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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43화 (43/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43화

16. 하늘을 울게 만들(2)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선조 시기 화포장 이장손(李長孫)에 의해 발명되었다.

농구공과 유사한 크기를 가진 폭탄이었으며, 금속재질의 구형 껍질에 화약과 빙철(憑鐵, 마름쇠)를 채운 뒤 목곡(木谷)이라는 지연신관을 심은 폭탄이다.

무겁기 때문에 완구(碗口)라는 뭉툭한 전용 대포를 사용해 발사했으며 5, 600보의 사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비격진천뢰의 등장은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이전까지는 물론 금시대에도 포탄은 무식한 쇳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용도 역시 살상보다는 진형 붕괴, 적의 사기 저하, 구조물 파괴가 주 목적이었다.

하지만 비격진천뢰는 제한적인 물리력에 폭발력까지 더해진 무기였다. 이전의 대포가 맡았던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하면서, 적에게도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개념일 뿐입니다. 조정에서 채택을 하려면 실물을 내놓고 위력을 시범 보여야 하는데, 실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과 예산이 필요할 겁니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었다. 단지 미래의 사람으로서, 이 시대에서 시도해볼 만한 영감을 몇 개 가지고 있을 뿐.

몇 개는 내가 실현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특히 폭발물인 화약을 주로 사용하는 신무기 개발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자네가 제공한 개념과 설계는 나쁘지 않으니, 조정에 정식으로 보고한다면 예산은 어느 정도 내려올 걸세.”

심의겸은 이순신의 편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편이기도 했다.

비격진천뢰를 실현한다면 큰 공훈이 될 거다. 어디 가서 자랑하기 좋은 경력도 되겠지.

마침 첨정 이순신은 그가 제시한 화약 가공법으로 위상이 높아진 상태였다. 평화로운 시대에 신무기 개발은 내키지 않는 것이지만, 이순신의 이름을 내건다면 조정을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

“한 번 적극적으로 이야기 해보겠네. 예산이 내려오면 이 일은 자네가 전담하고. 다른 누구보다 이해도가 높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내가 자네에게 더 고맙지. 대답이 돌아오면 알려주도록 하겠네. 그동안 보완할 게 있으면 보완하게.”

“알겠습니다.”

나는 심의겸에게 인사한 뒤 물러났다.

동료들은 경외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운이 좋아 나이에 비해 높은 자리에 오른 꼬맹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뛰어난 능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차세대 재상만이 있을 뿐.

* * *

“요새 바쁘다면서?”

이이가 말했다.

일전에도 봤던 그였지만 다시 자리를 가졌다. 이이는 기꺼이 초대에 응해주었다. 혹시라도 삐치지는 않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워낙 나를 챙겨주려고 했는데 내가 만류해서 말이다.

“예. 근래 들어 바빠지긴 했습니다. 괜히 일을 벌여서…….”

“괜히? 하하! 괜히는 괜히로군. 군기시정이 자네 얘기를 얼마나 하는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야. 나마저 질릴 정도라네.”

그리 말하면서도 낯빛은 나쁘지 않은 이이였다. 오히려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의 사람 보는 안목이 틀리지는 않았다는 얼굴이었다.

“제가 알기로는 근래 교리께서도 바빠지신 걸로 아는데요.”

최근 이이는 이조좌랑에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품계도 정육품에서 정오품으로 승진. 그래도 나보다는 한 단계 낮았지만 위세는 여전했다.

“아, 바빠졌다기보다는, 귀찮아졌지. 나름 유명인인데 아직까지도 나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는 놈들이 있더라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래(新來) 운운하는 놈들 말일세.”

“아.”

그런 면에서 이이는 참으로 유명인이 맞았다.

처음으로 관문에 들어섰을 때부터, 강요받는 신참례를 상관 고발로 박살 내버린 이이였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이이를 시험하려는 사람이 있다니 놀라웠다.

“청요직 핵심 기관이라는 자존심이 있나 보군요.”

홍문관은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청요직이라 불리는 삼사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홍문관은 학문이 뛰어난 자들이 주로 배치되는 곳이었다.

관원 전원이 왕과 학문을 논하는 경연의 관직을 겸하였으며, 정삼품 부제학부터 종육품 부수찬까지는 전부 왕의 교서를 작성하는 지제교도 겸했다.

재상들을 밤낮으로 공격해대는 사헌부에 비해 존재감은 떨어졌지만, 매일같이 왕을 대하는 홍문관 역시 만만찮은 곳이었다.

“자존심? 하! 홍문관이 별건가?”

“별거는 맞지요. 남들이 어디 가서 그런 식으로 말했다간 밤길 걷다 매 맞을 겁니다.”

재상들 대부분이 홍문관 경력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각자 한 번씩은 몸을 담았던 곳이었고, 이이가 공공연히 홍문관을 욕보인다면 현직 관리들뿐만 아니라 전직 관리들조차 함께 모욕하는 것이다.

당연히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할 짓이다. 승진을 어디 미리 맡겨놓은 게 아닌 이상은 말이다.

그럼에도 태연하게 홍문관에 맞서는 이이는 실로 범상치 않은 자였다. 아마 패기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지 않을까?

“하하하……!”

이이는 대소하고는 말했다.

“내가 홍문관도 별것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겠군.”

“솔직히 말해 무섭습니다.”

“뭐가?”

“교리가요.”

세상에는 온갖 부류의 위험한 인간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두 부류는 이거다. 잃을 것 없는 놈, 눈에 뵈는 게 없는 놈.

그리고 이이는 후자에 속했다.

“무서워하지 말게. 적어도 나는 자네의 편이 아닌가?”

“그래서 다행이기도 합니다.”

“군기시정이 자네를 아낀다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군기시정이 못해주는 일이 있으면 나에게 말해주게. 내가 누구 편인지는 첨정도 잘 알지 않나?”

“잘 알지요.”

내가 자네 아끼는 거 알지?

이유는 참으로 모르겠다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간다. 누구나 배려심 많은 사람에게는 호감을 느끼는 법이지.

마침 이이도 그 점을 얘기했다.

“이번에 숭신방에 새 건물을 올린다면서?”

“그렇습니다. 그동안 도성을 떠나있느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길을 주지 못했지요. 그래서 만회를 좀 할 생각입니다.”

“능력 좋아, 성격 좋아……. 하하하.”

이이는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좋은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조정이란 커다란 파도. 내가 잘 하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는 별개로 대세는 흘러간다.

“영의정 대감께서 사임하신 건 알고 있겠지?”

“예.”

회령부사 장필무가 알려준 소식이었다. 이제 도성으로 돌아온 지도 달포가 넘었는데 아직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 보면,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뜻이겠지.

영의정 이준경은 선조를 옹립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공신이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르고 이에 반대했던 심통원이 몰락했을 때만 해도, 이준경의 영화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선조의 치세가 갓 4년 차에 들어선 시점에서 이준경은 숙청됐다.

“꺼림칙한 일입니다. 영상이 이뤄낸 업적을 감안하면 최근의 처우는 정도가 과했지요.”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영상과는 위훈 삭제의 일로 약간 마찰을 빚은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이 반가운 건 아니야.”

“위훈 삭제요?”

“자네도 을사년의 사화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을사사화.

당시의 조정은 두 개의 계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인종을 지지하는 대윤과 명종을 지지하는 소윤이 그러했다.

두 사람의 부왕이었던 중종이 나이가 들어 노쇠하자 당시 세자였던 인종이 보필을 하였으며, 이후 중종이 승하하자 자연스럽게 왕위를 잇게 되었다.

이전부터 인종을 지지했던 대윤들에게는 희소식이었으나,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허무하게 승하했으며 보위는 명종에게로 전해졌다.

대윤에게는 그들의 지주가 없어짐과 동시에 소윤에게는 영광의 시기가 온 순간이었다. 그리고 소윤의 수장들은 기다림의 미학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소윤은 명종의 즉위 첫 해에 몰아치듯 대윤을 숙청했다. 대윤을 구성하던 백여 명이 인물들이 죽거나 유배 당했으며 애먼 종친도 연루되어 사사 당했다.

“영의정은 을사년의 일이 비극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계셨네. 당시 공신에 오른 자들이 실상은 공을 세운 것이 아니라, 나라에 해를 끼친 악인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지.”

“하지만 위훈 삭제에는 소극적이었군요.”

“맞아. 영의정은 전하의 힘이 빠르게 커져가는 것을 우려했네. 이미 형식적인 대리청정은 거둬버리고 여전히 조정에 깊게 관여하고 계신데, 공신들까지 삭제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나?”

그야말로 나라를 쥐고 흔든다는 인상을 주기 딱 좋았다.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선조가 실제로도 나라를 쥐고 흔들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선조가 어디 가지는 않았겠지.

다방면으로 멸시를 당하는 인물이었지만 공통적으로 인정받는 부분도 있었다. 선조는 자신의 왕권과 관련된 일이라면 비정하리만치 유능한 사람이었다.

“나라고 영의정의 입장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조정에서의 지분 싸움보다는 옳은 일을 시행하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당시에는 이런 상황에까지 이를 줄은 몰랐지.”

“설령 알고 계셨더라도 달라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교리께서는 일관적인 분이시니까요.”

“뭐……. 하하. 그랬을지도.”

이이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첨정이 공을 세워 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면 나로서는 분명 기쁠 걸세.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재주보다 처신이 더 중요할 것 같군. 무슨 말인지 알겠나?”

자신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영의정 이준경마저 단호하게 숙청해버린 선조다.

그런 왕의 곁으로 가는 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었다. 유능하였으나 변칙적이고 폭압적인 왕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맞은 예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선조는 변칙적이고 폭압적인 왕이었다.

“우려는 하고 있습니다. 어찌 저라고 두려운 마음이 없겠습니까? 다만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물러설 수가 없는 겁니다.”

“해야 할 일?”

“……예.”

머지않아 일본이 쳐들어오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열도를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인(天下人)이라는 이명을 얻었으나 그는 열도 따위가 진정 천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태어나, 밑바닥에서부터 관백(關伯)이라는 지위에까지 오른 그는 세상이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공공연히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소개했고 대륙을 정복하여 억만 년 통치하겠으며, 이에 굴복하지 않는 나라는 용서치 않겠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이러한 과대망상의 결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20만 대군을 파병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제가 마침 이 시대에 태어나, 미천한 자질로 뛰어난 재주를 갖게 된 것은 분명 의도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만일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저는 따라야지요.”

“혹자는 사람이 태어날 때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서 태어난다고 하지. 어쩌면 자네는 자네 말대로 이뤄내야만 할 위업이 있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이이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세상이 그에 협조적이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네. 만일 자네가 진정으로 해내야 할 위업을 타고 났다면, 지금은 도리어 조심해야 할 시기야.”

“음…….”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게 교리께서 하실 말씀이십니까?”

홍문관 상대로 깽판 치겠다는 인간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아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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