고생하게.”

“고생까지야……. 나랏일인데요.”

“하하. 순진한 얼굴로 맹한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아직 사정을 모르는 것 같군. 좌랑, 가면서 설명해주시게.”

“알겠습니다. 그럼.”

정철이 살짝 상체를 숙이자 심의겸은 손을 들어주었다.

군기시 밖으로 나와서 나는 정철에게 물었다.

“무슨 설명을 하라는 겁니까?”

“아. 역시 모르나보군. 이번에 병조판서에 제수되신 분이 사정이 조금 있으셔서 그러네. 원래 그 자리에는 평안감사를 지내던 유 대감이 내정되어 있었거든.”

“유 대감이라면…….”

유경심(柳景深)을 뜻하는 건가?

“도성으로 돌아오시던 도중 병사하신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안타까운 소식이라서 우연히 들어보았습니다.”

“그분이 맞네. 그런데 갑자기 졸하셨으니 조정에서는 발등에 불 떨어졌지. 후임을 다시 논의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었거든?”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됐긴, 전직 장관 하나 땜빵으로 넣었지. 이전에 이조판서를 지내셨던 박 대감이시네.”

“아아…….”

이조판서는 여느 판서들과 동등한 지위를 가졌으나, 실세를 따지자면 육경(六卿, 육조 판서) 중에서 이조판서가 가장 발언력이 강했다.

조정을 구성하는 문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인사였고 이조판서는 그 책임자였으니까.

때문에 이조판서란 자리는 대단한 영예였다. 삼의정이라는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가는 관문이기도 했고 말이다.

마치 이조전랑이 당상관직으로 나아가는 관문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박 대감은 이조판서를 지내고도 병조판서에 배치됐다. 그마저도 애매할진데 땜빵이라니, 실로 바람 빠지는 대접이 아닐 수 없었다.

“눈치를 좀 봐야겠군요.”

박 대감이 기분이 한참 안 좋을 때니까.

“바로 이해했군. 뭐, 너무 눈치 보지는 말게. 분풀이가 필요한 사람이라 어쩌면 어느 정도는 당해주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거든.”

“적당히 하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지.”

정철이 바로 앞의 대문을 가리켰다. 대화를 이어가던 우리는 어느새 병조 앞에 도착했다.

나는 정철의 안내를 받아 내부로 들어섰다. 생소한 광경과 함께, 정철에게는 익숙할 병조의 녹사와 서리들이 인사를 올렸다.

관청이 얼마나 큰지 내부에도 담장과 함께 중문(中門)이 있었다. 그 너머로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두 채 있었다.

“어딜 그렇게 구경하시나? 서울 구경 처음 온 사람처럼?”

“병조는 처음이라 그럽니다. 저기 기역자 모양으로 꺾인 곳은 뭡니까?”

“저쪽은 사령방일세. 잡일과 허드렛일을 맡는 사람들이 머무는 장소고, 반대편에 담장으로 두른 건물은 서리청이네. 아전들이 휴식하는 장소지.”

“호…….”

군기시에도 사령방과 서리청은 있었다. 하지만 이만한 규모는 아니었다. 좁은 부지에, 무기고와 작업장이 본청보다 배는 더 컸으니까.

거기에서는 부대껴 사는 느낌이라면 병조는 여유가 있으면서도 격식이 갖춰진 느낌이었다. 역시 나라의 실무를 전담하는 여섯 관청 중 하나다웠다.

“실제로 나 같은 사람들이 일하는 구역은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오지.”

나와 정철은 중문(中門)을 넘어 병조 안의 또 다른 구역으로 들어섰다. 내부에는 마치 고래등처럼 커다란 기와집이 두 채 있었다.

“왼쪽 건물이 나 같은 낭청들이 일하는 낭청대청이고, 오른쪽이 당상대청이라고 어르신 셋이 업무를 보는 공간이지.”

“원래 따로 일하는 겁니까?”

병조의 정식 관리는 당상관 넷에, 당하관 여섯. 고작 열 명이서 일하는 장소라기엔 건물도 구역도 과한 감이 있었다.

“아침 회의는 당상대청에 다 모여서 하지. 그런데 우리 같은 실무자들과 분위기만 내러 온 늙은이들이 한데서 일할 수야 있나?”

정철은 실실 웃다가 갑자기 정색하며 말했다.

“어디 가서 내가 이런 말 했다고 떠들지 말라구.”

암.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상관들과 소속 관청을 대놓고 빈정대는 이이가 비정상이었다.

“안 그럽니다, 안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

정철은 당상대청으로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소관 정 좌랑입니다. 하명하신대로 군기시 이 첨정을 데려왔습니다.”

“들라 하게.”

“예.”

정철은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는 듯,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당상대청으로 나아갔다.

문은 정철이 열어주었다. 그러나 함께 들어오지는 않았다.

내부에는 네 개의 자리가 있었지만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병조판서 박영준. 그는 최근의 인선으로 더욱 고지식해진 인상을 한 채 입을 열었다.

“자네가 이 첨정인가?”

“예, 병조판서 대감. 소관 군기시 첨정 이순신이라 합니다.”

“음. 젊은 친구가 능력이 좋군. 그 나이에 벌써 종사품 관직이라. 생각하는 것도 비상하고…….”

“감사합니다.”

“이 첨정이 제시한 개념은 매력적이긴 하네. 투척형 폭탄의 화력과 대형 신기전의 사거리를 모두 챙겼군.”

“비격진천뢰라는 이름 그대로입니다.”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박영준이 꺼낸 말들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판서라는 직함이 딱지치기로 따낸 것은 아니라는 듯, 냉정한 판단이 이어졌다.

“다만 실효성 측면에서 우려가 드는군. 자네가 회령에 있었고 원정에서 큰 역할을 해냈다는 걸 아네. 거기서도 질려포를 쓰던가?”

질려포는 비격진천뢰의 전단계라 할 수 있었다. 항아리 형태로 깎은 나무통에 화약과 마름쇠를 채우고 심지를 꽂은 폭탄이었다.

사용법은 불을 붙인 뒤 투척하는 것. 비격진천뢰 역시 대포가 없을 때 동일한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아니요. 질려포는 쓰지 않았습니다.”

“어째서인가? 물론 없어서 쓰지 않았겠지. 하지만 있었다면 썼겠나?”

현장을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과연 질려포의 효용을 인정하냐는 질문이었다. 나로서는 간단히 확언할 수 없었다.

질려포는 분명 우수한 무기다. 하지만 용도는 제한적이었다. 사람의 손으로 날리는 것인 만큼, 투척 거리는 넓지 않은데 마름쇠는 사방으로 튄다.

조선군의 주적인 여진족은 대형을 이뤄서 싸우는 자들이 아니었고, 난전 중에 질려포와 같은 파열탄이 전선에서 폭발하면 피아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

물론 이러한 점을 감안해 질려포는 해상에서 주로 쓰이고, 육상에서는 질려포에서 마름쇠를 제외한 버전인 산화포(散火砲)를 쓴다.

하지만 마름쇠가 제거된 산화포의 효용이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음……. 쓰지 못했을 겁니다.”

광범위한 타격을 피아 구분 없이 발생시키는 폭발물의 용처란 무척이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질려포를 적진에 투척한 뒤 빠르게 이탈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병종은 기병뿐이었고 마상에서 돌진, 점화, 투척, 이탈을 단숨에 해낸다는 건 그야말로 입으로나 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생각도 같네. 현재 질려포는 그다지 쓰이고 있지 않지. 비격진천뢰 또한 질려포와는 원리 차원에서 다르지 않다는 건 이 첨정도 부정할 수는 없을 걸세.”

“하지만 대포를 이용해 적진으로 쏘아 보낼 수 있습니다. 이만한 사거리라면 분명 유용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적들이 돌진할 때 그들의 경로에 비격진천뢰를 발사한다면, 꼼짝없이 당하거나 혹은 돌진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한 번 꺾인 돌진은 이전 같은 날카로움을 다시 낼 수 없는 법입니다.”

“비격진천뢰란 목곡이라는 부품을 이용해 폭발 시간을 조절하지. 운용하는 병사의 숙련도가 중요하겠군.”

아무리 효과적인 무기라도 다루기 어렵다면 점수가 많이 깎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만 제약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훈련을 위해 많은 재원이 소모되고, 기존의 베테랑이 손실되면 무기에 익숙하지 않은 신입이 자리를 대신하게 되니까.

“야전의 소규모 전투에는 분명 운용에 익숙한 병사가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적의 병력이 많거나, 고정된 지점을 타격할 때는 많은 숙련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완구라는 전용 대포를 사용하는군. 비격진천뢰의 효용이 십분 발휘된다 하더라도, 과연 이처럼 부수적인 장비를 만들어내 써야만 할 이유가 있나?”

“기존 대포와 혼용이 가능한 형태로 만들면 됩니다. 다만 크기가 줄어들 터이니, 화력 역시 줄어들게 되겠지요.”

“어느 쪽이로든 좋게 볼 수 없군.”

박영준의 어조 역시 좋지만은 않았다. 이대로 퇴짜를 맞는 걸까?

그러기엔 아쉬운 점이 많았다. 비격진천뢰는 유용한 무기였다. 특히 성을 공략하는데 탁월했다.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을 점거한 적병들이 날아온 비격진천뢰를 가지고 놀다 폭사하고서 깜짝 놀라 퇴각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대병의 움직임과 성을 지키느냐, 버리느냐는 고작 수십 명 폭사했다고 결정될 일이 아니니 그 일화 자체는 과장이라 봐도 무방할 거다.

하지만 한 개의 비격진천뢰가 아니라 수십, 수백 개의 비격진천뢰가 피할 곳도 없는 배 위에, 성 안에 떨어진다면?

버틸 적은 어디에도 없다.

애초에 비격진천뢰는 소규모 접전을 위한 무기가 아니었다. 전적으로 임진왜란과 같은 대병, 대군과 맞서는 전면전을 상정한 무기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지금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지.

“지금 조선은 변방 오랑캐들의 패싸움이나 받아주고 있지만, 언젠가는 정말로 전쟁이라는 걸 하게 되겠지요. 그때 비격진천뢰는 반드시 큰 공훈을 세울 겁니다.”

나의 말에 박영준은 다만 흠, 하고 말 뿐이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네.”

“예. 그럼 소관은 이만…….”

“잠깐.”

박영준은 조금 풀어진 어조로 물었다.

“요새 이 교리는 어떻게 지내나? 자네랑 보통 사이는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이 교리라면 홍문관 교리 이이를 말하는 거겠지. 아, 그러고 보니 이이는 이전 직위가 이조좌랑이었다.

박영준은 이조판서였고 말이다.

어째서 이이에게 관심을 가지는지는, 뻔했다.

“여전합니다. 이번에는 새로 들어간 홍문관을 작살내겠다고 공공연히 말하더군요. 뒷담 차원에서 하는 분풀이 정도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몇 번 당해봤을 박영준은 사심이 담긴 반응을 내놓았다.

“여전히 미친놈이로군.”

그건 나도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봐도 제정신은 아닌 사람이라. 능력이 없었더라면 진즉 폐급 1호가 됐을 양반이었다.

박용준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기 대사성이 부제학에 제수된다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나?”

기 대사성이라면 이준경을 숙청하는데 앞장선 성균관 대사성 기대승이다. 이전에는 실세 심통원을 저격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완전 암살자다. 왕의 명을 받들어 감투 무거운 사람을 쑤셔대니 말이다.

박용준의 말을 들으니 썩 재미있는 상황이 펼쳐질 것 같았다. 기대승이 이이가 있는 홍문관의 부제학이 된다라…….

“조만간 재미있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네 생각도 그렇군. 알았네, 이 첨정. 비격진천뢰에 대해서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도 논의를 해본 다음 생각해보도록 하지. 이만 볼일 보게.”

“알겠습니다.”

우려와는 달리 박영준은 나에게 분풀이 따위는 하지 않았다.

단지 냉정하게 평가했을 뿐.

조정에서 이미 좋게 이야기가 됐다니 대충 넘어가줄 수도 있었고 그럼에도 굳이 부른 것이 분풀이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반감은 없었다. 엄연히 나랏일인데 적당주의로 넘어가는 쪽이 나로서는 더 불쾌했을 테니까.

이제 남은 것은 그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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